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균
*본문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2023 오픈스튜디오 [레지던시X예술 제도X미술사] 토크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음.
A. 역사
역사는 언어로 이룩해낸 물질적 성좌이다. 비연속적인 사건의 얽힘을 하나하나 풀어내거나 알렉산드로스처럼 얽힌 채로 절단하여, 인과를 가진 서사적 배열이 될 수 있도록 배치한다. 학제로서의 역사학이 이 배치를 위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배치는 무작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서술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정치적 교차 지점에 충실하다. 예컨대 전통적 역사는 민족-국가, 계급(왕족에서부터 부르주아까지), 가부장, 서구중심주의 등의 헤게모니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술되었다. 현대 이후의 시간적 조건인 동시대에서는 기존의 역사가 서술한 사건을 다시 불연속적으로 만들어 재배치하거나 누락된 사건을 발굴하여 새로운 배치의 인과에 끼워 넣는다. 이처럼 역사의 서술 조건 자체에 집중하여 (정교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대안적 서사를 생성하는 행위는 분명 후기구조주의의 주요한 유산일 것이다. 제 2차세계대전 직후까지 서구중심주의적, 남성중심주의적으로 작성되었던 미술사 역시 축적된 역사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대안적 서술 방법을 탐색했다. 노동과 페미니즘, 인종과 젠더에 관한 급진적 논의들이 펼쳐지고 이 논의가 도출해낸 미술사는 ‘신미술사’라는 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역사 서술은 사건에 있어 사후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큐레이터와 작가에 의해 새롭게 제안되었던 큐레토리얼 실천(curatorial practice)과 미술의 개념화는 과거의 사건들을 다른 방식으로 직조함과 동시에 이 직조 행위 자체를 새로운 사건으로 즉각 편입하기도 한다. 큐레이터와 작가는 미술사의 등장인물로만 남지 않고 동시에 미술사 쓰기 당사자의 지위를 얻어냈다. 오늘날 미술사 서술과 창작의 조건이 되는 ‘담론’이 바로 이렇게 구성된다. 실시간의 구술과 과거의 글이 불연속적으로 뒤섞여 또 하나의 대안적 역사로 호명된다. 19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은 미술 창작의 노동과 예술 언어의 조건을 재사유하며 이를 미술사 서술의 준거로 삼았다. 이러한 기준하에 그들은 미술사를 다시 씀과 동시에 자신의 기획과 작업으로 갱신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의 실천은 예술 노동과 페미니스트 미술 노동의 역사적 억압을 즉각적으로 해체하고, 또 새로이 규정해 나갔다. (물론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urg)와 같은 모더니스트 평론가들 또한 매체에 대한 국지적 기준으로 서구 미술사를 정리하고 당대의 작가들을 포함해 미래로 향하는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미술사 서술은 근대적 역사 서술 방식에 충실하며 다른 역사 서술과 해체를 배제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다 (시간적,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한국의 예술 현장도 국제적 미술사의 벡터에 발맞춘다. 예를 들어 정은영이 여성국극의 형식과 맥락을 엄밀하게 독해하고 다시 현재에 배치하는 행위는 담론을 생성하고 역사의 쓰기 방법을 제시한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 자체에 관한 작업은 이제 규모가 큰 공공미술관에서 빈번히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작가에게 강력한 참조점이 되는 새로운 유물론 또한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위한 첨단의 사유가 아니라, 급진적인 방식으로 물질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역사를 역진적으로 이해하고 해체하기 위한 사유이다. 전에 없던 이론이 아닌 이원론적 서구 철학이 억압한 물질에 관한 기존 사유를 엄밀하게 독해하는 것이다. 최근 여러 영역에서 부유하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도 짧지 않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급진적으로 독해-해체하고 실천으로 갱신하려는 경향이다. 따라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대중적 진술(혹은 궤변)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만 승자가 아닌 이들은 역사를 납치하고 전유하며 편집하여 과거의 역사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새로이 편집한 역사를 저항적이거나 가속적인 것으로 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나열보다는 실천의 근거이자 담론적 실천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결국, 역사는 비의도적 목적과 수행성을 가진다. 미술사도 마찬가지이다.
