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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역적 현실의 기호, 리얼리즘과 주체성-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의 각주

영역적 현실의 기호, 리얼리즘과 주체성

-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의 각주



*본 글은 일민미술관 프로그램 <IMA CRITICS 2023> 전시비평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음.

https://ilmin.org/ima_on/2023imacritics1/






윤태균



1.

리얼리즘은 구상(具象)인가, 물질적 전형(典型)의 재현인가? 리얼리즘은 객관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모사하려는 자연주의와는 구분된다.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는 서로 다른 항에 있는 개념이기보다는, 해석의 과정에서 부여되는 양식의 분류이다. 자연주의라는 해석은 해당 작품이 객관적으로 감각되는 세계 자체를 재현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 ‘물러난 세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주의 (혹은 과학적 진술)는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주체성과 그 사이의 시간적/공간적 물질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작가-세계의 이항만이 존재하여 작가가 그것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세계라는 이항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작가는 세계에 얽힌 의식으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통해 기호적 현실을 번역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 자체를 선험적 실재로 여기는 자연주의적 해석은 작품을 둘러싼 역사적 시공간을 간과한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물질적 전형의 재현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근 몇 년간 유행에 민감한 좌파 이론가들에 의해 부상한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 등의 철학들과 그 적용은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성의 형성과 그 물질적 조건의 실재적/정치적 관계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우리는 간과된 주체성을 다시금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주체성은 개체화된 기계로서 기호자본주의의 코드(code)를 고유한 기호계로 변역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레이엄 하먼의 예술론이 경계하는 ‘직서주의’(literalism)에 속한다. 하먼이 말하는 반(反) 직서주의는 예술 작품이 특정한 지식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식-예술의 긴장상태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 또한 내재적 현실의 기호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 작가의 주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물질적 조건을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에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예술은 넓은 의미에서 직서주의이다.’ 예술은 자신 내부의 자율적 기호들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기호로서 다층적 기호계(예술계, 경제, 정치, 시장, 역사, 기술 등)에 함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엥겔스의 주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리얼리즘은 “전형의 창조”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호적 전형의 창조이다.



2.

2.

기호는 배치와 관계들로 생산하는 체계이다. 여기서 기호라는 개념어는 전통 기호학의 기표-기의 이분을 따르지 않는다. 기호계란 다양한 기호들의 계열체로, 생산하는 체계를 일컫는다.



2-1.

마우리치오 랏자라또(Maurizio Lazzarato)는 배치로서의 기호계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기표적 기호계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요한 기표적 기호계는 언어이다. 기표적 기호계로서 언어는 우리 자신이 ‘나’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사물에 관한 관념 또한 나와 해당 대상의 언어적 동일시로 창출된다.[1] 그러나 우리 세계, 그러니까 이 새로운 자본주의는 언어로 개체화된 신체와 사물들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비록 언어가 우리를 독립된 개체로 여길 수 있도록 하지만, 개체화된 주체성은 언어의 화용적 사용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날 기업가적 혹은 피투자자로서의 위태로운 주체가 되길 강요받는 것이다.[2] 우리는 개체들의 상호 네트워크가 이 현실을 지탱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거대한 사회의 작동을 지탱하는 것은 비기표적 기호계이다. 랏자라또는 비기표적 기호계의 개념을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의 저서 『천개의 고원』에서 차용했다. 비기표적 기호계는 기표와 기의의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기호계를 말한다. 기표는 기의를 대신하여 나타내는 기호의 물리적 매체를 말하고, 기의는 기표가 나타내는 의미를 말한다. 기표와 기의의 대립은 서구의 언어학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온 개념이지만, 가타리는 이 개념이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욕망은 언어로 완전히 표상될 수 없다. 가타리는 이러한 비언어적 차원을 비기표적 기호계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기표적 기호계는 기표와 기의의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기호계를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생산인데, 비기표적 기호계는 이 생산을 책임진다. 기업 회계, 주가지수, 통화 시스템, 금융 네트워크, 국가 예산, 컴퓨터 언어, 기계적 시간, 사회적 공간성, 신체, 섹슈얼리티, 문화, 자연 등의 비기표적 기호계는 그것을 운반하고 담론으로 구조화하여 발화하는 개체들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기표로 기능하기 보다는 생산 그 자체의 기호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비기표적 기호계와 비기표적 기호의 배치는 의미나 재현을 생산하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몰적인 영토화의 흐름에 복무한다. (미디어와 디지털 장치들에서 내뿜는 수많은 더미 이미지들도 이 비기표적 기호계의 지층 중 하나이다.) 주체성은 이 기호계들의 중첩에서 발생한다. 주체성은 단순히 언어적 개체화가 아닌 실재의 수많은 기호계들이 중첩된 자리에서, 기호의 배치 과정 그 자체이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듯이, 결국 주체성은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흐르고 뒤섞인 기호들의 유동적 배치이자 기호계 안의 또 다른 기호이다. 주체성을 한 개인의 인격이나 고정된 자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주체성은 배치에 따라 달라지고 물질적 조건에 의해 다르게 욕망하는, 말하자면 수행하는 것의 범주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 비기표적 기호계 위에 살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 기호계에 속해 있다. “주체성, 창조, 언표행위는 인간, 인간 이하, 인간 이상의 요소들이 배치된 산물이며, 그 속에서 기표적, 인지적 기호계는 다른 구성 요소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3] 우리가 말한다고 생각할 때, 물질이 말한다.



