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디오니소스적 퓨쳐리즘(Dionysian Futurism)

 

*본문은 2025년 BEEP FEST에 전시되었음. (아래 참조)

BEEP3: 📂≪Mutable Library≫
BEEP3는 텍스트, 라이브 시리즈, 파티를 통해 2020년 이후 국내 전자음악의 흐름과 양상 및 흥미로운 지점을 탐구, 이를 묶어내려는 시도입니다.
그 첫장을 여는 전시 ≪Mutable Library≫는, 리딩 룸의 형태를 빌려 전자음악을 둘러싼 사유들을 수집하고 목록화합니다.
전시 공간에서는 8편의 투고문과 2편의 번역문, 50여 권의 국내·외 전자음악 관련 도서들을 편히 앉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 기간 Date and Time
2025.5.13(화) ~ 2025.5.18(일) 11:00~19:00 / *5.17(토) 단축운영 - 14:00~16:00

 

디오니소스적 퓨쳐리즘(Dionysian Futurism)

 

윤태균

***

 2024, 독일은 테크노를 국가무형문화유산에 추가했다. 테크노는 오랜 세월과 여러 장소를 거치며 스스로의 기호를 갱신해왔다. 테크노가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는 씬(scene)에 얽힌 무수한 행위자들에 의해 양식화되어왔다. 당대 역사 쓰기의 당사자로서 디제이, 프로듀서, 클럽, 레이버(raver), 레이블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문화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거대한 문명 기계의 문화 논리에 안착시키고, 그 토대와 긍정적인역할을 주장할 수 있게 되면서 테크노는 역사화된다. 국가가 수여한 무형문화유산이라는 칭호는 수십 년간 진행되어온 역사화를 마무리짓는, 그리고 기념하는 선언이었다.

 테크노와 클럽이 박물관에 들어갈 자격이 생겼기에, 베를린의 클럽 씬이 저물어 감을 보여주는 여러 수치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테크노의 가장 찬란했던 그 장면(scene)은 이제 노스텔지어의 대상이 된다. 2025년 베를린 클럽 250개 중 절반 이상이 폐쇄 혹은 폐쇄 위기에 처해 있다.[1] 지속적인 임대료 상승은 클럽을 과거로 내몬다. 클럽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족관, 아파트, 고속도로가 들어선다. 클럽은 가장 현대적인 것들, 선진적인 것들에 자리를 내어준다. 본래 테크노가 가진 힘은 그 위험함에 있었다. 낮은 프리퀀시(frequency)와 반복적인 킥이 촉진하는 몸의 울림, 그리고 LSD와 알콜이 제공하는 번쩍이는 환각이 테크노가 가지는 역진적 힘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어두컴컴한 지하의 환경이 내외부로 안전해진 순간부터 테크노는 오늘날 나열된 수많은 문화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다. 드럼 머신의 사용 이후 가장 펑키(punky)했던 테크노는, 이제 펑크(Punk)와 함께 동시대적 선진 문화의 뒤안이 되었다. 펑크와 테크노 모두 효율적으로 잘 설계된, “자본주의적 행정이 문화 시스템에 미리 마련해 둔자리에 안착했다. 테크노는 훨씬 안전해졌다.

그러나 아직 잔재한 클럽 안에서 레이브는 화려하게 상연된다. 여전히 클럽에 모이는 이들은 어떤 환상을 보려 하는가?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 미래인가, 과거에서 귀환하는 기이한 공동체성의 귀환인가? 크고 무거운 우퍼(woofer)로부터 발생하는 저음은 춤추는 이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어쩌면, 추측컨대 과거를 향하는 노스텔지어와 끔찍한 미래를 향하는 불안이 뒤섞인, 현재의 시간선에서 탈주한 어떤 허구적 환상을 제공할 수도 있다.

