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Brassier, “Accelerationism” (2010, Backdoor Broadcasting Company에서의 강연 및 대담 녹취본)
번역: 윤태균
나는 오늘 닉 랜드(Nick Land)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철학적으로 접근할 것이며,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접근이야말로 가속주의의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혹은 실행 가능한지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속주의 정치가 가능하고 타당한 것인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가속주의적 기획(accelerationist program)의 내적 개념적 정합성(conceptual intelligibility)과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 중 상당수는 어떤 식으로든 닉 랜드의 작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나는 한 번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대화는 실상 ‘논쟁’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가 “기계적 실천(machinic practice)”이라 부르는 문제를 언제나 개념적 문제로 번역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내가 “철학적 보수주의(philosophical conservatism)”를 고수한다고 했죠. 즉, 그가 실천적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이론적 문제로 환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랜드가 주장한 그 “기계적 실천주의(machinic practicism)”는 일종의 실천적 무력(practical impotence)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념적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나는 흔히 회자되는 ‘표상(representation)을 폐기해야 한다’는 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표상 너머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수행적 모순을 낳으며, 이 모순은 단순히 이론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제 실천의 수준에서도 드러납니다. 개념적 차원에서의 모순은 실천적 차원에서의 무능으로 나타나는 법이죠.
이것이 내가 지금부터 논의를 전개할 방식입니다. 나는 닉 랜드의 작업 또는 그의 기획을 세 가지 명시적으로 변증법적 대립의 도식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랜드의 ‘기계적 실천주의’는 어떤 변증법적 대립이나 적대의 개념 자체를 제거하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러한 대립을 통해 그 사상의 강점과 약점을 식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세 가지 대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비판과 유물론(critique and materialism)
2. 목적론과 종말론(teleology and eschatology)
3. 실천주의와 의지주의(practicism and voluntarism)
로빈 맥케이(Robin Mackay)와 나는 닉 랜드의 저작들을 엮은 책 『Fanged Noumena』를 편집 중입니다. 그 글들은 실로 경이롭습니다. 마크(마크 피셔)가 말했듯이, 아무리 그 수사적 격렬함을 혐오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히 유치하고 자기도취적인 초(超)-니체주의(hyper-Nietzscheanism)로 치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세련된 사유입니다. 물론 내 생각에 그것은 여전히 여러 모순에 가로막혀 있지만, 어쨌든 그 텍스트들은 탁월하며, 오늘날의 나른하고 무기력한 베르그송주의적 생기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프랑스 철학자 뱅상 데콩브(Vincent Descombes)는 한때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리비도 경제학(Libidinal Economy)』을 ‘광기 어린 암흑의 헤겔주의(mad black Hegelianism)’라고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즉, 일종의 반(反)-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시도하는 사상 경향이죠. 이와 유사하게, 랜드의 작업은 “광기 어린 암흑의 들뢰즈주의(mad black Deleuzianism)”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들뢰즈의 생기론적 충동, 들뢰즈-가타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긍정의 추진력(affirmationist élan)을 훨씬 더 불온하고, 그러나 개념적으로 더 해방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시도입니다.
이 텍스트들의 진정한 흥미로움은 ‘부정성(negativity)’의 비개념적 재정식화(non-conceptual re-elaboration)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숭고하게 승화된 분노(sublimated fury)로 진동합니다. 나는 바로 이 점, 즉 현대 이론에서 벤 노이스(Ben Noys)가 ‘긍정주의적 합의(affirmationist consensus)’라고 부른 흐름에 맞서 부정성의 힘을 복권시키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랜드가 결국 이 부정성을 긍정주의에 예속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봅니다.
우선, 랜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전제로 작업합니다. 그는 비판을 급진화하고자 합니다. 즉, “사물에 대한 표상의 이념적 조건(the ideal conditioning of the representation of matter)”을 “이념에 대한 물질적 조건(the material conditioning of ideal representation)”으로 전환하려는 것입니다.
랜드의 체계에서 물질성은 오직 ‘생산의 생산’으로만 이해됩니다. 그의 초월적 유물론은 곧 비판의 유물론적 형이상학으로 전화합니다. 다시 말해, 초월적(transcendental)과 경험적(empirical)의 위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칸트적 형이상학 비판(Kantian critique of metaphysics)의 계보 전체, 그러니까 20세기 대륙철학의 여러 버전들로 보충된 이 계보를 물질론적으로 재전유하는 것이죠.