3.

언급한 바와 같이, 창조와 예술은 배치의 문제이다. 특히 리얼리즘 회화에서 나타나는 여러 구상적 형상들과 기표(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비기표적 기호계가 화용적 언어라는 기표로 치환되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기호 요소들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고 하여 그것을 지시 대상이 명확한 기표적 기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즉 회화는 그것의 물질적 조건을 단순히 ‘반영’하는 기표가 아니라 배치로서 흐르고 생산되는 작가의 주체성에 의해 약호 전환된 비기표적 기호계인 것이다. 다층적인 비기표적 기호계의 세계에서 개별 리얼리즘 회화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은 작가의 주체성이다.

한편, 우리의 유기적 신체는 하나이기에 우리는 현실의 한 부분에서만 숨 쉴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 주체성이 자리 잡고 있고 경험한 현실을 우리는 총체적 개념이기보다는 부를 수 있을까? 리얼리즘 회화가 다시 그 현상학적 경험과 실존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수많은 기호계가 난립하고 서로 약호 전환되는 기호자본주의에서 작가 주체성의 회화가 전 지구적 (대문자)리얼리티에 접근하고 이를 번역해 낼 수 있는 것인가? 프레드릭 제머슨(Fredric Jameson)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형상화의 유희(play of figur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4] 나는 이 글에서 명백히 반헤겔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세계에 관한 제머슨의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예술의 형상 기호는 예술 서사 내부에서 출현하는 전적으로 알레고리적인 기호 요소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 주체나 의식이 이 새롭고 거대한 전 지구적 리얼리티에 접근할 수 없다는 느낌을 …(중략)…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왜곡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형상들을 찾아낼 수 있다. 사실 (문학)비평가로서 우리의 한 가지 과제는 그러한 형상들이 지칭하는 궁극의 리얼리티와 경험들을 추적하여 개념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5]



그러나 이 형상들이 각각 개체화된 기호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형상들은 회화면 내부의 서로와의 관계와 회화면 내외부 기호들의 유희와 역동적 생성, 그리고 주름들로 잠재성을 가진다.(심지어 회화면 그 자체가 하나의 형상-기호가 될 수 있다.) 주체성은 총체적 세계의 중첩된 물질적 흐름 속에서 ‘영역적 현실(regional reality)’을 드러내는 것이다.



4.

미적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경험들은 형상들의 유희와 그 강도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형상들이 가지고 있는 리비도 정치는 주체화의 흐름에 편승한다. 미적 경험은 현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 욕망에 의한 것이고, 욕망은 꿈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단계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회화를 보고 미학적 경험을 하는 것은 우리가 욕망이 그려낸 형상들과 마주침으로써 그 욕망의 배치들에 접속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감상자로서, 우리는 또 다른 이질적 현실에 접속함과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 그림의 현실을 공명시킨다. 우리는 같은 우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자는 상호작용할 수 있다.



5.

