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세마 코랄(SeMA Coral)에 게재되었다. (아래 링크 참조)
http://semacoral.org/cabinet/2024coral-critic-study-taegyunyoon
코리움(Corium)과 신시사이저: 무기적 중추신경과 유기적 암석의 합성
윤태균
코리움
현실은 무수한 기호의 다이어그램으로 작동한다. 이 기호계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의 추상적 다이어그램을 일컫는다. 칸트적 이성의 설명에 기생하는 모든 관측된 구조들—디지털 금융 플랫폼, 변증법, 반도체 수출, 금리 인하, 노동과 생산, 전기차 설계, 세로토닌 재흡수, 법, 프로파일링, 미술사, 온갖 상징—과 우연한 심연들—양자적 미시 세계, 총기 난사, 집단 자살, 폭탄 테러, 자본주의의 에너지 흡수, 살인,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과 실로시빈(psilocybin), 죽음, 신, 온갖 의미의 틈—은 모두 이 다이어그램에서 유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지탱하는 나의 언어적 서술까지, 이성과 비이성, 의미와 의미 없음은 서로 자국을 남기고 뒤얽히며 삶의 사건을 중층결정(overdetermine)한다. 이 다이어 그램의 묶음은 이전 학자들의 어떤 기준에 의해 ‘의미적으로’ 분할된다. 브르통(André Breton)의 초현실 주의와 자동기술(Automatism) 또한 이 분할 기준을 착실히 지키며 전개되었는데, 그로 인해 탄생한 역사 적이고 일차적인 구분이 의식/무의식이다. 이러한 ‘분열된 주체’라는 개체의 탄생은 근대의 거대한 발명 이다. 이때의 무의식은 진행 중이었던 모더니즘을 ‘변증법적’으로 반대하기 위한 기능적 영역이었다. “근대적 기획은 근대적 의지와 그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1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저급유물론(Base Materialism)은 그 이론 내에서는 변증법을 반대 하지만 실천 자체는 모더니즘에 변증법적이었다. 유물론에 대한 적실한 비판이지만, 의식/무의식의 역할 모델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은 거부했지만) 사물의 ‘추락’이라는 역학적 용어는 그의 서술 내에서 이 두 영역을 수직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그 모델에서 의미와 이성 그리고 형식은 최상층에 위치하고, 무의식과 비정형(informe)은 밑바닥 심연에 위치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의미적 위계는 여전히 견고하지만, 저급유물론이 지향하는 실천을 가능케 하는 사변적 개념으로서 ‘비정형’은 우리가 감각하고 탐구하는 형식(form)과 이미지에 관한 뒤늦은 비판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비-계급화(de-classifying)”를 추구하고 “존재론적인 역할 모델(devoir être)”을 해방하고자 한다.2 이때 (비)정형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물질이 사물이 되기 전 단계에 머물기를 고집함으로써 좌절된다. 인용컨대 “은유, 형상, 주제, 형태학, 의미” 따위에 머물지 않고 “형태의 특정 힘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닮은 것에서 닮지 않은 것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상태이다.3 비정형은 의미와 이성으로 도달하기 전 심연으로 도주함으로써 사물이 아닌 물질로 남고자 한다. 혹은 의미를 부수고 이전의 상태로 되돌린다.
(무)의식의 이 수직적 구성은 당대 모더니즘-자본주의의 주체성을 구성했다. 이후, 후기자본주의와 그 문화 논리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성을 통과하여 도달한 오늘날의 (무)의식의 구성은 어떻게 재구성 (혹은 재전유)되었는가? 그리고 그 작동 원리로서 최종 심급인 금융 자본주의는 어떻게 (무)의식의 다른 심급에 균열을 내고 자국을 남기는가?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무)의식 탑의 작동 및 구성 원리는 무엇인가? 물적 토대의 한 심급으로서 디지털-금융-자본주의는 어떤 징후, 현상의 표상 방식의 규칙이다. “의식의 체제”인 이데올로기는 “표상의 체제”이기도 하다.4 정치적 무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상상 안에 머무르지 않고 물질적인 생산의 층위까지 도달하여 형식화된다. 그러나 때때로, 이 형상은 의미와 논리의 확정적 생산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어지는 층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녹여 내며 전 진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노심(nuclear reactor core)의 임계점 돌파는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며 전진하는 물질 자체에 녹이는 힘을 부여한다. 자본주의는 고장의 순간마다 교체가 아닌 수리가 되었고, 그 노심의 임계는 한계를 넘었다. 케인스주의라는 바셀린. 냉각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의 심급까지 자신이 흐르는 경로의 층위를 모두 녹이며, 그것이 형식을 가진 채 우리 앞에 도래했을 때 우리는 그 기원과 화학적 속 성이 무엇인지 구조화할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세계 내 온갖 물질의 융해물이다. 이 코리움 (corium)은 오늘날의 비정형이다. 비정형도 형식이라면 말이다.

오늘날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 빗금은 수정되었다. 액체화된 표층들. 기호의 다이어그램은 각자의 경계 를 범람하며 용해되고 액체화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Jacques Lacan) 그리고 충실한 신봉자들에 의해 이제 의식과 무의식은 전치되고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며 그 층위는 재배치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무)의식의 수직적 구성은 거꾸로 뒤집히고 수평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변증법은 이미 코리움 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전복은 이론 혹은 비판의 실천이 아니라 물질 스스로가 추동한 것이다. 모더니즘이 발명한 무의식은 이제 상품화되고 물화되어 주류의 것으로, 상징적 화폐로 유통된다. 고어(gore) 는 장르가, 아방가르드는 포르노가, 체액은 외피가, 저항은 놀이가, 시체는 풍경이, 균열은 장식이 되었다. 그리고 일탈은 죽음이 되었다. 예술이 가지는 위반적 역할의 부엔트로피(negentropy)는 점차 안정화되어 또 다른 질서가 되었다. 초현실주의와 다다(dada), 고어와 신체이형장애, 오이디푸스와 주이상스 (jouissance)는 어떻게 상품이 되었는가? 타액과 점성, 분변과 뇌척수액은 이제 갤러리와 아트 페어 사이의 반듯한 운하 아래서 흐른다. 바타유의 비정형이 모더니즘의 부정과 타락으로서 무의식을 드러냈다면, 오늘날 비정형은 자본주의의 영토화하는 힘과 양성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 그리고 리비도(libido)의 과잉을 벡터(vector)의 진행 방향으로 삼는다. 무의식과 의식의 전치. 그리고 위반과 면역의 전치. 이제는 자본주의의 은폐된 구조 자체, 즉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과열된 회로가 무의식이 되었다. 과감한 현실을 추동하는 실재, 욕망의 해방으로서 자본주의. 이 징후는 코리움에서 융해된 채로 나타난다.