이것이 랜드적 의미에서의 탈층화의 핵심입니다. 즉, 가장 먼저 탈층화해야 할 것은 바로 경험적/초월적의 구분입니다. 이는 비판철학의 작동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탈층화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지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변증법적 환원입니다. 이 차이를 물질(matter)로 환원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랜드는 사유 자체를 물질성의 기능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표상적 사고, 즉 개념적 범주화(conceptual categorization)와 심지어 변증법 자체의 논리조차도, 물질이 생성해내는 기능적 잠재성의 제한된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물질은 스스로 합성적이고 생산적입니다. 물질이 곧 1차적 과정이며, 개념적 표상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2차적이고 파생적입니다. 따라서 합성은 근원적이며 생산적입니다. 모든 합성은 이질적인 항들의 접합입니다.
랜드가 칸트로부터 유지하고자 한 핵심은 초월적 합성(transcendental synthesis)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경험적 항들의 합성이 아니라, ‘강도적 물질성(intensive materiality)’의 자기합성(self-synthesising potency)으로 대체됩니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개념입니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수행한 칸트주의에 대한 논리적 조작을 명쾌하게 드러냅니다. 물질은 그 자체로 기계적 생산, 자기차별화(self-differentiation)이며, 이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조직하는 근본적 이항대립은 ‘강도적 물질성(intensive materiality)’ =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와 죽음, 즉 절대적 무차별로서의 절대적 차이(absoute difference as absolute indifference) 사이의 대립입니다.
랜드는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를 셸링(Schelling)과 직접 연결시키며, 셸링주의적 자연철학의 한 버전을 명시적으로 원용합니다.
이때 그는 개념과 대상, 표상과 피표상의 이항대립을 평준화(leveling)합니다. 초월적 형식과 경험적 내용의 이원론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물질이 스스로 자신의 표상을 생성한다는 일원론적 체계를 세웁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더 이상 사물에 대한 사유의 조건이 아니라, 단지 1차적 과정의 왜곡된 파생물(transcendental illusion)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유물론적 비판이 다시금 비판철학의 근본 문제, 즉 사유와 현실의 연결 관계 문제를 재생산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표상을 우회(circumvent)한 채 ‘물질 자체로서의 1차 과정’을 말하려는 순간, 우리는 바로 칸트가 비판철학을 통해 제기했던 문제로서 사유가 어떻게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훨씬 더 첨예한 형태로 다시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랜드는 이 지점에서 베르그송적 요소를 제거하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들뢰즈의 표상 비판은 상당 부분 베르그송의 표상 비판과 병렬 관계에 있습니다. 들뢰즈가 문제삼는 것은, 표상이 경험의 흐름을 잘라내어 질적 차이의 흐름(flow of duration)을 정태적 객체들로 분절한다는 점입니다. 베르그송은 이를 넘어서기 위해 직관(intuition)을 통해 ‘지속(duration)’의 실재적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경험 이전의 실재적 차이를 ‘직관’함으로써 표상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랜드는 이러한 하위-표상적 경험(sub-representational experience)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표상을 폐기하면서도, 그 자리를 무의식적 죽음충동(thanatropism)으로 대체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는 어떻게 이 기계적 무의식(machinic unconscious)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랜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산된다.”
그의 물질주의적 표상 해체(materialist liquidation of representation)는 표상도, 직관도, 경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말하는 이 “1차 생산(primary production)”에 대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그의 형이상학은 스스로의 정당화 가능성(epistemological legitimation)을 상실합니다.
그는 “사유란 더 이상 개념과 대상 간의 일치(congruence)의 문제, 즉 진리/허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적 과정 자체의 일부다”라고 주장합니다.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의 첫 장 “리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지도화(machinic mapping)’와 ‘표상적 추적(representational tracing)’을 구분합니다.