그렇다면 오늘날의 리얼리즘 회화는 그 자체로 어떤 기호인가?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는 구체적인 지정학적 리얼리티, 즉 영역적 현실을 감각적으로 주름 짓는다. 2010년 이후 회화들이 주로 눈에 띄지만 20세기 후반의 작업들을 비롯하여 시간상으로 순행하는 회화의 연대기들은 해당 현실의 지표가 된다. 각 층과 공간들을 따라 순행하는 회화들은 현실과 얽힌 계보학을 생성해 내는데, 따라서 전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시각적 형상들이 무엇의 기호로 기능하느냐이다.



6.

최진욱 작가의 회화면은 대부분 면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림의 시작>은 깊은 원근감을 가진 듯 보이나 작가의 작업실에 어지러이 널린 물품들과 난로, 기둥과 같은 구조물이 시선의 전진을 방해한다. 또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인데, <천장에 가까운 그림>, <작업실 3-1>은 큼직한 그림(혹은 색 면)과 창틀로 각각 그 너머의 상황들을 가린다. 이후의 작품 <형광등>의 경우 이것이 구상 회화임을 작게나마 주장하는 형광등을 제외한 모든 면이 검은 물감 벽으로 막혀버린다. 납작해진 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단색조의 화면에서 유일하게 채색으로 표현된 작은 형상들이다. 우리는 이 채색된 형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보다는 그것이 ‘왜’ 유일하게 튀어나왔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6-1.

회화의 차단된 구상적 깊이는 응시의 시각적 경로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관찰 대상의 동일시를 낳기 마련이다. 대상의 색과 모양, 그것의 위치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것에 관한 입장을 산출한다. 자신의 시선을 현실과 연결하기 위해, 즉 대상과 자신과의 분리를 피하기 위해 대상을 자신의 신체와 같이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신체로부터 분리된다. 작가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채색된 것들은 분리에서 살아남음과 동시에 자신의 신체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자화상>에는 작가의 생물학적 신체가 함께 등장하지만, 작품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무채색으로 거칠게 그려진 몸은 마치 죽은 것과 같이 보인다. 오히려 노랗게 채색된 형상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자신의 시선에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한 가지만을 성애화하고 나머지를 자신의 신체에서 분리해 버리는 이유는 <하교길 2>에서 일견 추측할 수 있다. 면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 조각들은 기억 장치들에 의존한다. 디지털 장치에 비치는 이미지들, 저널의 사진들, TV에 송출되는 영상들을 보는 듯한 사각형의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상황의 기록이지만 서로 엮여 유기적 기억의 장면으로 주조된다. 이 기억 장치들에 담기는 장면은 선별되고 편집되어 나열된다. 하지만 주조된 개체에 의한 것이 아닌 해당 이미지 생산에 관여한 사회의 욕망이다.[6] 디지털 장치에 무작위로 업데이트되는 이미지, 뉴스에 비치는 이미지, 잡지에 실린 사진들…. 이 이미지들은 욕망의 창이다. 하지만 개별 인간 집단의 욕망이 아닌 영토화하는 현실(혹은 자본주의)의 욕망이다. 오늘날의 주체성은 이미지 사이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계 장치의 욕망으로 주조된 이미지들은 주체성의 집단화를 이룬다. 작가는 이미지들을 한데 묶어 자신 기억의 한 장면으로 평탄화하고, 서사화한다. 이 비기표적인 (동시에 기호적인) 서사화는 오늘날의 분열증적 욕망들 사이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가능케 한다. 작가의 주체성은 이미지들과 동격인 기호의 배치 그 자체인 것이다. 돌아와 말하자면, 최진욱이 자신의 회화에 현실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구상적 형상을 남겨두고 나머지 시각 대상을 신체가 아닌, 죽은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실재의 여러 이미지와 장면들 사이에서 선택과 배치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물학적 몸마저도 인지적 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주체성의 기호계에 담기는 형상들은 주체성의 생생한 신체가 되고, 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절단된 형상들은 죽은 시체가 된다. 이처럼 주체성은 단순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변형하는 수행성이다. 마찬가지로 생산되는 이미지 또한 세계를 단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개입하는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진다는 생각은 그렇게 명확한 사실이 아니다. 언표행위와 행동의 다른 집합적 배치는 다른 신체들, 다른 행위 방식들, 공동체와의 다른 관계들을 기계적으로 생산한다.”[7]



6-2.

