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조각의 중력을 추적하기 위한 사변

*본 글은 일민미술관 프로그램 <IMA CRITICS 2023> 전시비평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음.

https://ilmin.org/ima_on/2023imacritics1/



윤태균



1.

감각의 수용 과정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항 구조는 최근 물질에 관한 담론에서 논외가 되었다. 더욱이 이항 사이 무수한 내부 작용에 관한 관심에 의해 이항 자체가 해체되고 있다. 언어로 규정된 이항 이전 물질적 하부구조는 항 간의 관계가 아닌 항 없이 매개된 (비) 연속적 물질들의 회집이다. 삶을 지탱하던 언어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예술과 언어에 관한 허무주의를 끌어내는 듯 보인다. 역사 서술 이래로 우리가 믿어왔던 것들이 인간 중심적 허위의 것, 진리가 아닌 것이라면 예술과 언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과 비평이 인간의 언어로 역사와 서사를 서술하는 행위라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무수한 예술은 실재를 구조화하는, 언제나 한발 늦은 작업인가? 하지만 예술과 언어는 무언가를 생산한다.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것들에 수행을 강요한다. 그것은 구체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감정의 동요일수도, 정치적 수행일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 예술가와 비평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감각과 삶의 물질적 조건을 적어내고 이후에 가능한 실천적 수행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수행은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윤리의 안내를 따른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유물론과 실재론적 철학이 지금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에 시급한 실천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어떤 현상의 물질적 조건을 파악할 방법은, 물질의 수행을 단위화하고 기호화하는 것이다. 어떤 기호가 어떤 단위로 작용하는지 그 역학관계를 서술해야 한다. 예컨대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암호화폐 열풍의 조건은 기술 발명으로 인한 플랫폼 인터페이스의 흥행과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업가적 주체성이다. 그렇다면 플랫폼 구축 기술의 발전 과정에 금융자본주의는 어떻게 개입했으며 금융자본주의의 가속에 플랫폼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기여했는가? 기업은 탈세를 위해 암호화폐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의회는 암호 화폐를 어떤 방식으로 규제하는가? 또 다른 예로, 최근의 조각에 관한 미술계의 관심에 관해 언급해 볼 수 있다. 디지털 디바이스에 나타나는 빈곤한 이미지들은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고, 오히려 납작하던 디지털 디바이스의 화면은 아날로그 공간 안에 직립하여 입체의 구조물을 만들게 되었다. 광고와 건축은 이 흐름에 편승해 우뚝 선 패널들에 이미지를 투영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조각은 이미지가 아날로그 공간에 들어서는 것을 조형적으로 해석한다. 더불어 오늘날 미술 형식을 미술사의 첨단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조각에 관한 관심의 기저에 있음을 추론할 수도 있다.



3.

직전의 예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각은 시공간을 전제한다. 이 시공간은 감상자가 조각을 경험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는 물리적 구획이다. 그리고 장소는 이 시공간에서 수행되는 총체적 경험의 장이다. 조각적 시공간은 감상을 가능케 하는 조각의 감각적, 조형적 공간이고, 장소성은 구체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장의 성격이다. 조각은 자신의 조형으로 시공간에서 ‘가능한 경험’을 주조하고, 이 시공간에서 ‘가능한 경험’의 지리학적 총체가 장소이다. 따라서 시공간과 장소성은 이전/이후 혹은 물질/언어의 구분으로 나뉘지 않고, 원래 하나이다. 시공간과 장소의 구분은 단지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위한 구획일 따름이다.



4.

감각 기호의 완전한 규명(혹은 규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믿음 자체)은 미적인 경험 자체를 무력화한다. 완전한 투명함은 감각의 긴장과 차이로 인한 다름의 감각을 불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조각의 신체는 우리의 신체와 다르게 인지되기에, 이 두 신체의 만남은 새로운 경험을 열어젖힌다. 두 신체 사이의 복합적 공간이 바로 이 다름의 조건을 생성한다. 조각은 경험적 장소의 시공간에서 중력으로 작동한다. 조각의 중력은 마주친 신체를 자신의 중력장으로 굴러들어 오도록 한다. 이는 각 조각이 가지는 수행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주침의 경로에서 수많은 객체의 중력을 지나 가장 강력한 중력에 도달하는데, 그렇기에 우리의 인식 대상의 종착지가 항상 조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나는 중력장은 작품의 규모일 수도, 작품의 특이한 형태일 수도, 작품의 화폐적 가치일 수도, 작가마저 신경 쓰지 않았던 조각의 작은 부분일 수도, 작품이 촉발하는 우리의 내밀한 기억일 수도 있다. 이처럼 경험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여러 중력장을 통과하며 그려지는 연속적 궤적이다.



4-1.