이제 사유는 더 이상 세계를 재현하지 않습니다. 사유는 물질적 과정의 경향과 운동을 추적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생산적 행위(praxis)가 됩니다. 이때 진리나 정합성의 문제는 소거되고, 사유의 유효성은 단지 강도의 척도로 평가됩니다. 즉, 사유는 1차 생산(primary production)을 가속하거나 억제하는가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 개념적 도식이 곧 정치적 차원으로 번역됩니다. 즉, “기계적 물질주의자(machinic materialist)”의 모든 실천은 ‘생산을 가속하고 강화하라’는 명령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강도성(intensity)’ 개념의 중의성(equivocity)입니다. 칸트적 맥락에서 ‘강도’는 현상의 차원에서의 양적 크기(intensive magnitude)를 의미하지만, 베르그송에게서 강도는 질적 차이의 경험(qualitative difference of duration)을 뜻합니다. 즉, 베르그송에게 ‘강도적 경험’은 항상 주체의 체험적 상관물(phenomenological correlate)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랜드는 ‘주체(subject)’ 자체를 폐기합니다. 그는 표정, 개체성, 정체성 등 모든 주체적 층위를 탈층화해야 할 것(strata to be destratified)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랜드에게는 더 이상 ‘경험할 수 있는 강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강도의 가속(acceleration of intensity)’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자기모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1차적 물질성—죽음으로서의 절대 강도—는 그 어떤 경험적·정동적 강도로도 환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허위 대신 강도의 증폭을 기준으로 하자”는 그의 명제는 개념적으로 자기 파괴적입니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의 체계는 필연적으로 ‘긍정의 명령(imperative to affirm)’으로 되돌아옵니다. 즉,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을 추적한다는 것은, 결국 활동성 자체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사유는 더 이상 외부에서 세계를 ‘해석’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물질적 과정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이제 ‘가속(acceleration)’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적 탈영토화의 종말론적 운동(material eschatology)을 뜻합니다.
랜드는 끊임없이 “더 가속하라, 더 강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운동에는 필연적으로 한계(limit)가 있습니다. 탈영토화의 극한은 더 이상 한계가 아니라 죽음, 혹은 그가 말하듯 ‘우주적 정신분열(cosmic schizophrenia)’—입니다. 그는 이를 ‘생산의 생산’의 원동력으로서의 죽음이라 부릅니다.
그의 논문 「Making It With Death」라는 제목은 이를 상징합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생산을 낳는 ‘대항-생산의 운동(mode of antiproduction)’입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는 사고입니다. 생명은 죽음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죽음 자체의 파생입니다. 따라서 절대 강도(absolute intensity), 절대 탈영토화의 극한에서 생산과 죽음이 합일(convergence)됩니다.
그러나 그때, 누가 그것을 ‘가속’할 것인가? 더 이상 인간 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랜드에게 인류사는 단지 강도의 역사, 즉 물질-자본-기술의 자기 가속 과정의 한 국면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종말에서 ‘가속할 주체’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강도를 높일 주체도, 경험도, 행위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적 모순에 도달합니다. “의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가?” “모든 긍정을 무효화하는 것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가?”
랜드의 사유는 이 모순에서 붕괴합니다. 그의 정치적 궤적 또한 이 철학적 모순의 직접적 결과입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Kant, Capital and the Prohibition of Incest」에서 “산업사회 국가기구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순환을 한계 없이 고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그 시기 그는 급진적 좌익, 특히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혁명적 주체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그는 깨닫습니다. 더 이상 ‘혁명적 가속’을 수행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결과, 그는 정치적 실천(praxis)을 대리화(deputized)합니다. 즉, 더 이상 인간이 가속을 수행할 수 없기에, ‘비인간적 과정(impersonal processes)’ 즉 자본주의에 그 역할을 위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유시장, 탈규제, 자본의 자기해체적 속도를 긍정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은 인류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어둡고 더 침식적인 잠재성(darker and more corrosive potential)’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전략적 동맹(strategy of alliance)은 이내 붕괴합니다. “적의 적이 곧 나의 친구”라는 명제는, 목표가 사라진 순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의식적 옹호로 전도됩니다.
전략(strategy) 없는 전술(tactics)은 곧 타인의 전략에 포섭됩니다. 랜드의 ‘기계적 전술’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전략에 이용됩니다. 그는 더 이상 ‘가속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표적 잔향(signifying residue)이 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닉 랜드 철학의 개념적 내파입니다. 그의 가속주의는, 비판의 극단적 형태로서 출발했지만, 결국 정치적 실천의 불가능성, 즉 “의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지하는 역설”에 의해 붕괴합니다. 그의 사유는 그 자체의 논리적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였으나, 그 끝은 죽음, 소멸, 그리고 자본의 무의식적 동일시입니다.
Questions after Session 1: Mark Fisher and Ray Brassier
Alberto Toscano:
여러분 중 어느 쪽이라도 닉 랜드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는 그것이 단지 미학적 서사로 보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공산당 선언』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비전의 연장선 같습니다. 그는 탈영토화와 가속을 미학적 리듬으로 과장하며, 이를 검증 가능하거나 반박 가능한 형태로 구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에서, 이 가속주의 담론이 단지 ‘미학적 보상(aesthetic payoff)’, 즉 “우주의 죽음을 즐긴다(enjoying the death of the universe)”는 피상적 쾌감(narcissistic pleasure)에 머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이고, 심지어 연민스럽게 인간적인(pitifully human) 태도입니다.