 

***

 좌파적 노스텔지어는 우리가 여전히 ()문화를 만들어내고, 저항적일 수 있다는 그 희망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노스텔지어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리버럴한 기치 아래 (물리적으로) 모일 수 있었던 그 과거는, 이제 영원화하는 병리적 노스텔지어의 환상이 된다. 노스텔지어가 소비 가능한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2] 클럽과 레이빙은 반항적인 젊은 청년들에게 소비와 탕진의 장을 제공하며, 해소된 저항의 에너지는 자연적 문화 산업의 엔트로피로 분해된다. 자신이 ()문화적이라는 방종의 환상은 무기력하고 반항적인 청년의 죄책감을 덜어 줌으로써 선진적 문화 산업의 건실한 소비자로 만든다. 클럽과 레이빙은 그 자체로, 단위체로서 저항적이지만 빈틈 없는 거대한 문화 산업에서는 그 유지를 돕는 필수적 기관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 준거 체계에서 클럽에게 주어진 기능은 다음과 같다.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저항적 욕망을 분해하며, 그 분열증적(schizophreniac) 잠재성은 부동산 시장에 의해 통제되기. 텔레오노미(teleonomy)[3]

 그럼에도 여러 클럽이 사라지고, 남아있는 클럽에도 방문하는 이들의 수는 줄고 있다.[4] 내가 굳이 통계가 포함된 각주를 달지 않아도 오랫동안 클럽을 찾은 이들은 체감할 것이다. 그러나 클럽의 쇠퇴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판의 사실, 재생 장치와 알고리즘의 생명정치적(biopolitics) 통제, 우파적 이데올로기의 매혹적 브랜딩(branding).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기능적 음모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클럽을 병리적 나르시시즘의 영역으로 몰아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펜데믹(pandemic)에 덮어씌워진 음모론적 혐의는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에 의해 발명되었고, 백신이 피접종자들을 통제한다는 그런 숱한 음모론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펜데믹이 자본주의 생명정치의 시스템적 보완-갱신에 있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 물리적 고립의 상황이 일궈낸 원격 통신 기술의 발전, 인터넷 이용으로 인해 생성된 수많은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원료로 삼는 개인 맞춤 알고리즘의 정교화는 우리가 이 시스템에서 생존하는 데에는 물리적 접촉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증명했다. 뉴런과 시냅스를 교란하는 알고리즘의 환각(hallucination), LSD보다 정교하며 클럽의 우퍼보다 강렬하다. 또한 클럽의 주요한 방문층이 되어야 할 20대는 LSD와 실로시빈, 난교와 레이브보다 더 건강한놀이를 선호한다. 디제이가 조종하는 댄스플로어는 알고리즘과 개인화된 청취 테크닉이 조종하는 가상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2023년 중국 광둥 지방 투어에서 목격한 장면은 다소 기이했다. 클럽 안에 발을 디딜 수 없을정도로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춤을 추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파티 와중 짧은 간격으로 중국 공안처럼 보이는 이가 현장을 여러 번 살펴보고 갔다. 파티가 끝난 뒤 내 음악에 춤을 추었던 이들은 내게 중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언더그라운드이벤트를 열정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의외로 다수의 퀴어-프렌들리 이벤트와 난해한 실험음악 공연이 많았다. 물론 이들도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허용된이벤트였다. 센젠(ShenZhen)의 고도화된 제조업은 2008년 이후 폭발적인 인구 성장과 소득 상승을 이루어 냈는데, 사람들은 이제 그 생산된 에너지를 소진할 기계가 필요했다. 그들이 내게 권했던 서로 다른 종류의 무수한 전자 담배와 클럽에서의 급진적 이벤트가 그 기계였다. 유럽에서 직수입된 언더그라운드는 효과적인 소진 기계였다. 마오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미래상-시노퓨쳐리즘(Sinofuturism)-을 제시했고, 이제 클럽과 레이브라는 조작된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 시노퓨쳐리즘적 풍경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높게 솟은 마천루 아래에는 반드시 리비도의 배출 구역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구조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

자유롭게만 느껴지는 레이빙은 당연하게도 다수의 모더니티(modernity)라는 견고한 정치경제적 토대 위에 서있다. 개별 로컬 씬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아시아는 유럽과 영미의 씬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물론 클럽과 전자 음악은 당대 서구의 정치경제적 환경과 맞물려 탄생했다.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레이브 문화는 한국의 도심에 비교적 늦게 도달했다. 발원지에서는 군집(swarm)처럼 발생했던 자생적 문화는,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미 견고해진 문화를 비집고 들어가 버텨야 하는 침입자였다. 그러나 분명 이 빠르고 반복적인 전자음이 촉진하는 세포 단위의 정동(affect)와 다수가 모여 은밀히 춤출 수 있는 장소성은 한국의 레이버들과 강하게 공명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그 이후이다.

