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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오늘날 예술의 언어는 정치적 실천일 수 있을까? I- 상상과 책임에 관하여

 



윤태균 (독립 큐레이터)






1.

무력감이 팽배한 시기이다. 인종 청소와 전쟁으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함에도 국가 간의 이권 다툼 아래서 세계는 침묵하고, 착취와 빈곤은 선진자본주의에서의 계급 구조 재편으로 그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된다.



* 조건들

- 사이버네틱스 담론은 인간의 고유함을 해체하여 인간이 역사적으로 거주했던 ‘물질 이상’의 영역에서 끌어내렸다.

- 예술은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를 통과하며 가능한, 그리고 요구되는 정치적 실천의 양태를 재편했고 도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술적 편집 가능성의 시대는 다시 예술의 지위 재편을 요구한다.

-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과 페스티시(Pastiche)가 현대 미술의 일반적 방법론으로 수용되며 예술의 구조적 토대 가문화 일반의 방식에 가까워짐에도, 예술이 자율적일 수 있다는 믿음은 신비주의적 현상학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물론 이 글 또한 예술에 관한 형이상학적 메모이다.)2.

언론에서의 재현은 투자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며 사건은 이미지가 운반되는 플랫폼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한다. 재현 자체가 어떤 내밀한 정치적 구조를 담지하는 것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재현하고, 언어화한다. 생산된 이미지와 서사는 현실의 제도를 거쳐 감상자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의 제작부터 전시까지의 과정 내에 있는 실재적 요소를 망각할 수 없다. 예술의 직서성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동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술에 대한 비평과 분석은 번역 행위이지 형식을 문자로 환원하는 행위가 아니다. 예술 자체를 실재적 관계와 정치적 맥락 이전의 무균실에 격리하는 사유가 그 수많은 관계적 수행성을 사유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비평은 묘사와 번역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고고학적 물음들

- 초현실주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의 상징 언어 체계에서 틈을 발견해 파열했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는 공산주의와 어떤 언어적/정치적 연합을 맺었는가?

- 다다의 이미지 생산 방식을 생각해 보자.

- 개념 미술은 예술 행위의 물질적 토대와 관계 맺었기에 급진적이다. 그러나 개념 미술은 어떠한 연유로 갤러리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는가?

- 사운드의 경우, 그것이 사용하는 기술 자체가 정치적인가 혹은 그것이 운반하는 사운드의 구술성/지표성이 정치적인가?



3.

예술이 믿었고 실천하려 했던 고유한 정치적 실천은 실패한 것 혹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최첨단 기술이 운동하는 희망적 이미지와 저급한 이미지의 자극은, 그것들이 선진자본주의의 의도적 환상일지라도 예술보다 더 빠르고 넓게 파급한다.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예술 아닌 것들이 ‘예술 이상의 것’으로 보이는 현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

실천이란 무엇인가?



4-1.

예술은 대안적/사변적 기호 체계를 단단한 형식 언어로 공고히 할 수 있다. 기존 언어 체계를 비틀고 파열하여 상상의 틈을 정교하게 벌릴 수 있는 것이다. 이 환각은 전염될 수 있고, 기존의 언어를 부식시킬 수 있다. 이 프로메테우스주의적 태도는 예술가들이 가지는 예술에 대한 오래된 믿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의 언어는 철학, 과학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명제는 예술이라는 제도적 범주에 속한 노동자들이 견지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조건에서 실천을 고민할 때, 기존의 미술사가 선취한 방법론과 가능성을 참조할 수 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파열한 유럽의 가부장적 기호 체계를 생각해 보라. 세계의 공고한 기호 체계를 분석하고, 부조리한 가부장적 기호 연쇄의 취약한 틈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시효 지난 방법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달라진 세계에서 이들 재료와 형식은 분명히 현실과 어긋난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 미술사의 실천들에 대한 엄밀한 독해는 작업의 벡터를 서술할 때 도움이 된다. 해당 미술사의 현상이 등장한 배경과 당위, 그리고 성공과 실패는 참조하기에 적절한 역사이다. 어떤 담론, 어떤 매체와 분류, 어떤 집단과 접합하고 분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다.