바타유의 비정형이 “단지 유일무이한 괴물을 생산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물질의 코리움이라는 비정형은 그 목적을 스스로 성취한다. 이제 비정형은 이론적 실천이 아닌 물질의 고유한 결과이자 과정으로 드 러난다. 오늘날의 비정형은 바타유의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과 비평을 비껴 지나간다. 그러나 코리움 또한 형식이 아닌 형식이기에, 그것은 동시대에 새로이 출몰한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뚫고 내려온 모든 층위를 포괄하는 형식으로서 비로소 감각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코리움은 관측되어 고정된 입자의 총합이다. 코리움은 단순한 이분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지나쳐 온 발전소 층과 경로의 과정적 재현이다. 그것은 스스로 빠른 속도로 가속하여 이론과 비평 그리고 합리적 이성에 의해 기획된 사유를 앞선 다. 이 가속을 단속할 수 있는 “경찰”은 “화폐와 시장”이다.5 그러나 경찰이 이와 공모한다면 얼마나 더 빠 른 속도를 얻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꿈의 편린

오늘의 세계는 꿈을 권장한다. 꿈꾸기는 경제적으로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그 생산성은 이미지에서 나 온다. 때로 꿈은 시스템에 의해 현실의 영역으로 전이한다. 이미지의 강렬한 리비도는 사용자를 환각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에 적합하다. 이 중독성 있는 환각은 정제되어 어떤 병리적 증상—번 아웃, 산재, 착취, 무료 노동—의 약으로 판매된다. 한편, 이데올로기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리비도는 언어의 구조를 빌려 형식 을 취한다. 이 리비도 에너지와 형식은 현실의 상징적 체계에서 유통될 때 최적의 교환 가능성을 갖는다. 김채리의 작품 〈Fools ditty 2〉(2023)는 꿈 이미지의 동시대적 용해 과정이다. 꿈 이미지들이 프레임 안에 서 배치될 때 어떤 상호 관계적 논리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언급한 바, 이 과정은 ‘정상적’ 인과와 변증 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무작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액체화된다. 이 “꿈 작업과 말장난 사이”, 혼돈과 언어 사이에서 이미지의 배치 방식은 “여러 꿈 사고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모호한 통사론”에 기반 한다.6 말하자면, 언어에 영향받은 모호한 구조만을 취할 뿐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 우연성에 지배된다. 각 이미지 편린이 서로 겹치고 침범하며 각자의 좌표를 점유할 때 그들은 독해 가능한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Fools ditty 2〉의 각 이미지 조각은 분명 출처가 있는, 상징적 의미의 한가운데서 채취되었다. 비록 그것이 작가의 해마에서 숙성되었다 하더라도 실제 이미지는 카메라에 의해 재현된 분명한 정치적 현장을 지시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BBC, 주간조선, 게티 이미지(Getty Image) 등의 웹에서 수집 된 로스앤젤레스의 노숙인 사진, 일러스트, 에셋 사진.7 이들은 연장, 축소, 반전, 반복, 절단, 합성을 통해 단어의 덩어리를 만든다. 프레임 양측 상단에 위치한 두 천사는 이 유사 문장을 축복하지만, 그것은 구원 받지 못할 운명이다. 영원한 우연성에 갇힌 꿈의 문법은 항상 ‘생성적’이다.
인공 지능 일반—알고리즘—은 꿈과 현실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그들은 몰입과 환각 그리고 각성을 위해 이미지 배치의 우연성을 자신의 보편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 보편적 우연성은 정해진 목적, 예컨대 광고, 콘텐츠 노출, 스폰서링 등에 한해서 생성적일 뿐이다. 규칙 내에서 우연적이고 생성적이라는 특성은, 꿈이 언어 내에서 우연적이고 생성적인 통사론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이유는 그 알고리즘이 환각과 중추신경 침투를 위해 꿈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경 회로는 이미지 알고리즘의 트로이 목 마에 면역 없이 감염된다. 그 경로는 우리의 꿈이다. 컴퓨터의 꿈과 우리의 꿈이 도킹된다. 따라서 김채리의 디지털 콜라주 또한 서로 접속한 신경-알고리즘의 꿈 단면이다. 검색과 수집, 배치는 이 합선된 신경- 알고리즘의 자동화된 처리 과정이다.
이론가에게 꿈 이미지는 독해될 필요가 없다. 유일한 독해는 자동화된 알고리즘으로부터 폭주한 사변에 의해 성취된다. 〈Fools ditty 2〉는 그 재난 풍경의 멜트 다운 상태—현장, 재현적 이미지, 뉴스 보도, 꿈의 배치까지 함께 녹아 내린—의 재현이다. 일종의 코리움인데, 우리는 그 방사능 수치와 융해된 성분을 분석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는 사변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변 또한 꿈이기에, 원한다면 현실로 전이시킬 수 있다. 애초에 이 이미지는 실재이고, 실재는 현실이다. 이미지는 자신이 전사 되는 모니터(혹은 캔버스)에 빙의하여 제도를 뚫고, 미술관을 뚫고 녹여 가며 우리의 각막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꿈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한다면 정치적 수행성을 동반한 채로도 가능하다. 주체성의 보편적 욕 망을 탐색하기. 우연적 사변의 실천성을 격상하기.