함성주 작가의 회화 또한 그러하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한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은 사실 무작위가 아닌 작가의 무의식 층위에서 배치된 기억의 장면이다. 본래 디지털 장치에서 찾아볼 법한 개별 이미지들은 그 욕망의 맥락을 편집당한다. 선택된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이 편성한 기호계의 주체성이 신체로 삼은 것들이고, 선택되지 않은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렇기에 이 일련의 수집된 이미지들은 작가 주체성이 가지는 비기표적 기호계의 부분이다.

인간 신체처럼 보이는 팔 그림들과 <소라>는 왜 생기 없는 토막으로 보이는가? 그리고 회화면 안에 구겨 넣어진 의복들은 관절을 가지고 움직이는 몸처럼 보이는가? 묘사의 대상들이 작가가 그린 이전 창작물들을 다시금 그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실제로는 살아있지 않은 대상들이 작가에 의해 회화면의 기호계에서 주체성의 신체로 인지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회화면에 신체로서 그려진 것들이 작가 주체성과 주체성이 형성한 비기표적 기호계의 한 영역이라는 것은 이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체성은 어떤 배치들로 형성되었을까? 분명 이 기호계는 현실을 차지하는 다양한 층위의 기호계들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역적 현실로 거대한 세계의 리얼리티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 회화의 기호계는 캔버스 밖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기호체계의 축약이 아니라, 작가 주체성이 사용하는 왜곡된 상징체계기 때문이다.



6-3.

곽노원 작가의 회화에서 현실 대상을 기호계에 편입하는 행위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화가에게 가장 익숙한 작업실의 풍경에서 신체화되기 가장 쉬운 것은 그림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림 도구들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세밀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반면 작업실 바깥의, 시선이 뻗어 나갈 수 있는 부분들은 각각 커튼과 넓은 캔버스, 그리고 여러 장의 종이들로 조금씩 차단된다. 기호계를 만들어내는 신체 일부(화구)가 회화면 내에서 재현됨과 동시에 그 바깥의 풍경들은 신체적 연장이 차단된다. 이 화면에서 작가의 손끝은 화구이고, 이때의 주체성은 화실 내에서만 잔존 가능하다. 위 작가들은 주체성 형성의 신체적 조건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이 회화들은 물질의 구체적 층위와 기호적 다이어그램보다는 기호화 과정의 윤곽을 제시한다.



7.

김혜원 작가, 노충현 작가, 그리고 손현선 작가는 회화라는 유서 깊은 매체를 사용하지만 오늘날의 기계적 감각과 기계적 기억 방식을 논하는 데에서 매우 유용한 그림/사진(picture)을 제시한다. 이 작업들의 재현 공간은 사진 매체의 재현 공간과 동일하다. 다름 아닌 이 회화가 사진의 표상 방식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이들 회화는 인화된 사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진 기계의 눈으로 본 세계를 그 방식으로 다시 그려낸다. 작가가 자신의 눈을 기계의 눈으로 대체하는 이유는 시각의 주체성이 기계의 신체와 우리의 생물학적 신체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체성의 과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기억의 이미지. 우리는 기억의 이미지 저장 기능을 우리의 측두엽 해마보다는 디지털 사진첩과 웹 클라우드에 이양했다. 이제 우리가 사진 기계의 눈으로 기억 이미지를 생산하기에, 사진 기계의 눈으로 포착된 세계는 정지된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욕망, 특히 스마트폰과 같은 물리적 디스플레이 자체에 축적된 욕망이 투영된 상을 결정한다. 우리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시각적 무의식이 결정한 ‘알맞은’ 장면이 지나갈 때이다. 앞서 논했듯, 우리의 무의식과 욕망은 각 인간 개체의 것이 아닌 기호자본주의의 무수한 기호계와 다이어그램의 내부 작용으로 생산된다. 무의식과 욕망을 말하고 저장하는 개체적 주체성, 즉 우리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물질적 흐름들의 과정에 언어적으로 그어진 경계이다.

따라서 위 작가들의 회화는 오늘날의 시각적 기억 방식 자체를 기호화한다. 정지된 상황과 상황을 기호화의 장으로 가두는 프레임. 이 회화들에서 약호화된 것들은 구체적인 층위의 욕망 기호들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계(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등)와 동기화된 감각과 기억 방식 자체이다. 최진욱, 함성주, 곽노원 작가의 경우와 같이 캔버스 자체를 주체성과 감각 과정의 알레고리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감각과 기억 이미지들은 기계 장치들에 예속된다.