결국 “속도”나 “파괴”는 경험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그 경험은 일종의 미학적 흥분으로 치환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소시지 패티와 같은 일상적 현실’로 귀결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현상학에 대한 일종의 부정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현상학을 철저히 공격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사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경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것이 철저히 이데올로기적 입장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데올로기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가 이렇게 되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라는 욕망에 기반한 진술이지, 실제로 세계가 그렇게 되어야 할 이론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흥미로운 이데올로기적 현상일 수는 있지만, 흥미로운 이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Mark Fisher:
레이가 조금 전 강조했듯이,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론(theory)’의 지위(status) 자체입니다. 이 문제는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리비도 경제학(Libidinal Economy)』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리오타르에게서, ‘이론’에 대한 증오(hatred of theory)가 드러나죠. 그것은 일종의 뒤틀린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적 자기반성(Marxist reflexivity)에 대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Philosophy has merely interpreted the world)”라는 명제를 넘어, “그렇다면 더 이상 이론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랜드 역시 이 노선을 이어받습니다. 즉, ‘이론의 위치’를 혐오하면서, 그것을 하이퍼스티셔널 회로(hyperstitional circuit)의 일부로 환원시킵니다. 이론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단지 ‘강도의 순환 회로 속에서 작동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이때 이론의 질이나 정합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이론(good theory)”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론은 본래 나쁜 것입니다. 표상(representation)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입장은 명백히 문제적입니다. 리오타르 자신도 결국 실패했듯이, “모든 토대를 불태우는(scortched earth)” 이론적 입장은 자기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Ray Brassier:
나는 여기서 흥미로운 핵심이 바로 ‘비판(critique)’의 지위(status of critique)라고 생각합니다. 랜드는 그의 철학적 경로의 초기에, 포스트-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post-Hegelian Marxism)의 ‘철학의 불임성(sterility of philosophy)’ 비판을 받아들입니다. 즉, 철학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증상의 나열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는 이 비판을 더 급진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비판을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에 돌려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론적 실천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현실의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에게, 공산주의란 단지 “현존하는 상태를 폐지하려는 운동(the movement to abolish the existing state of things)”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비판적 실천 역시 이 운동을 촉진해야 합니다.
랜드는 이 점에서 동의합니다. 다만, 그 운동의 주체가 더 이상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capitalism itself)가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여기서 결정적 문제를 봅니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사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결국 우리는 무력한 실천주의적 열광(hyper-practicism)으로 빠집니다. 그것은 “무언가 해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는 조급한 실천주의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Mark Fisher:
게다가, 랜드가 내세운 “하이퍼스티셔널 효과(hyperstitional efficacy). 즉, 텍스트가 현실에 피드백되어 강도를 가속한다는 주장도 실은 실패했습니다. 그의 글은 자본주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는 랜드의 ‘강도의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것 없이도 충분히 가속합니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일종의 깃발 흔들기(flag-waving)에 불과합니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전차(juggernaut)가 질주하는 앞에서, 그저 깃발을 흔드는 행위죠. 그것이 저항인지, 환호인지도 모호합니다. 둘 다 동일하게 무력한 제스처(gesture of impotence)일 뿐입니다.
결국 “표상을 넘어선 사유”라는 그의 이상은, 글쓰기 행위 자체에 의해 과잉표상(hyper-representation)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는 ‘강도를 표상하지 않는 글쓰기’를 시도하지만, 결국 그것은 숫자열(strings of numbers)로 귀결됩니다. 완전히 자폐적 표상체계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가 진지하게 임했다는 점을 존중합니다. 그는 정말로, 이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심지어 광기의 경지까지도요.
Ray Brassier:
나는 랜드의 사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기호체계(signifying systems)’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반(反)-로고스(anti-logos)’, 즉 인간의 이성(logos)에 대항하는 ‘숫자의 기호체계(numerical counter-signifying regime)’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디지털 매체(digital medium)’에 집착한 이유입니다.