회화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통을 붙잡기에, 그 제작 과정은 자동화된 알고리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회화의 매체적 특질, 즉 외부와 분리된 명확한 프레임과 평면성은 디스플레이 모니터와의 합선을 유용하게 한다. 비록 붓과 물감을 사용하지만, 회화의 재현적 특성은 항상 무언가를 재현한다. 구상적 형태만이 재현은 아니다. 유세은의 작품 〈Toe shoes〉는 레이어(layer)와 인터페이스를 재현한다. 회화 면에서는 디지털 레이어의 비연속적 분리가 이루어지며, 물감 덩어리가 뭉쳐 그래픽 에셋 개체로 주조된다. 각 그래픽 에셋의 해상도는 그 출처와 열화 정도에 따라 다르다. 유세은이 다루는 것은 이미지의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위상이다. 항상 무대-프레임 안에서 주요한 도상에 어떤 권위를 부여해 오던 회 화 매체를 사용해, 역으로 이미지에서 의미를 앗아 가거나 사변적 픽션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 행위의 의의는 의미의 합일을 위한 변증법이 아니라 의미의 낭비에 있다. 각 이미지 에셋, 토슈즈, 물방울, 각종 그 래픽 조각, 배경은 조형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놓여 있지만, 이질적인 해상도와 재현 방식을 활용해 몽타주로 인한 의미 형성 이전 단계에 남는다. 출생부터 가지고 있던 의미의 잠재성은 제거된다. 이질적 그래픽 에셋의 묶음에 서사를 부여하는 역할은 오로지 사변에 맡겨진다. 해석을 건너뛰고 이미지 네트워크의 에너지 분배에 그 역할을 위탁한 〈Toe shoes〉는 의미 이전에 이미 수행적이다. 의미를 낭비하는 행위 의 쾌(快).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 네트워크의 덕목이다. 오늘날 이미지의 상징성은 아버지의 기호, 자본주의의 작동 자체는 무의식이다. 이미지를 유통하고 작동시키는 공리로서 자본주의는 이미지의 상징성을 무로 되돌리거나, 상품으로 타락시킨다. 따라서 유세은의 회화는 동시대 이미지 네트워크의 초현실주의적 재현이다.
모니터, 장치
디지털 데이터는 모니터 장치를 거쳐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된다. 시각 신호의 경우 디스플레이 모니터 장치에 의해, 청각 신호의 경우 모니터 스피커에 의해 제공된다. 이미지는 베젤(bezel) 안 패널을 거친 빛 에 의해 감각된다. 이미지를 투영하는 장치는 환경이자 조건으로서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감각 테크 놀로지의 핵심으로서 디스플레이 모니터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공간을 구획한다. 디스플레이 모니터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회절하여 공간을 점차적으로 뒤덮고, 그 프레임과 베젤은 데이터의 감각적 누출을 제한한다. 디스플레이 모니터 패널이 스크린(screen)이라면, 무엇을 파열하고 무엇을 매개하고 또 무엇을 은폐하는가? 파열은 테크놀로지와 자본 사이의 분열증적 지점에서 발생하고, 매개는 광학 테크놀 로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은폐는 곤경의 지점에서 발생한다. 테크놀로지와 자본: 디스플레이 모니터의 사양과 생산 기업의 주가. 광학 테크놀로지와 이미지: 광학 테크놀로지의 전개는 그것이 전 사하는 이미지의 욕망에 의해 인도되고, 이미지 데이터는 아날로그로의 전이를 위해 광학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한다. 이미지는 가상이 아니다. 라캉의 부정적 유물론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은 실재와 현실의 매개가 아니라 실재와 실재의 매개이다. “실재적인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점점 더 인공적인 것이 될 뿐이다.”8 이미지는 인공적인 물질적 실재이다. 실재는 증폭하는 자본주의의 영토화하는 힘에 의해 재 편되었다. 외부는 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의 내부만이 존재한다. 현실의 실재 점령은 자연변증법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리비도적 배치에 의해 비로소 달성되었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절대적이고 이성적인 성취로서. 디스플레이 장치를 마주할 때의 (철학적) 곤경의 지점: “어떠한 경험의 지표도 최종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남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 집의 상실, 땅의 상실 (…) 보편적인 것이 사소한 집단성을 형성할 수 있는 공통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불가역성, 개방성이란 저렴한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개방성에 대한 외부성.”9 디스플레이 모니터의 하드웨어가 납작하게 업그레이드될수록, 테크놀로지의 표상 면적은 좁아진다. 백남준의 유토피아는 IT(Information Technology)와 제조업의 결합으로 정치적 유물이 된다.