 펜데믹으로 인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거의 모든 클럽은 운영을 중단했고, 당연히 유럽의 디제이들은 한국에 내한 공연을 오지 못했다. 그 동안 원류 유럽 디제이의 강력한 티켓파워에 기대던 다수의 파티가 사라지고, 씬은 오직 한정된 클럽 운영 방식과 로컬 아티스트의 참여로만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그 시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 보니 살아남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새로운 클럽과 디제이가 빈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돌아온 유럽 디제이는 여전히 얼마 안되는 레이버들을 끌여들였고, 클럽은 생존(과 경쟁)을 위해 서구의 디제이를 매 주 새롭게 수입해 왔다. 이 지점에서는 당연하게도 포스트식민주의적(Post-Colonialism) 맥락이 작동한다. 서구와 다른 지역성(locality)과 도시 구조는 그에 맞는 기획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매 주 클럽에서는 관성적인 내한 공연이 이루어지고 서울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레이버들은 항상 같은 이름으로 게스트 리스트를 채운다. 기존 한국 로컬 씬의 유일한 브랜드는 극동(far east)’이라는, 서구에 매력적인 개척지라는 상표이다. 큐레이터 오쿠위 엔위저(Okuwi Enwizo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사’라는 서구 학문제도의 특정 학문 분과가 모든 예술적 사안에 대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적 시선(bird’s-eye view)’, 또는 파놉티콘적 시선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은, 해당 담론장이 주체적 판단(subjective judgment)을 은밀히 수용하고 그것을 전유한 뒤, 마침내 모든 예술 생산에 대한 ‘주권적 판단’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략)… 서구의 위대한 전통이라는 ‘주권적 시선’에 포섭되어야 할 ‘불신자들(non-believers)’ 사이에서 ‘총독(viceroy)’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5]

 

하지만 근 몇년간 기존과는 다른 상황을 보았다. 한국에 클럽 문화가 뒤늦게 등장한 만큼 비교적 늦게 해당 문화를 접하고 뛰어든 이전 세대는 여전히 자신들에게 체화된 주권적 시선으로 본다. 로컬 아티스트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며 유럽의 클럽과 음악 형식을 빼닮은 이질적 공간은 로컬 디제이보다 내한 디제이를 더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련해 둔 나지막한 제도와 공간에서 초기 경력-20-을 시작한 새로운 디제이/프로듀서들은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은 지대를 창출해내기 시작했다. (비록 나의 전문성은 미술계로부터 위탁받았지만) 큐레이터로서 나에게 기존의 물적인 토대를 어떤 방식으로든 전용(derive)하는 음악적 실천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과정이다.

 

***

비관적이게도 여전히 클럽이라는 장소와 레이브라는 의식이 아직도 혁명적 정치성을 고양할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이 문화에 애정을 가지는 자들에 의해 실험되어야 한다. ‘이제는 레이버보다 디제이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기형적인 네트워크는 앞선 비관을 강화한다. 이제는 오직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사이버고딕(Cybergothic)이 될 것인지, 사이버펑크(Cyberpunk)가 될 것인지. 양자 모두 현상, 태도, 형식,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 없이 기괴하게 결합한 하이퍼스티션(hyperstition)이다.[6] 사이버고딕은 자본, 테크놀로지, 시장의 상호 피드백에 의해 끊임없이 폭주하는 과정의 형식이다. 다만 이 때 발생하는 (금융 자본과 공산품, 그리고 리비도의) 막대한 과잉과 소진은 인류에게 트라우마를 겪게 하는데, 재편된 세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영원-죽음이라는 이율배반적 혼합 기호를 제공한다.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고딕의 사유 논리는 앞선 형이상학적 물자체의 차원으로 지성을 인도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영원성을 보장하는 보험 상품과 핀테크(Fintech)로 드러난다. 자본주의적 시간을 벗어나려는 탈주의 움직임은 경찰이라는 공포의 도상으로 차단되고 사회적 통제 체제는 원시주의적 자연성으로 강화된다. 사이버고딕은 이렇게 고대로부터 귀환한 이성(reason)이 근미래 물질적 형식과 뒤섞여 탄생한다. “죽음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의 종결이 아니라, 수렴을 유도하는 효율적 가상 대상(efficient virtual object)이다. 그곳엔누구도 없다(no one there).”[7] 사이버고딕의 세계관에서는 중세의 어두운 가부장제와 봉건제가 재등장한다. 사실 우리 주변엔 이미 사이버고딕적 형식이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예를 들었듯 ISIS의 공개 처형 스트리밍은 이미 조립되고 있는 사이버고딕의 대표적인 브랜드이며 MAGA(Make Great America Again), Incel(Involuntary celibrate), 12.4 비상 계엄 또한 그러하다. 남성주의적, 인종주의적, 봉건주의적 이성이 테크놀로지를 점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더그라운드 클럽 씬은 자칫 중산층 보헤미안 힙스터 무리의 방종이라는 영역을 할당받을 수도 있다.