4-2.

개별 예술 작품이 실천적일지라도, 그것이 기능하는 시스템은 예술의 정치성을 가속할 수 있는가? 혹은 보수적이거나 반동적인가? 개별 예술 작품이 만들어져 전시될 때가 예술 서사의 종착점은 아니다. 작업이 전시되는 제도, 작업이 판매되고 교환되는 시장 체제, 언어가 어떻게 기존의 담론, 감각과 충돌하는지 까지 개별 예술의 서사로 고려되어야 한다.



*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의 경우는?

선진자본주의의 기호 체계를 답습하여 예술을 상품이라는 물신으로 다루는 자들도 본인의 기업가적 주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 예술은 스스로가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내포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운동하는 벡터는 이들을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속도와 방향에 맞춘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실천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5.

영화 <오펜하이머>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탐색한다. 오펜하이머는 본인을 철저히 이론가로 정체화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어느 발명품보다 더 파괴적인 실천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오늘날까지도 거시적 정치 관계에서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끊임없는 책임에 시달린다. (비록 작중 오펜하이머는 세계의 파멸보다 자신의 파멸을 더 두려워했지만 말이다) 그의 이론이 ‘못된’ 정치인들에 의해 무기로 활용되었기 때문인가? 자신의 이론이 가졌던 비윤리적 잠재성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 이유는 이론이 실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을 나누는 기준은 수행성의 양태이다. 이론은 실천 이전의 무균실이 아니다. 여타의 모든 물질이 그렇듯, 이론은 정치적, 경제적 요소들 사이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론은 그 자체로 실천을 기다리는 순수한 잠재태로 규정되지 않고, 상관적인 요소들에 의해 그 수행성이 규정된다.





5-1.

모든 예술이 기성의 명문화된 이데올로기를 반대하고 공격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예술이 어떻게 예술 이상, 예술 이하의 언어 사이를 침투하여 (다양하고) 고유한 수행성을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자. 수행성은 운동량이나 힘의 강도로 정의되지 않고, 그 존재 방식으로 규정된다. 물질을 구성하는 쿼크(quark), 렙톤(lepton), 보손(boson)은 각자의 속성과 수행에 의해 규정되는 입자 분류이다. 입자는 스스로 정의되지 않고 그 입자의 수행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입자 물리학 표준 모형에 따르면, 전자기력, 중력, 강핵력과 약핵력은 각 입자의 수행 방식을 결정한다. 보손은 물질 입자 사이를 연결하며 입자들이 서로 간의 운동 변화 명령을 전달한다. 쿼크는 강핵력을 전달, 보손을 교환하고 쿼크로 구성된 양성자는 전자기력 입자인 광자를 전자와 교환한다. 쿼크는 핵에 갇히게 되고 전자는 전자기적 인력을 통해 핵에 달라붙어 원자를 만든다. 이러한 구조는 모든 물리적 물질의 기본적 형태이다. 즉 어떤 물질은 해당 장에서 입자가 어떤 힘의 규칙을 통해 관계 맺는 방식의 회집이다. 거대한 레고 조형물이 단순히 덩어리를 이루어 쓰러지지 않고 서 있기보다는 다종다양한 기능적 부품들로 스스로를 의미 있는 조형물로 지탱하듯 물질 또한 17개의 입자종과 그 입자를 만들어 내는 네 가지 힘(전자기력, 중력, 강핵력, 약핵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수행과 힘의 조건 이전 실체는 없다. 양자세계에서 벗어나, 물질 일반이 그렇듯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급진적이고 얼마나 파급력을 가지는지가 아닌, 어떤 자장(체제, 이데올로기, 제도)에서 인접한 요소들과 충돌하고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성, 수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천은 수행성에 내재한다.



*

- 전술핵과 예술은 각자 어떤 수행성을 가지는가?



6.

그렇다면 당신은, 실천의 가능성 이후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가?



7.

유토피아적 열망이 예술을 정치적 무력감에서 구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