스피커 장치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망각된다. 사운드 재생 장치의 엄폐 능력은 디스플레이 모니터보다 명확한 계급적 서사성을 가진다. 오늘날의 청취 방식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근대 계급적 모더니티(modernity)의 발명품이다. 이를 발굴할 때, 조너선 스턴(Jonathan Sterne)의 고고학은 정치적 지층에 있어 적합한 참조점이 된다.10 사운드 재생 장치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그리고 과거부터 정립된 청취 테크닉에 적합한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또한 반대로, 발명된 사운드 재생 장치가 우리의 청취 테크닉을 훈련시 키기도 한다. 사운드 재생의 가장 일반적인 시스템으로서 스테레오 또한 그러하다. 포노토그래프, 축음기 그리고 파생된 이후의 재생 장치는 상업적, 사회적으로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의 취향, 구매와 직결되었다. 따라서 이후 재생 장치의 개발과 판매는 부르주아의 사유 재산으로서 ‘개인 청취 공간’을 전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몇 세기 동안 개발된 모든 고막형 기능 장치 또한 이렇게 대중적으로 학습된 ‘개인 청취 공간’ 을 전제로 한다.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자율 공간으로서의 청취 공간은 대부분 모든 공간에서 출몰한다. 스테레오 시스템 그리고 외부 사운드와의 고립을 목표하는 청취 장치들, 예를 들어 헤드폰과 이어폰, 음향학적으로 미세 조정된 청취 공간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장치는 청자에게 개인화된 청각적 장을 제공한다. 동시대의 사운드 아트에서는 이 테크놀로지-신체적 관습의 교란이 중요한 화두이다. 미술관의 경우에는 시각 중심적으로 전개되어 온 미술사와 제도에 의해 (내부적으로) 보다 복잡하지만, 동시에 (외부적으로) 단순한 현상이 나타난다. 제도적 미술관 안에서 테크닉화된 시각은 고유한 보기 방식을 가지며 다른 감각들과 분리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시각이 특권화된 미술관 내에서 외부로 분리된 청각은 부차적 감각으로 여겨졌다. 사운드 아트는 그러한 과정에서 ‘사운드’라는 이상화된 매체로 포장되어 재등장한, 지극히 제도적인 결과이다. 사실 사운드는 사운드 아트가 배치되어 있지 않더라도, 미술관의 어떤 공간에서든 지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운드를 여타의 시각적 재료와 같이 공간을 점유하는 재료로 여겨야 한다. 비단 영상 작업의 소리뿐만 아니라 미술관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도시의 소리들, 미술관 안 관객들의 발소리, 키네틱(kinetic) 조각의 모터가 뿜어내는 소리, 심지어 에어컨 소리까지 말이다. 기존의 제도적 미술관은 이미 미술계에 학습된 청각 테크닉을 전제하여 손쉽게 관객이 집중해야 할 소리와 무시해도 될 배경음을 분리한다. 분명 상응하는 음향 장치와 시공이 없다면 사운드는 완벽하게 차단하거나 그 경로를 설정할 수 없는 재료이다. 또한 사운드는 순수하게 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여건에 의해 정립된 사운드 재생 장치를 거쳐야 한다. 미술관의 음파에는 계급적 정치제와 모더니티, 미술관 관습의 입자가 간섭한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융해된 사회, 경제, 정치, 문화는 미술관 바깥에서 그로테스크한 감각-현실 로 신체에 흡수된다. 오늘날의 사운드가 아방가르드의 노스탤지어만을 어루만지며 실의에 빠져 버둥거릴 때, 그 실천성을 다시금 독해해 내려면 자본주의와 그 문화에 의해 발명된 청취 테크닉과 재생 장치의 작동을 의식으로 드러내고, 파열하고, 증폭하거나 소거해야 한다.

유영주 개인전 《불가능한 스위트 스팟》(2024)은 이 고전적 관습을 연화하여, 실재와 현실 사이의 막을 뚫고 흘러나오는 코리움을 굳지 않은 상태로 전시한다. 재생 장치의 가상 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고정된 관 객의 위치를 방해하고, 숨겨진 블랙박스로 배치되던 스피커를 ‘회로 그대로’, 공간의 중심에 펼쳐 놓는다. 정해진 스코어에 따라 방향을 틀어 움직이는 이 스피커 회로 장치 그룹은, 인간과 자신의 고유한 행동 방식을 전치(transpose)한다. 관습적으로 고정되었던 관객은 이 전시에서 자리를 바꾸어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은 스피커의 배치가 행하는 통제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스테레오 스피커 의 정형적 배치가 전제하는 청자의 위치, 즉 스위트 스팟(sweet spot)을 전제하는 고전적 스피커 배치 방 식은 관객의 위치를 한곳에 고정하여 지배의 상황에 둔다. 그러나 유영주의 노출된 스피커 회로가 만들어 내는 매트릭스는 규범 내 자율성을 부여하는 통제 방식을 취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향성 스피커는 다차원적이고 박동적인 청취를 가로막는 구시대 선형적 차원의 면역성 유물이다.) 교차하고 충돌하는 사운드의 무수한 방향 내에서, 관객은 즉흥적 동선을 택하지만, 이는 자율적이기보다는 의도되고 지시된 즉흥성 이다. 게다가 이 즉흥성은 전시장 내를 벗어날 수 없도록 한다. 스코어 내 생성적인 움직임을 제어하는 사운드 재생 장치의 기판. 이 기판에서 스피커의 동적 프로그램이 커널(kernel)이라면, 관객은 그 동적 커널 에 의해 제어되는 노드(node)이다. 《불가능한 스위트 스팟》은 생성적 음악의 알고리즘에서 루프하며, 이 는 결코 안정된 결과값, 즉 스위트 스팟으로 도달하는 계산을 완료하지 못한다.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사운드 재생 장치의 회로는 투명한 캐비닛을 융해하고 나와 관습을 녹이고 전시장에 도달하여 관객의 신체까 지 피폭시킨다. 관객의 세포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역사적으로 덕지덕지 붙어 왔던 관습적 신체를 절단하거나, 그것을 첨단의 테크놀로지로 대체해야 한다.
합성수지, 플라스틱
유진 태커(Eugene Thacker)는 「검은 무한성; 혹은 석유의 인간 발견」에서 석유(oil)의 수행성을 언어 적으로 제한하지 않으면서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11 태커가 ‘인간 적대적 제거(misanthropic subtraction)’라 명명하는 그 묘사의 방법은 묘사의 대상, 즉 비인간(unhuman)을 ‘언어적으로’ 사유할 때 대상의 자리를 공백과 공허로 둔다. 물질의 무한성을 상관주의로 제한하지 않기 위해 대상을 부정신학 (apophatic theology)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태커가 인용하는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다음 예시를 참조할 수 있다. “(…) 지구의 심연에서 부패하는, 반쯤 물질적이고 이질적인 것들 (…) 혐오스러운 소리와 완전히 물질적으로 실체화된 검은 어둠의 판데모니엄(pandeamoniae) 소용돌이…….” 대상을 공허로 두기. 이것이 태커가 말하는 검은 무한성(black infinity)이다. 러브크래프트식의 코스믹 호러, 혹은 고딕적 공포 픽션은 사유와 글쓰기에서 좋은 참조점이 된다.