 사이버고딕이 현재로부터 뻗어가는 자연적 미래를 수용하여 양성적으로 폭주한 회로으의 형식인 반면 사이버펑크는 앞선 자연적미래를 위협하며 폭주하는 벡터를 회전시키는 행렬(matrix)의 형식이다. 시간선으로의 역동적 개입은 과감한 실험과 이데올로기적 선동을 필요로 한다. 이는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야기한다. 하지만 사이버고딕이 앤트로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자본주의를 자연 상태로 여기는 부정적 니힐리즘을 가진다면 사이버펑크는 앤트로피의 상승을 촉진하고 낭비한다. 도달불가능한 미래에서, 사이버펑크는 현재를 견인한다. 앤트로피의 급진적 상승은 열역학적 죽음, 즉 세계의 종말을 앞당기지만 우리는 그 필연성을 수용하고 죽음과 고통을 사랑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과 같이, "진리는 결코 내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는 외부에서, 사건의 프런티어에서, 거기에서 고통과 죽음이 발생하는 그 경계선에서 온다." 영원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구이며, 인간임(being human)은 필멸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내가 이 글에서 비관적이고 종말론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사르캐스트(sarcast)를 자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단언한 미래로의 벡터를 회전시키려면 내가 사랑하는 음악과 씬이 위치한 한 페이즈의 종말까지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화되는 전자음악의 형식에서 강력한 분열증적 가능성을 추출하여 탈주시켜야 한다. 형식의 프론티어를 보아야 한다. 사이버고딕의 권력은 언데드(undead)이고 사이버펑크의 권력은 유령(spectre)이다.

“우리의 존재가 신성한 계획이나 높은 목적, 영적 계몽이나 사회적 권력의 실현을 향해 있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은 우리의 삶이 완전히 우연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완전히 고립시킨다. 결국, 우리의 삶만이 아니라 태양, 하늘의 모든 별들, 나아가 우주 전체가 결국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미래는 거짓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썩어가는 우주 앞에서 가부장적 인간-신은 그의 썩어가고 기괴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계층과 위대함이라는 환영을 세우고, 절박하게 그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우주의 해체와 죽음이라는 과정에 대한 사랑을 대안으로 제안하며, 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은 자신을 무한히 생성하며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치듯 떨어지는 과정이다. 우리는 초신성처럼 타오르는 몸으로 사랑하며, 빛나고 무의미한 채로 사랑하며, 우리의 숨결 하나하나로 우리를 어두운 소용돌이로 감싸는 굶주린 야수를 먹인다.”[8]

 

물론 그 근원적이고 전통적인 저항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새로운 형식적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이라는 용어로 전통적 클럽의 다음 단계를 예고한다.[9] 감각적 형식은 항상 혁명성을 잠재하고 있으며 이를 정향하는 일은 작업자들에게 맡겨진다. 테크노는 도래할 것에 관한 폭발이었지만, 도래한 것에 관한 향수가 되었다. 정글은 입자가속기의 역할을 했지만(CCRU), 가속으로 인해 생성된 데이터는 선진자본주의 문화 산업 플랫폼의 원료가 되었다. 문화 산업의 원료로 환원되려는 형식을 가로채 종말을 기원하는 의식의 제물로 사용해야 한다. 리비도와 그 형식의 좌파적 탕진은 앤트로피의 효율적 관리보다는 열역학적 죽음으로의 질주를 선호한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음악은 강력한 내파로 폐쇄된 시공간을 부수고 우리의 춤추는 몸을 전뇌화하여 미래적 알고리즘 사이로 배웅한다.

