앤드류 노먼 윌슨(Andrew Norman Wilson)
본 호에서 앤드류 노먼 윌슨은 예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보람 없고, 무력하며, 대가 없이 감내해야 하는 타협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진실은 이렇다. 비평가의 글은 대개 읽히기 위해 작성되지 않는다. 일단 출판되고 나면, 그 가치는 작가의 이력서에 기입되는 한 줄, 프레스 패킷의 한 페이지, 인스타그램 게시물, 그리고 갤러리 웹사이트의 하이퍼링크된 인증 도장으로 전환된다. 리뷰는 파괴적일 필요도, 지나치게 찬양할 필요도 없다. 미술 산업에는 품질을 규제하는 표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평점 체계 역시 없다. 리뷰는 단지 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며, 그 전시에 포함된 작업이 미술사의 일부라는 것, 미술사가 가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증해주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글은 수집가, 큐레이터, 교수 임용 위원회에게 해당 작가가 투자 가능한 집단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갤러리 오프닝 이후 열리는 초대 전용 만찬 자리에는 언제나 비평가들이 있다. 갤러리스트들은 회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하다. 이 자리에서 비평가가 네그로니를 과하게 마시고, 애프터파티에서 케타민에 취한다는 사실은 문제 되지 않는다. 다음 날, 그들이 형광등 아래에서 판매 디렉터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전날 오프닝에서는 늘 그렇듯 작품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왔을 때, 지독한 숙취로 전시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역시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텍스트들은 대개 익명의 ‘용병’으로 고용된 다른 비평가들이나, 비평가와 유사하게 모호한 분야의 석사 학위를 가진 이들이 작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가의 의도를 과잉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쿤스트페어라인(Kunstverein) 토트백에 끼워 둔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비평가들은 숙취가 가라앉고 나서 자신만의 버전의 글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곧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야 한다. 모두가 비엔날레와, 석유 재벌·무기상·해운 재벌이 후원하는 재단의 오프닝을 향해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조종사는 객실 승무원들이 열세 개의 국적을 대표하고 스물네 개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안내한다. 비평가들은 지구의 광대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세상에는 자신이 잊고 살아온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 낯선 땅들에서 그것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보내는 시간은 이비스(Ibis) 호텔 방에서의 불규칙한 수면, 그리고 프리뷰·오프닝·토크·투어 사이에서 ‘소리 기반의 저항’과 명백히 죽은 아이들의 신발 더미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해리 상태의 반복일 뿐이다.
리뷰 마감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전시 텍스트를 복제할 수 없는, 소음과 아이들의 신발에 관한 난해하고 확산적인 글을 써야 하는 순간, 비평가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얻었다고 상상했던 ‘세계에 대한 관점’과, 전시장 속 예술적 아이디어의 잔재 사이의 틈을 억지로 좁히려 한다. 이들은 종종 글의 첫 문단을 항공 여행의 탄소 배출 문제(“예술계의 물질적 낭비에 도전하기,” 프리즈(Frieze), 2021), 고립주의적 극우 정책(“제12회 상하이 비엔날레: 禹步 프로리그레스—역사적 양가감정의 시대의 예술,” 아트 아젠다(Art Agenda), 2019), 석유 생산(“오일의 경험들,” 아트포럼(Artforum), 2022), US 오픈에서의 성차별(“제9회 부산 비엔날레, Divided We Stand,” 아트 아젠다(Art Agenda), 2018), 흉기 범죄(“집의 여러 의미,” 프리즈(Frieze), 2019) 등에 대한 참조로 시작한다. 모두가 그 간극이 과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은 예술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지름길이며, 지나치게 자주 선택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 지름길을 거부할 여유가 없다. 명백히 죽은 아이들의 신발과 소음에 대한 이 리뷰는 단어당 몇 페니 수준의 원고료에 불과하며, 일부 이탈리아 잡지의 경우 그마저도 1년 후에야 지급된다.
귀국 비행기에서 비평가들은 기내 잡지를 넘기며 생각한다. 뉴질랜드 센트럴 오타고 밸리의 네 곳의 피노 누아 생산자, 디올(Dior)의 주논(Junon)과 비너스(Venus) 드레스, 두브로브니크에서 완벽하게 보내는 삼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글에 책정되는 원고료는 어떠할까. 그러면서 자신들이 급진적 환대, 패션과 라캉적 정신분석의 교차점에서의 예술, 탈식민 비엔날레에 대해 글을 써온 것을 떠올리고, 어떻게 UBS와 도이치은행(Deutsche Bank)이 후원하는 일종의 게토, 사회의 유아용 아이패드 버전같은 궁지에 갇히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다. 예술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이 글은 스파이크(Spike) 80호, “The State of the Arts”에 “What Is It about Art?”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앤드류 노먼 윌슨(Andrew Norman Wilson)은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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