B. 시스템
금융과 추상이 상부 분과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다. 이 방향은 시장성이다. 세계 경제는 인터넷과 그에 기반을 둔 금융 시스템으로 통합되었고 이렇게 총체성을 가진 경제 시스템은 원래의 현실을 대체한다. 우리의 일상 또한 IT 기업과 금융 기업의 시스템에 대부분을 의지합니다. 질주하는 금융화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 가치들을 빠르게 ‘비경제적’으로 만들어버리며 제거한다. 시장성 없는 분야와 행위들은 금융 시스템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철저히 도태되는 것이다. 사민주의자가 힘을 잃고 새로운 종류의 우파가 출현한 배경도 위와 같다. 경제와 정치에 의존하는 문화예술 또한 자연스레 이 흐름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술 행위도 노동이기 때문이다. 시장과 겹쳐진 예술 현장에서, 예술과 문화의 이미지는 마치 NFT와 같이 금융 가치가 매겨져 유통된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담론은 발산하지 않고 수렴하며 그 하부구조는 금융 시스템의 시장성이라는 구조이다. 이 리바이어던은 문화를 경제성이라는 지표로 저울질하여 가속한다. 그 지표에서 탈락한 요소는 사라진다. 중요한 점은 문화예술의 금융화가 단순히 경제적 구조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취향까지 지배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세련되고 무엇이 별로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복합적인 물질적-언어적 결정 과정을 따르지만, 총체화된 시대에서 이 취향은 일정한 경향을 보인다. 문제는 이 경향이 기획과 비평으로 선취 되지 않고 금융경제의 문화논리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평가와 기획자의 실천이 무기력하게 다가온다. 실천은 이 리바이어던에 맞설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가 특정 문화 요소의 경제적 가치를 가속한다면, 그 “경제성”있는 문화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예컨대 《프리즈 서울 2023》은 신자유주의 문화예술의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그 내장까지 꺼내 보인 고어(gore)한 현상이었다. 몇몇이 프리즈에 느꼈을 알 수 없는 거부감과 역겨움은 이 잔혹함에 기인한다. 펜데믹으로 침체되었던 미술 현장은 여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즈라는 거대한 자본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에 발맞춰 정부에서 지원한 미술 주간은 애써 서울의 미술 현장이 활발하고 다채로운 것처럼 포장했다. 우리는 미술 주간에 한국의 예술계가 보여줄 수 있는 특수한 담론과 고민의 지점들을 마침내 달성해 냈는가? 2023년의 미술주간은 서울의 미술 현장이 전지구적 ‘취향’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주주총회이기도 했다. 서울의 미술씬이 제공하는 이미지가 전지구적 문화예술 금융 시스템에 통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는 필시 서구 중심의 금융계가 가지는 식민주의적 입장을 동반한다.) 물론 이렇게 유입된 자본은 단기적으로 창작의 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 채택하고 가속하는 문화예술의 양상은 문화예술의 평가 지표를 금융 지표로 대체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투자는 순식간에 철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이라는 식민주의적 특수로 설정된 시장성은 자본에 의해 그 효용성이 다 했다고 판단되었을 때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서울’이 더는 매력적이지 않을 때에 말이다. (또는 파멸적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가 이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 한편, 프리즈로 인해 과잉 표상된 서울 미술계에서 창작자들은 예술가로서 강요받는 경제적 주체성을 위해 더 많은 창작을 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예술계 재원의 상당 부분은 공공 예산에 의존한다. 이 기금 의존적 제도는 긴축을 통한 부채 감소보다는 부풀려진 결과 중심적 프로젝트 발표의 인플레이션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갈라파고스적 지원 분야는 통폐합되어, 상이한 분야들이 같은 평가 지표로 경쟁한다. 형식과 내용에 따라 나뉘던 평가 지표가 경제성이라는 통일된 지표로 대체되고,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부쳐지는 것이다. 문화예술 예산 삭감에 관한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의 진술은 적절해 보인다. “문화에 대한 접근을 교육과 복지처럼 기본권이 아닌-비록 이 모든 것 또한 조직적으로 국유화될지라도-사적 영역에 위탁할 수 있는 사치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자들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남지 않는다. 경쟁에 적합한 이미지들을 생산하며 부채 인간이 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작업을 하며 신용불량자로 남을 것인지. 지금도, 최신의 ‘경쟁력 있는’ 이미지와 담론이 빠르게 등장하고 소멸한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경제적 규모는 유지될 전망이지만, 그 내용은 시장성과 화폐가치로 선별된 리얼리즘이다. 문화 정책이 복지의 기조를 영원히 지속하는, 전통적 복지 국가에 대한 수호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기존 정책의 기조가 한국의 문화예술을 충분히 부양하고 발아시켰다면, 지금의 행정화된 제도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한국 문화예술의 담론 구조와 창작 노동의 자율성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C. 양식
페스티시(pastiche)와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은 이미 동시대 미술의 오래되고 일반적인 양식이 되었다. 위의 방식은 문화 일반에 예술로서의 자기 자신을 함입하기에 첨단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 첨단의 이미지란, 제도가 선호하는 화폐로서 이미지이다. 미술관에 함입되는 대중문화와 IT 기술들을 떠올려 보라. 미술관이 수집하는 첨단의 이미지는 대중문화나 기술이 갖는 해방적 측면에는 큰 관심이 없다. 미술이 여타의 정치 언어와 같은 문법을 구사할 필요는 없지만, ‘다원 예술’과 ‘융합 예술’은 동명의 지원 항목을 통해 문화와 기술의 국가경제적 부흥에 함께한다. 이러한 문화논리는 문화산업 규모의 성장과 관련 주가의 장기적 상승에 기인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관이 ‘힙한’ 밴드를 포함한 공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제도에 의해 인준된 유명한 미술가가 레이브 파티를 개최하고, 기술-예술 융합 지원사업을 개설하는 부서 아래의 진짜 욕망은 무엇인가? 이들은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일까? 예술행정가들은 21세기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를 꿈꾸지만, 다원주의라는 신자유주의 표어에 숨은 함정은 문화의 벡터를 국가가 운영하는 세련된 컨벤션 홀로 이끄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예술이 경제적으로 기능적이고 사적인 언어로 인식되어 갈 때, 현장에는 여전히 예술의 무용함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서울을 벗어난 지역의 현장에 있는 이들,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창작자, 주류 담론이 간과하는 내용을 발화하는 이들 말이다. 산업 바깥의 예술은 자본주의의 벡터와 어긋나 있기에 실험적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당대의 현실과 어떻게 연합하고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떠올려 보았을 때 오늘날 예술의 ‘실험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첨단의 이미지는 점차 양식화되어간다. 이러한 양식은 빠르게 갱신되는 오늘날의 미술사를 장악하고 있다. 첨단 이미지의 양식을 지탱하는 신자유주의적 요인에도, 이 양식이 신자유주의의 공범이나 하수인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제도 내 주류로 공고히 자리 잡은 양식 또한 화폐와 담론을 전유하여 만들어낸 탈주의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을 실천으로 이끌지, 혹은 무심히 지나칠지는 창작, 비평, 기획 그리고 정치의 책임이다. 모든 현상과 실천, 이미지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그리고 그들 각각의 고유한 실천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 클레어 비숍, 『래디컬 뮤지엄』, 구정연 외 (역), 서울: 현실문화, 2016, 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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