8.

원근과 초점의 묘사 방식은 감각 문화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등 그림의 양식 변화는 문화의 변화와 동행한다. 앞서 내가 우리의 감각과 기억 이미지들이 기계 장치들에 예속되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양식은 우리 현실의 기호 층위와 동행한다.



8-1.

인물화는 주체성의 복합적 생성 과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인물이 걸치는 의복과 장신구는 계급과 계층의 조건들을, 인물이 위치한 공간은 당시 공적/사적 공간의 전형을….. 요구받는 계급/계층/젠더적 수행성은 인물의 얼굴과 자세를 통해 암시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규범의 기호이다. 인물화는 실제 인물뿐만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인물 전형을 포함한다. 오늘날 집단적 주체성의 전형은 무엇인가? 김민희 작가와 정수정 작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집단의 전형인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인물들의 자세와 그들을 담아내는 프레임이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여성 신체는 항상 젠더와 결합하여 규범으로서 논리화된다. 이렇게 취해진 신체의 자세들과 더불어 해당 신체와 함께 현실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물질은 구체적인 상징-도상으로 나타난다. 이 두 작가의 인물화는 현실이 꾸는 꿈의 이미지가 해체됨과 동시에 회화면에서 재조립되며 기술된다. 도상들과 붓 자국은 서로 다른 기호계에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몽타주로 하나의 회화면에 안착한다.



8-2.

풍경, 동물, 식물 등 ‘자연물’로 여겨지는 비기표적인 것들은 주체성이라는 언어 기계를 거치며 기표적 기호로 주조된다. 앞선 문장의 ‘자연’은 ‘문화’와 구분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상호 침투하는 생과 사의 물질적 조건 그 자체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자연은 도시-자연이고 유기체-기계이며 인간-비인간의 내파이다. 아래 작가들의 회화에서 등장하는 자연의 기본 구성체들은 장기나 세포가 아니라 그래픽 에셋과 게임의 물리 엔진들이다. (이재석 작가의 <구조(A to Z)>는 횡 스크롤 게임 또는 오픈 월드 게임에서 취하는 원근과 초점, 그리고 인터페이스를 회화면에 구성한다. 이것은 2020년대의 풍경화이다.) 자연은 인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항상 문화와 인공물들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져’ 왔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구성하는 방법은 적극적인 비기표적 기호계에 따른다. 예컨대, 생태적으로는 블록체인 거래가 만들어 내는 탄소와 그로 인한 온난화 가속, 인지적으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하이퍼 리얼의 창조일 것이다. 노상호 작가와 조효리 작가가 그려내는 화면은 폐쇄적이다. 그것이 풍경의 한 단면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프레임 안에서 생성적으로 구성된, 코딩된 디지털 정보의 인터페이스이다. 이것이 외부 풍경의 절단이 아닌 바깥 없는 폐쇄적 디지털 레이어라는 것은 얇게 덧발라진 레이어들과 텅 비어 버린 피사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레이어들이 강제로 겹쳐지고 접합되며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꽤 친숙해 보인다. 그것이 우리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9.

“배치와 분리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비인간적, 기술적, 비실체적 요소들에서 자기 자신을 제거한다. 이것은 순수한 추상에 불과하다.”[8]



[1]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생산』, 신병현 외 옮김(서울: 갈무리, 2017), 60.

[2] 기업가적 주체성, 피투자자로서의 주체성에 관한 설명은 아래 책을 참고할 수 있다.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금융 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 조민서 옮김(서울: 리시올, 2023).

[3] 같은 책, 92.

[4]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 임경규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2), 739. 해당 본문에서 역자는 “figuration”을 “비유”로 번역했지만 나는 이 글에서 “형상화”로 번역했다.

[5] 같은 책, 739-740.

[6] 개체와 개체화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아래 책 참조.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신병현 외 옮김(서울: 갈무리, 2017).

[7] Felix Guattari and Suely Rolnik, Micropolitiques (Paris: Les Empecheurs de penser en rond, 2007), 401. [펠릭스 가타리 외, 『미시정치: 가타리와 함께 하는 브라질 정치기행』, 윤수종 옮김(서울: 도서출판b, 2010).

[8]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생산』, 신병현 외 옮김(서울: 갈무리, 2017),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