 

***

 집단적 제의와 축제가 정치성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매혹적인 사이버고딕 브랜드가 형식을 자극적으로 갱신할 동안, 펑크는 얼만큼 갱신되었는가? 언더그라운드는 여전히 과거의 형식을 답보하며 머무르지는 않는가? 기성 좌파가 광장이라는 신성한 제단에서 전통을 행하고, 이는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오래된 좌파는 원시적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인간중심적 공동체주의와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집착한다. 그러나 얼마전, 서울에서 목격한 일련의 광장에서 나는 새로운 집단적 조직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시위는 기존의 좌파적 이상주의와는 상이한 사이버고딕 혹은 사이버펑크 형식을 내재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우파 또한 이 전략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실험적 정치 형식들의 물결은, 사람들이 다시금 집단적 의식과 집합의 힘을 발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실험적 정치 형식들의 물결은, 사람들이 다시금 집단적 의식과 집합의 힘을 발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집단들의 점점 커지는 외침은, 자본이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근대성의 복귀를 예고하고 있다. 새로운 소속의 형식들이 발견되고 발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스팀펑크 자본이든 사이버고딕 ISIS든 간에, 양자 모두 미래에의 조립이 이미 시작된 현재에 있어서 장애물이자 고대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10]

 

광장은 혁명을 위해 필수적인가? 광장은 거대한 울림통이며 소리와 접촉으로 집단을 생명정치적으로 동기화한다. 우리에게 소리의 울림통으로서 광장이다시유효하다면, 새로운 지적, 물적 토대로 주조된 형식의 광장이 필요하다. 물론 이 새로운 광장은 사전에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조립된다. 끊임없이 투입되는 순도 높은 자본주의적 리비도를 분해하여 앤트로피화하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다. 대중의 열린 정신이 가능케 하는 이질적인 것들의 몽타주는 자본의 전례 없는 속도와 결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광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다시 춤출 수 있을까?

 


[1] Jen Rose Smith, “Is Berlin's Famous Club Scene Ending?,” BBC Travel, January 13, 2025, https://www.bbc.com/travel/article/20250113-is-berlins-famous-club-scene-ending.

[2] 그래프톤 테너, 『포에버리즘』, 김괜저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3, p. 18.

[3] 텔레오노미(teleonomy)는 생물학에서 어떤 구조나 행동이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화적 과정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 생물의 형태나 기능이 마치 특정 목적을 향해 설계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결과일 뿐이며, 외재적 목적이나 의도를 전제하지 않는다.

[4] Jen Rose Smith, 앞의 기사.

[5] Okwui Enwezor, "The Postcolonial Constellation: Contemporary Art in a State of Permanent Transition," in Antinomies of Art and Culture: Modernity, Postmodernity, Contemporaneity, ed. Okwui Enwezor, Nancy Condee, and Terry Smith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8), p. 223.

[6] 하이퍼스티션은 자신을 현실로 만드는 허구(self-fulfilling fiction)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어나 이야기들이 문화나 기술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과정을 가리킨다. 간단히 말해, 미래를 앞당겨 현실화하는 서사적 힘이다.

[7] Nick Land, "Cybergothic," in Fanged Noumena: Collected Writings 1987–2007, ed. Robin Mackay and Ray Brassier (Falmouth: Urbanomic/Sequence Press, 2011), p. 464.

[8] Gruppo di Nun, “A Manifesto for Revolutionary Demonology,” NERO Editions, January 17, 2019, https://www.neroeditions.com/a-manifesto-for-revolutionary-demonology/.

[9] Simon Reynolds, "The Rise of Conceptronica," Pitchfork, October 10, 2019,

[10] Mark Fisher, “Cybergothic vs. Steampunk: Response to Badiou,” Urbanomic, 2016, https://www.urbanomic.com/document/cybergothic-vs-steampunk-response-to-badiou/.​:contentReference[oaicite:0]{index=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