다시 석유에 대해 논하자면, 그리고 대상을 검은 무한성으로 상정하기 전 단계로서 구태여 생기적(生氣的)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간이 석유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석유가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12 로빈 맥케이 (Robin Mackay)의 음모론적이고 사이비 과학적인(사변적이라고도 불리는) 지구 트라우마학(Geotraumatic)은 지구의 탄생부터 인신세(人新世), 그리고 10^40년 후 우주 양성자 붕괴(proton decay) 까지의 지구 서사를 축적되고 암호화된 무의식이라는 시간적 연대기로 묶는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질 변동, 유기체의 죽음과 부패, 석유의 생성,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등이 “개인의 기억을 초월한 시간”에 속한다. 그리고 역으로 “지구의 시간은 우리 내부에 축적되고, 매듭지어지고, 기록된다.”13 발생한, 발생하고 있는, 발생할 트라우마가 지구의 DNA 코드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성은 우리의 좁은 철학적 사 유를, 일단은 지구적 규모로 확장케 한다. 핵까지 도달하는 모든 지층에 새겨지는 지구의 심원한 DNA는, 따라서 무기적(無機的, anorganic) 기억까지도 포함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형식을 지구적 단위에 있는 진화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석유는 지구 트라우마의 병리적 증상으로, 지각을 뚫고 표상된다. 지구 트라우마적 진화 과정에 있는 석유는 유기물이었던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가지고 인간의 서식 영역으로 파고든다. 합성수지(synthetic resins)는 석유라는 계통에 있어 지구의 무의식적인 신경증적 승화이다. 합성수지를 이용한 지각(crust) 위의 형식들—그 가소적(可塑的) 속성으로 가능한 대량 생산, 포드주의, 건축, 플랫폼, 장식, 도시, 광케이블, 입자가속기, 인공위성, 액세서리, 힙함(hip), 각종 재생 장치 등—은 지구적 트라우마가 암호화된 염색 체의 발현으로 형식화된다. 암호화된 지구 트라우마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합성수지 혹은 플라스틱의 개체적 형상을 분석하여 그 무의식으로 파고들어 디코딩(decoding) 해야 한다. 고고심리학적 과거 (archaeopsychic past).14
합성수지는 오늘날 지층의 흔한 재료로, 간편하게 개체화된다. 혼합하기, 녹이기, 찍어 내기, 달라붙기— 원소의 콜로이드(colloid)로서, 형식으로 가공된 플라스틱은 원핵 생물이다. 오늘날 조각의 재료로 채택된 합성수지는 조각 개체에 가소적 형식을 부여한다. 에폭시, 레진, 비닐, 스티로폼, 우레탄 등 조각 개체의 중 추신경은 그 재료의 접합점에 이미 내재한다. 중추신경계는 암호화된 DNA의 지구적 기억을 포함하는데, 따라서 개체는 과거의 형식이 혼합된 채로 그리고 자연 선택으로, 오늘날의 예술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적 합한 형식으로 출몰한다. 취향이라 불리는 형식, 유행이라 불리는 형식, 미감이라 불리는 형식. 이 복합적이고 무작위적인 형식은 물론 작가의 중추신경에 내재된 지구적 기억에 기인한다. 역사적으로 리비도와 정신 에너지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 지구의 자원은 인류에 의해 어떻게 소진되었는가? 인류는 지층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프레스코, 대리석, 물감, 쓰레기, 점토, 개념, 소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닭 뼈, 기계 장치, 화학. 지층에 새겨진 이 상흔은 수렴 진화한다. “이는 무의식적 고통의 기록을 물질의 층화된 영역 전반에 걸쳐 새겨 넣으며, 물질성 자체의 계보를 수립한다.”15
유아연의 작품 〈GARMENTS 02〉(2023)가 가지는 플라스틱 피부와 신경, 근육 다발은 조각의 개체적 지지체이다. 석유는 추출되고 가공되고 마침내 경화되어 자신이 다수의 유기체였을 때의 기억을 인류를 닮 은 유해의 형상으로 형상화한다. 원유 추출물을 구성 물질로 삼는 이 개체는 분열 분석으로 접근해야 한다. 〈GARMENTS 02〉는 인간에 의해 ‘진화된’ 형태를 찾은 석유의 다종다양한 유전적 데이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했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은 창조의 능력을 성취했고, 지구 회집체의 한 계통으로서 인간은 지구의 유전자를 이용하여 자신, 즉 지구의 기억을 닮은 형태로 형식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개체발생적인(ontogeny) 예술 창작의 의지는 사실 계통발생(phylogeny)을 반복시키는 지구의 트라우마적 수렴 진화에 종속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예술은 이종발생한 개체가 되기도 한다. (*광물과 금속의 경우는 어떠한가?)