중력의 강도는 시공간의 곡률이다.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객체-신체들은 절대적 물질의 존재감이 아닌 상대적 시공간의 곡률이다. 요컨대, 조각적 시공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선험적 인지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항상 왜곡된 좌표계에 속해 시공간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감상자가 운동하도록 촉발하는 중력이 조각이고, 그 사건의 궤적 내에서 이렇게 유동하는 시공간은 비로소 장소가 된다. 장소성은 운동과 수행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다양한 수행적 중력- 정치와 경제부터 미시적 삶까지를 고려해야 한다. 조각적 공간은 마주침에 의해 비로소 장소성을 갖게 되는데, 우리는 감상자와 조각 사이의 순수해 보이는 만남 아래, 즉 경험의 조건에 복잡한 물질적 하부구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소는 다양한 기호적 층위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우리가 몸으로 감각하고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이다.



4-2.

장소의 구체화 과정에는 감상자의 주체성과 조각이 위치한 곡률의 경로가 개입한다. 예컨대 우리가 미술관에서 어떤 조각을 볼 때, 이 장(field)에서의 감상에 구체적인 중력이 작용한다. 집에서 미술관에 도달하기까지 마주했던 도시 풍경들, 미술관에 투입된 자본과 미술관 인테리어에서 드러나는 투자자의 취향, 작품 재료의 질감에서 유추할 수 있는 재료 가격, 작가의 유명세, 그리고 감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인 작품의 미적인 조형성까지.

일반적으로 조각 감상의 장소에서 가장 강력한 중력은 미술관의 성격이다. 견고한 미술관의 벽은 조각을 바라보는 태도를 어떤 방식으로든 강요한다. 가끔 너무나도 강력한 미술관의 중력은 예술 작품을 자신의 위성 궤도로 편입시킨다. 예를 들어 로댕과 브랑쿠시에 의해 주조된 이 모더니즘이라는 중력은 경험의 방향이 자신 주위를 공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전 세계를 영토화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포스트모더니즘)는 미술관까지 자신의 연결된 금융-문화 네트워크로 개화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자본주의의 기호는 증식하고 침투하여 모든 경험의 경로를 구부러지고 뒤틀리게 했다. ‘동시대 미술관’이라 불릴 수 있는 여러 공간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개화된 미술관이 우리 경험의 토대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 고민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동시대 미술관’에서 미술관-조각-감상자라는 순수한 경험은 불가능할 것이다. 무수한 담론과 사회의 정치적 요소들이 경험의 궤도를 왜곡한다.







5.

회화와 조각의 차이는 스크린의 차이이다. 스크린은 예술작품의 물질적 매체와 감각적 조형 그 자체로서, 감상자를 작품이 위치한 실재적 층위로 매개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수많은 층위가 가지는 정보-확률의 해일을 막는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회화 매체와 조각 매체의 기호적 성질, 물질성을 동시에 사고해야 한다. 평면과 입체, 납작함과 부피감의 구분을 넘어 회화 매체와 조각 매체가 각각 매개할 수 있는 현실과 차단하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조형의 문법적 차이이다. 이들은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조형하여 내용을 매개하거나, 혹은 가능할 수 있었던 내용을 차단한다. 그렇다면 조각은 어떤 내용을 매개할 수 있을까? 평면 매체를 사용하는 회화와는 다르게 입체를 강조했던 조각 장르의 중력장은 서서히 다른 은하계로 이동한다. 매체 형식의 경계가 뚜렷했던 과거와는 달리 조각은 입체라는 형식 논리에 치중하지 않는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는 평면과 입체로 결정되지 않는다. 20세기 미술사의 무수하고 복잡한 흐름을 거쳐 예술은 시공간에 가능성을 부여하여 장소로 만드는 행위 그 자체가 되었다. 더욱이 LED 패널 등과 같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물질적 조건인 피상성이라는 파괴적 성격이 인간의 생리적 감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며 예술은 이미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 회화와 조각, 설치는 서로를 서로의 위성으로 삼지만, 그 계의 항성은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이미지의 피상성이다. 오늘날의 조각은 이처럼 전혀 다른 은하계에서,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경계 지어져 ‘조각’으로 정의되려 한다. 그리고 새롭게 정의된 조각의 형식이 유효할 수 있는 이유는, 오늘날 현실의 기호들을 적출하여 보여주는 장소성을 주조하기 때문이다.



6.

어쩌면 우리 시대의 블랙홀을 발견할 수도 있다.



7.

그러나 지금까지의 서술들이 언어와 물질을 분리하거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형식 없는 내용 분석, 내용 없는 형식 분석은 내용과 형식 둘 중 하나를 특권화한다. 또한 형식에서 내용을, 내용에서 형식을 연역해 내려는 시도 또한 아니다. 모든 형식에는 내용이 있고, 모든 내용에는 형식이 있다. 마찬가지로 언어가 형식과 내용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물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