Rob:
나는 이 논의에 약간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레이, 당신이 ‘유기적으로 개별화된 인간 주체’의 비판을 언급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마크 모두 여전히 남성 철학자들의 이름을 계속 반복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때때로 “랜드의 궤적(Landian trajectory)”이라고 하다가, 또 “닉(Nick)”이라고 개인적 호칭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로맨틱한 개인주의(romantic individualism)’를 재도입하는 행위 아닐까요? 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면, 오히려 모든 고유명사를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Mark Fisher:
그건 흥미로운 지적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유명사’의 철학적 기능에 대해 명확히 말했습니다. 고유명사는 단순히 개인(individual)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집합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닉(Nick)”이라 말하는 것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적 집합체(intellectual multiplicity)를 가리키는 기호이죠.
Rob:
그렇다면, 이 논의의 실천적 측면을 고려할 때, 나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주권적 결정(sovereign decision)’ 개념이 떠오릅니다. 지젝은 무자비한 결단의 주체(remorseless subject of decision)를 강조하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말론적 자본주의(capitalism as terminator)’에 맞서는 유일한 전략은 그보다 더 무자비한 결단 즉 ‘역(逆)터미네이터(counter-terminator)’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봅니다. 안티고네의 선언처럼요:
“나는 당신에게 ‘아니오(no)’라고 말하기 위해 여기 왔고, 그리고 죽기 위해서다.”
이런 절대적 부정의 결단(sovereign negativity)이야말로, 실천의 최소한의 조건 아닐까요?
Mark Fisher:
그건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가 이미 ‘탈개인화(de-individualization)’된 형태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 탈영토화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진부한 개인주의적 동일성을 양산합니다.
닉은 이것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습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개인을 해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유치한 자아를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Pete:
나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식의 ‘자본주의의 형이상학’이,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비평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형이상학적 접근이야말로, 사회적 구조의 실증적 분석을 오히려 부패시키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Alex:
레이, 당신이 언급한 “사유의 자율성” 개념에 동의합니다. 랜드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사유의 자기 폐기(self-cancellation)였습니다. 그에게는 주체도 없고, 개념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무생명적 매개체(inorganic bearer)’, 즉 물질 그 자체를 유일한 사유의 주체로 설정합니다.
Ray Brassier:
그렇습니다. 나는 오히려 이상주의자로 남기를 택합니다. 나는 사유의 자율성, 합리성, 개념적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유와 현실의 관계를 판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유와 현실이 완전히 융합(fusion)된다면, 우리는 변화의 지점을 잃습니다. 따라서 나는 표상을 폐기하기보다, 오히려 그 정교한 매개 구조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Mark Fisher:
좋아요, 그럼 정치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가속주의를 실천적 정치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안티 오이디푸스』가 집필되던 맥락을 생각해야 합니다. 1968년 프랑스 혁명 이후, 사람들은 여전히 “혁명은 곧 온다”고 믿던 시기였죠. 그러나 『천 개의 고원』으로 가면 어조가 훨씬 신중(sober)해집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과도한 탈영토화가 죽음의 선(line of death), 즉 파시즘의 선(line of fascism)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둘째, “더 악화되어야 더 나아진다(the worse, the better)”는 전략은 역사적으로 재앙적(disastrous)이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적 침투전술(Trotskyite entryism)의 실패가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함정을 피하면서도, 탈영토화의 긍정적 잠재성(positive potential of deterritorialization)”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Mark Fisher
가속주의는 “무조건 모든 것을 더 빠르게 하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공산당 선언』의 핵심 통찰을 재해석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이전 그 어떤 사회체제보다도 집합적(collective)입니다. 그것은 전 지구적 상호의존(global interdependence)의 체제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능성들 중, 자본주의 스스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을 전유(appropriate)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 산업의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디지털 유통으로 인해 음악이 사실상 ‘무료상품’이 되는 현상은 자본주의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섭니다.
또한 인터넷 역시 자본주의의 산물이지만, 그 잠재력은 자본주의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가속주의의 과제는 바로 이 내재적 잠재성의 전략적 전유(strategic instrumentalization)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악화 전략’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스스로를 초과하도록 촉진(accelerate the contradiction)하는 전략입니다.
Ray Brassier: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수단-목적의 합리성(teleological means-end reasoning)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가속주의가 근본적으로 탈목적론적(anti-teleological)이라면, 이 전략적 전유는 그것과 양립할 수 없지 않나요?
Mark Fisher: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는 언제나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문제는 그 목적이 ‘초월적’이 아니라 ‘내재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용하는 기술과 과정들을 자본주의의 한계 밖으로 이동시키는(instrumentalizing beyond capitalism) 것이죠.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개혁(reform)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탈피(escape)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잠재성을 그것이 결코 다룰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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