코리움은 인신세에 퇴적되고 있는 지구 트라우마적 지층의 일부로, 여전히 지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긴다. 기후 위기, 경제 위기는 그 증환(sinthome)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이 트라우마의 승화 혹은 임상 적 치료는 가능한가? 닉 랜드(Nick Land)는 섬뜩한 가설을 주장한다. 그에게 지구 트라우마의 해소는 “생물학적 질서의 완전한 소멸과 물리적 구조의 해체”로만 가능하다. 이는 인류 문명의 “집단적 뱀 되기 (becoming-snake)”이다.16
적어도 코리움은 랜드의 가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형식 없음을 추구하고, 지각 위를 덮으면 서 자신이 융용(融溶)하는 물질을 비정형화하며 서서히 전진한다. 기존의 질서와 코스모스를 없애며, 부엔트로피 화한다. 여전히 예술의 제도는 이 전진을 저지하고 있지만, 이 속도라면 예술의 면역적인 전통 가치는 무 너질 것이다. 아우라는 예술의 흔적기관이다. 곧 시장만이 이 시스템을 제어하리라. 이 삼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코리움의 범람으로 곧 무너질 댐을 쌓기보다 그 흐름의 경로를 안전한 다른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인류 문명의 ‘뱀 되기’를 추구하는 자들은 모든 물질-데이터의 융합이 지구적 트라우마의 완전한 해소 로서 결국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낼 것이라 믿는다. 자본주의라는 생명체의 자기조직화하는 힘, 인간과 기계 개체의 이종교배 그리고 도래하는 디지털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스페이스 X(Space X)와 엔비디아(NVIDIA)는 이러한 컬트적 믿음의 선지자이다. 만화 『에덴』(1997~2008)에서의 말처럼 “진화의 끝에 있 는 건, 새로운 우주”이다.17 그러나 이 만화에서와 같이, 헌 우주에 남겨진 소외된 자들은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서로를 혐오하고 죽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구 위의 모든 유기적, 무기적 개체는 지금까지 그렇게 삶을 영위해 왔다. 이들은 도태되었지만, 또 다른 진화의 길을 찾을 것이 다. 우주는 지속될 것이다. 적어도 10^40년 후까지는.

과잉, 탕진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1949)에서, 바타유는 우주론적 관점에서 에너지의 역학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에 따르면, 지구로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는 지구상 모든 역학의 기초적 자원이 된다. 그 리고 이 태양 에너지는 소비되어야 한다. 이 일반론적 관점에서 지구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들, 예컨대 아즈텍인의 희생 제의와 전쟁, 아메리카 원주민의 포틀래치(potlatch), 정복 국가로서의 이슬람, 공산주의, 마셜 플랜 등은 지구로 투입되는 태양 에너지의 소진과 탕진이라는 거대한 에너지 역학의 과정이다.18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와 이미지 자본주의의 융합적 생산 체계에서 그 에너지는 오로지 (이미지의) 생산과 노동-소비로서의 탕진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생산과 노동-소비가 이미지의 리비도 경제로 합일된다. 그렇다면 충분한 소진 없는 과잉은 어디로 치닫을 수 있는가? 내가 이 글에서 역설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 과정을 이미 지켜보고 있다. 관망은 곧 촉진이며, 위반은 곧 반동이다. 과잉에는 혁명적 잠재성 이 깃든다. 그것은 성장의 거름이기 때문이다. 생화학적 에너지의 과다는 생장으로 연쇄된다. 과잉을 반대하는 것은 이 착취적 과정—첨단 자본주의—을 통과할 수 없다. 지구가 과잉 투입되는 태양 에너지를 소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전쟁, 무장 혁명, 테러, 총기 난사, 쿠데타, 카니발리즘, 재생산의 중단, 집단 자살, 홀로코스트, 그리고 (구태의연한) 예술이다. (그러나 죽음은 착취-소진의 중단이기도 하다.) 적어도, 프로메테우스적 이성에 희망을 가지는 자들에게는 이 과잉 에너지의 소비를 더 거대한 기획의 과정 으로 ‘적합한’ 방향으로 정향(positive-going)하여 탕진하는 것이 관건이다. 리비도의 분배. 우리는 사유의 범위를, 거주의 범위를 우주로 확장해야 한다.
바타유의 입장에서 예술은 분명 과잉의 탕진일 것이다. 예술은 과잉된 태양 에너지와 전환된 리비도의 배출구일까? 그러나 첨단 자본주의의 공리는 이를 다시 산업적 성장으로 정향한다. 이로써 예술이 가지는 탕진의 가치는 다시 의미 없는—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유지와 보수(바셀린의 역할), 소멸과 성장으로 되먹여진다. 이제 탕진은 소멸이 아니라 에너지 순환 루프 조건의 재형성이 되어 버린다. 탕진된 에너지로서 이미지의 폐허가 남기는 것은 이미지를 매개(혹은 화폐)로 하는 자본의 유통 시스템뿐이다.

예술을 낭만주의적으로 신화화하는 누군가는 예술의 ‘아방가르드’적 처방이 이 피드백 루프의 중단을 가능케 할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이는 예술이라는 탕진 방식의 갱신-분열인가, 혹은 구태의연한 예술의 신화를 동어 반복하는 면역성 유물인가? 다시 말하자면, 미술 자체의 언어를 갱신해 나가며 ‘외부’의 현실과 같은 속도로 전진하는가, 혹은 어떤 방식으로의 해방이나 철폐의 가능성을 막아 내는 면역 기능을 하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탕진에 있어 반동적 수행성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탕진은 운동의 정지가 아니라 미래의 생산을 위한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액체화하기.
우리는 역사적인 고유 명사로서 아방가르드적 처방을 바라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전위를 꿈꾼다면 자신이 생산하는 형식이 문화의 어떤 영토를 어떻게 횡단하고 있는지 진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식을 수행하면 변화를 촉진하는지, 혹은 변화를 가로막는지도 알아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는 예술이 예술임을 포기해야 한다. 심미적 문화와 기술적 문화의 완전한 융합. 예술이 꿈을 실체화한다면, 인간 문명의 예술 일반 또한 진화의 꿈을 꾼다. 그러나 기성의 예술과는 형태의 가족 유사성만을 가진 채, 전혀 다른 가지로 뻗어 나가며.19
사유의 동적 커널로서 사변
비평이라는 장르가 생산하는 언어의 위계적 구조를 보자. 비평은 명징함인가? 비평은 합리성인가? 비평은 이론인가? 적어도 시스템 내 장르화된 비평은 합일과 승화를 노리며, 의미의 층위로 올라서고자 한다. 이러한 경향은 제도로의 안착에 필요한 주제와 의미가 미술계의 통화이기 때문에 형성되었다. 각종 지 원서와 행정 서류. 로고스 중심주의-언어를 사용한 물질 정복. 의미도착증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더디게 만든다. 인간의 신체와 이성적 사유는 이제 더 이상 세계와 현실을 이끌어 나가는 커널이 아니다. 이제 자동화된 지구적 자본주의의 피드백 루프, 즉 물질-코리움이 이론과 사유의 끌개이다. 인간 개체와 그 이 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예속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이 기존의 의미도착적 형식, 변증법을 취하며 실천적 수행성을 가질 수 있는가? 물질의 속도를 쫓아가 다시 그 선두를 탈환하는 것은 명백히 반동적 이다. 개연성, 인과성, 변증법은 폭주적 진화를 가로막는 열성 염색체이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물질의 진화를 제어하느냐이다.
