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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문화 긴축의 시대, 대항적 지표 세우기

문화 긴축의 시대, 대항적 지표 세우기

 

윤태균

 

1.

예술이 체계를 갖고 생산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복합적 사회 자본이 필요하다. 창작과 향유를 교육할 수 있는 기관, 예술 활동 현황이 상호 교환되는 잡지, 소셜 미디어, 저널 등의 이미지 네트워크, 담론을 실어 나르는 학계, 문화 소비와 재생산의 조건이 되는 시장. 그러나 예술이 생산되는 물리적 조건은 여전히 공간이다. 공간은 문화예술 시스템의 주요한 인터페이스이다. 작업실과 스튜디오는 생산의 기지이며 전시 공간, 공연장, 서점은 개별 예술이 문화예술 네트워크에 기입되는 일차적 출력 지점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공간의 기능적 분류로는 오늘날 공간의 작동 방식을 규정하기 힘들다. 각 공간은 여러 역할이 중첩된 (혼종적 혹은 변종이 된) 거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run space)과 같은 공간은 작업실과 전시 공간의 역할을 동시에 행한다. 2010년대 중반에 생겨나 새롭게 명명되었던 ‘신생 공간’들도 학교를 졸업한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작업실-전시 공간이었다. 음악의 경우 공연장과 클럽은 대중음악 씬(scene) 네트워크의 중심이자 조건이다. 이처럼 공간의 역할이 고정되지 않고 그 영역을 넓히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 변종이 되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2.

문화예술계 또한 경제적 인플레이션을 거친다. 예술 교육 기관의 수용인원 증가와 문화 체험의 기회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정부는 이 문화적 인플레이션을 공공예산으로 충당하고 문화재단, 공영미술관과 공영 공연장 같은 기관의 설립을 통해 지탱해 왔다. 물론 정부의 지원은 문화예술의 자율적 진흥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하지 않았고, 문화예술이 가지는 경제적 효용성을 위했다. 예컨대 1970년대 서구 (미술)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던 단색조 회화, 한국 금융 시장의 거대한 축이 된 K-Pop은 국가 산업 정책의 큰 고려 요소가 되었다. 이후에도 문화예술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계는 정부에게 하나의 커다란 업종으로 여겨졌다. 이 정량적이고 통계적인 판단은 문화예술 전반이 정부의 예산 지원을 얻게 되는 계기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광풍과 더불어 금융 위기와 재정 감소는 정부가 문화예술을 더 세밀하게 분류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즉슨,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금융적 평가 지표로 판단되지 않는 세부 문화예술 현장은 국가적 지원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3.

긴축 정책의 실행으로 국가적 시장 진흥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분야의 지원은 철회되어 갔다. 그러나 50년 동안의 정부 예산 지원으로 발생한 문화 인플레이션은 예술 현장이 국가 예산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갑작스러운 예산 사용의 중단은 금단 증상을 야기했다. 과거 공공이 채웠던 예술 현장의 예산과 공공 공간이 사라지며 창작과 향유의 결핍이 발생한다. 하지만 정부가 해당 현장의 파행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스스로’ 살아남아 증명하라는 기업가적 주체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20~30대가 만든 신생 상업 갤러리들과 민간 공간에서 실행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현장의 생존을 위한 시도임과 동시에 기업가적 주체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4.

 주류가 아닌 개별 예술 현장은 사적 영역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적 영역이 공공과 독립적인 영역은 아니다. 사적 영역은 문화예술의 질과 양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공공 영역이 철수한 공허를 메우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예술 기반은 여전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며 비주류의 현장은 아직도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역에서는 생계를 위한 돈과 더불어 정체성 투쟁을 위한 시스템상의 상징 자본 획득이 불가능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공공 영역의 재확대 혹은 사적 영역의 자생력 확보가 아니다. 현재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 모두가 의존하는 신자유주의적 평가 지표를 폐기하고 새로운 평가 지표를 다시 써야 한다.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대안이 아닌 대항이 필요하다. 대안은 대항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개별 문화예술 현장이 지향하는 가치에 투자하고, 투기해야 한다.

 

5.

 그러나 예술인들이 기업가 주체가 되라는 주장은 아니다. 정부 예산의 집행에 참여하고 공공 공간을 적극적으로 점거해야 한다. 집단화와 연대는 이 대항에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상황은 민간과 공공의 영토 분쟁이 아닌 여전히 문화예술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효용성을 향한 투쟁이다. 무엇이 문화정치의 ‘더 적합한’ 기준이 될 것인가? 나는 민간과 공공의 팽팽한 연합, 치밀한 비평과 대항적 행동주의가 이 기준을 추출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