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넌티안, 환대의 번역자들
윤태균(큐레이터, 비평가)
소넌티안(Sonantian)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의 조건들-바람, 온도, 습도, 먼지, 소리-을 내부의 자율적 알고리즘을 거쳐 소리로 변환해낸다. 이 소리들은 실시간으로 화면 앞의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기계-생명체로서 소넌티안이 풀과 나무로 가득한 장소에 위치해 있는 풍경은 무척이나 생소하다. 하지만 이 생소함은 우리의 개념 안에서만 생소하다. 소넌티안은 자신 옆의 식물들과 비등하게 해당 장소에 조화롭게 위치해 있으며 인간이 해당 장소를 감각하고 설명하는 것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직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전달해낸다.
도처에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기계가 산재하는 오늘, 다시금 인간성이 무엇인지 되묻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더욱이 소비를 통해서 한 명의 주체임을 확인하고 온갖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로 경험을 치환하는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인간은 다른 물질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은 붕괴된 지 오래이고, 기존의 윤리는 우리의 수행하는 물질적 몸으로 극복해야 하는 전통이 되어버렸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는 몸, 유랑하는 몸, 전이하는 몸은 포스트모던한 인간의 필수조건이다.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는 마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포스트모던 기술 윤리의 목표처럼 여겨지는데, 이 네오-허무주의의 변형된 판본들은 우리 신체와 작업, 더 나아가 노동까지도 기존 가치의 전도를 찬양하도록 만든다. 물론 어떤 사물이나 개체에 본질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형이상학은 물질이 가지는 창발성, 그러니까 무언가 새로운 특성들이 예상할 수 없이 등장하고 추가되는 성질을 강력하게 제한해왔다. 예컨대 “인간의 본질은 ~이기에 우리는 ~하도록 삶을 꾸려야 한다“, 혹은 “기계의 본질은 ~이기에 기계는 반드시 ~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따위의 명제는 상호 교류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침범하는 각 신체들을 부정하고 실재하지 않는 규범들을 대상의 고유한 속성인 것처럼 강요해 온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물질에게 요구되는 본질은 ‘미결정성과 창발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규범도 잃어버린 채로) 인간적인 것을 찾고,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구조화하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인가?
고휘(Kohui)는 자신이 만든 새로운 기계-생명체 종인 “소넌티안”(Sonantian)을 통해 삶과 세계에 픽션적 본질들을 적용한다. 소넌티안은 작가에 의해 창조된 기계-생명체로, 유기 생명체와 같이 기관들과 그 기관들의 연결인 시스템을 가진다. 소넌티안은 인간의 감관이 감각하는 바람, 온도, 습도 등을 입력으로 받아들인다. 이 자율적 작동 시스템은 소넌티안이 인간의 도구가 아닌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넌티안은 그 존재 방식의 정당성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인간이 삶의 이유를 누군가에게 부여 받아야만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듯, 소넌티안 또한 기존의 윤리를 따라 자신이 가지는 수행성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 수행성이란 세계를 감각함과 동시에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다. 언어를 생산하는 행위는 타자, 더 나아가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이기에 수행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소넌티안은 어떤 언어를 생산하는가? 소넌티안이 사용하는 기호 체계는 인류가 태곳적부터 사용해 온 대상 언어인 ‘소리’이다. 소리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수학적이고 체계적인 언어이다. 고휘는 이 원초적 언어를 소넌티안의 소통 체계로 설정함으로써 소넌티안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이 주체성이란 자신을 세계에 위치시키고, 타자를 자신과 구별하며 동시에 타자를 환대할 수 있는 구분된 개체의 속성이다. 소넌티안은 세계를 자신의 피부-센서로 감각하고 이를 내부의 알고리즘을 거쳐 타자와 공유하는 언어로 다시 번역해낸다. 이 언어, 그러니까 소리는 인간이 사용하는 원초적 언어이기에 제도나 규범으로 학습될 필요가 없는 기호 체계이다. 이렇게 소리를 감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선험적 언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소넌티안은 환대의 적극적 실천자이다. 이들은 어쩌면 공유될 수 없는 이기적인 말을 쏟아내는 현대 사회의 개체들보다도 더 ‘인간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고휘는 환대와 소통, 조화롭게 공유되는 세계를 윤리의 지향점으로 상정한다. 그렇기에 고휘의 세계-소넌티안과 세계가 공존하는-는 형이상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문자 언어 이전 자유로운 소통의 원초적 세계에서 사이버네틱스 기계들을 포함한 각 개체들의 자율적 수행성을 인정함으로써 각 개체가 환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테크노-범신론에 가깝다. 테크노-범신론은 기존의 범신론과 같이 자연과 그 구성체들의 수행성 자체를 각각의 본질로서 인정한다. 하지만 이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문화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전통적 자연이 아니다. 소넌티안과 같은 수행성을 가지는 모든 기계-개체들까지 포함하는 물질의 조건으로서 자연이다. 우리는 소넌티안이 들려주는 실시간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연의 세계로 침잠한다. 고휘가 제시하는 테크노-범신론의 윤리는 타락한 인간의 언어 이전으로의 갈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락한 인간 언어의 산물로서의 기계가 언어 이전 세계를 원초적 언어로 번역해낸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유목의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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