마야 크로닉(Maya B. Kronic)의 말처럼 철학이 현실과 맞닿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조정되고, 조각나고, 기워지고, 엮이고, 붙여져야 한다.20 이를 위해 지금까지 출몰한 ‘사변’이라는 사유의 궤적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비평이 형식의 복합적 과잉을 영역적으로라도 누설할 수 있는가? 사변은 물질의 진리 있음을 전제하기보다는 물질의 진리 없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허의 상태, 즉 검은 무한성으로 다룬다. 그 물질의 축-클리나멘(clinamen)을 비워 둔 채 그 주위를 코일의 형태로 우회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변적 비평은 윤곽을 둘러 돌아 그려지는 인지적 지도이다. 변증법을 거부함으로써 물질과 개 념은 폭력적으로 재매핑된다. 그 기호는 알아볼 수 없으며, 해당 사유에 뛰어든 독자(혹은 시청자)를 혼란 스럽게 한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가 0과 무한 사이를 사유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포스트롤 박사(Dr. Faustroll)에 따르면, 신은 0과 무한의 접점이다.21 그러니까, 총체적 세계의 정보의 총합이다. 창조하는 신의 형상은 코일이다. 이 코일은 사변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사유의 이송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은 신은 단일한 벡터를 갖는다.) 이러한 과정은 첨단의 신학을 이원론적 그노시스주의가 아닌 총체적 유물론으로 들어서게 만든다.
자동화된 자본주의 피드백 루프에서, 사변의 수행성은 진화를 가능케 하는 대체적 커널을 작동하는가? 혹은 자동화 생산 라인의 커널을 재프로그래밍하는 것인가?
LSD, 실로시빈, 아야와스카(ayahuasca)에 의한 뉴런 회로의 무작위적 합선, 이성의 고양, 사유의 증폭. 이는 무기물까지 확대된다. 에너지 매개의 운송로를 확대하라. 감각은 사유가 되고 사유는 감각이 된다. 자본주의의 분열증적 회로를 합선시켜라. “사유의 신시사이저!”22 느슨하게 덩어리진 온갖 사유의 입자장은 총체성을 가지는 정보 처리의 계(system)이다. 이 시스템은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다. 외부의 ‘자연적’ 정보들을 VCO(Voltage Controlled Oscillator, 전압 제어 발진기)에 투입하여 ‘인공적인’ 정보로 합성한다. 이 회로의 정보 처리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리비도이며, 그 온도를 높이는 것은 환각제이다. 합성으로 발생하는 환각은 정교하지 않다. 환각의 작동은 의식의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격렬한 리비도의 흐름 을 VCA(Voltage Controlled Amplifier, 전압 제어 증폭기) 삼아 다학제적 철학과 예술을 합성하여 예측 불가능한 거친 사유를 만들어 낸다. 환각은 폭주하는 감각의 격렬한 신경 자극이며, 그렇기에 감관(感官)이 (그리고 무의식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현실과 ‘직관적으로’ 동기화된다. 따라서 환각은 정치적, 예술적 실천의 길잡이가 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것이 발명된 허구의 이미지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이 허구라면, 탈주적 환각만이 우리를 자동화된 피드백 루프에 관해 사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말과 같이, “예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는 허구에서 현실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허구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관계”이다.23 당연하게도, 환각을 정치화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감각의 합 성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환각은 노이즈인가,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인가? 하이퍼팝(Hyperpop)인가, 정글(Jungle)인가? 하이퍼팝은 종말로 향하는 문화의 잔해를 박동적으로 가속함 과 동시에 유령론(hauntology)적이지 않기 위해 레진으로 스스로의 표면을 단단히 코팅하는 복합적 합성 음악이다. 그리고 “정글 음악은 입자가속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육체에 담겨 있는 세포적 드론을 제작하는 격심한 저음 진동수는 (…) 통상적인 시간을 빠른 실리콘 순간들로 되감고 장전한다.”24

사변적 비평이 인지적 지도 제작이라면, 그 지도의 모양은 나선일 것이다. 벡터의 진행 방향을 따라 우 회하며 너비를 확산하지만,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즉, 3차원에서 의미화되지 않는 지도이다. 자본주의는 빠르게 진행하는 벡터이며, 그 진행은 너비를 발산한다. 코일은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의 빛 원뿔(light cone)을 감아 돌며 우회하고, 이는 다른 차원을 암시한다.25 다수의 과거와 다수의 미래가 교 차하는 지점이 현재라면, 사변 코일은 이 교차점 바깥을 관통한다. 포스트롤 박사가 증명하는 신의 이름 은 ±이다.26 0과 무한의 접점=신=무한성. 무한성과 그로 인해 도출되는 우연성에 관한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수학적 증명은 사변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절히 설명한다.
“위치와 부정의 결합, 또는 영원으로서의 0의 완전한 우발적 표현은 사변적 잔혹함의 시작이다. 이는 + 앞에서 −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곧 빼기(감산)의 시작이다. 우발성이라는 영원의 넓은 범위에 대한 공간적 도식은 폭 (너비)이다. 자(ruler)와는 달리 나침반의 영역인 폭은 범위를 확장하고, 영원의 우발성에 기반한 사변적 영역을 열며, 감산의 작동에 내포된 강도-외연, 추상-구체 형태의 분포를 포함한다. 마치 ‘+ −’가 자연을 자석의 양극 화된 막대로 번역하듯이, 나침반과 같은 영역으로서의 폭은 우발성을 기본적인 전자기 코일의 구성으로 변환한 다.”27

이 네오-로고스적 경험, 다차원적 신을 알아채는 일, 즉 사변은 신의 형상을 따라 빙글빙글 돈다. 실재계의 영역은 개방되었다. 이 영역을 탐험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가 필요하다. 코리움은 너비의 분열적 증식이며 탐험해야 할 실재를 암시한다. 코리움은 속성이지만, 위상학적으로 수많은 차원을 포괄하는 야릇한 형식이기도 하다. 코리움의 DNA와 그 암호화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코리움 안에 들어가 스스로 녹아내려야 한다. 사변은 열역학적 악마를 추종한다.28 엄밀히 말하면, 악마가 되려 한다. 열역학 제2 법칙(dS≥dq/T)에 의해 과거는 가역적으로 재구성될 수 없지만, 영원과 우연, 그러니까 카오스의 자장에서 이 악마는 사변으로 소환되어 과거-미래를 재구성한다. 사변은 다차원적 정보를 처리하는 동적 커널이다. 다시 한번 역설하자면, 실재가 되어라! 피폭을 두려워한다면 신을 만날 수 없다.

“만약 엔트로피가 시간의 방향을 정의하고, 증가하는 무질서가 미래와 과거의 차이를 결정한다면, (지역적) 외 연력이—생명체와 같은 모든 복합적인 사이버네틱 존재들이 그 속에서 존재하는—부정적 시간성 혹은 시간 역 행을 기술하지 않는가? 실제로, 지능의 ‘뒤집힌’ 시간에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어떤 자연 적 구성된 관점에서도 가능한) 시간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29
“우리의 정신이 더 활짝 열릴 때, 그 정신은 낡아빠진 목적론 대신에 오직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0 이인증(離人症), 정신분열, 프로메테우스주의, 그리고 헤도니즘 (Hedonism)을 찬양하라.31
[주]
1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 「2019년 로스앤젤레스: 민주병증과 이종발생」(1996), 『#가속하라』, 로빈 맥케이 외 편 (서 울: 갈무리, 2023), 281.
2 이브-알랭 부아 외,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정연심 외 옮김 (파주: 미진사, 2013), 64.
3 이브-알랭 부아 외,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95-96.
4 파스칼 질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정지은 옮김 (서울: 그린비, 2019), 104.
5 질 들뢰즈 외, 「문명 자본주의 기계」(1972), 『#가속하라』, 163.
6 파스칼 질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123.
7 김채리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참조함.
8 CCRU, 「사이버네틱스 문화」(1996), 『#가속하라』, 312.
9 Reza Negarestani, “Notes on the Figure of the Cyclone”, in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 ed. Ed Keller, Nicola Masciandaro, Eugene Thacker (New York: punctum books, 2012), 291.
10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윤원화 옮김 (서울: 현실문화연구, 2010).
11 Eugene Thacker, “Black Infinity; or, Oil Discovers Humans”, in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 173-180.
12 Thacker, “Black Infinity; or, Oil Discovers Humans”, 173-180.
13 Robin Mackay, “A Brief History of Geotrauma”, in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 1-37.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철학에 관한 주석으로 쓰인 이 글에서, 맥케이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들뢰즈 (Gilles Deleuze)의 분열 분석,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계보학,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 그리고 헤켈 (Ernst Haeckel)의 계통학(phylogenetics), 보드킨(Bodkin)의 신경학(neuronics) 등을 상호 경유시켜 인간 중심적 철학과 철 지난 과학 이론을 재독해한다.
14 Mackay, “A Brief History of Geotrauma”, 1-37.
15 Mackay, “A Brief History of Geotrauma”, 1-37.
16 Mackay, “A Brief History of Geotrauma”, 1-37.
17 엔도 히로키, 『에덴 18』, 정은서 옮김 (서울: 학산문화사, 2008), 128.
18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최정우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22).
19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제안한 개념으 로, 특정 개념이나 범주가 명확한 정의를 갖지 않고, 다양한 특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개념 의 정의가 고정된 경계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특성의 연관성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20 Maya B. Kronic, Gender Synthesis (2024). 저자가 한정 수량의 더미북 형식으로 제작하였다.
21 알프레드 자리, 『파타피지크학자 포스트롤 박사의 행적과 사상: 신과학소설』, 이지원 옮김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9), 169.
22 CCRU, 「사이버네틱스 문화」, 『#가속하라』, 312.
23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서울: 현실문화연구, 2016), 107.
24 CCRU, 「사이버네틱스 문화」, 『#가속하라』, 312.
25 ‘민코프스키의 빛원뿔’은 특정 사건에서 빛이 퍼져 나가는 경로를 시공간에서 원뿔 형태로 나타낸다. 미래 원뿔은 사건 이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 과거 원뿔은 이전에 영향을 받은 영역을 의미한다. 빛원뿔 내부에 있어야 인과 관계가 성립하며, 원뿔 외부의 사건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는 시공간에서 인과성과 빛의 속도 한계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26 알프레드 자리, 『파타피지크학자 포스트롤 박사의 행적과 사상』, 169.
27 Negarestani, “Notes on the Figure of the Cyclone”, 293-294.
28 열역학적 악마, 즉 ‘맥스웰의 악마’는 제임스 맥스웰(James C. Maxwell)이 1867년 진행한 사고 실험에서 고안된 가상의 존재이다. 맥스웰은 빠른 분자와 느린 분자를 구분하여 열을 한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상의 실험을 제안한다. 이 악마는 온도 차이를 만들어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 이지만, 현대 정보 이론에서는 악마가 분자 정보를 처리하고 삭제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정보의 처리가 열역학적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밝혀내며, 열역학 제2법칙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킨다.
29 Nick Land, “Extropy”, Templexity: Disordered Loops through Shanghai Time (Urbanatomy Electronic, 2014).
30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320.
31 나의 데이터가 당신들의 해마에 기생할 수 있도록 해 준 모든 이들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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