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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매체(Medium)의 이종발생(XenoGenesis): 박창서의 개념-형식 논리

*본 글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전속작가제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음.

 

윤태균

1.

 역사의 종언을 쉬이 선언할 수 있는 오늘날에, 역사화란 어떤 실천인가? 도대체 가능한 것이기는 한가? 미술사는 잔해인가 기원인가? 오늘날 미술이 미술로 호명(interpellation)되는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의 역사를 참조하고 복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미술은 미술사의 끝자락에 자신을 계속해서 박아 넣음으로써 스스로가 미술로 호명될 수 있도록 한다. 적어도 이전까지, ‘새로운’ 미술은 기존의 미술사에 부합하거나, 반대하거나, 그 과정을 통해 합일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변증법은 역사의 공리이다. 역사는 이성의 언어적 구조화로 작성된 지도이다. 전승으로서 기억의 축적, 그리고 기억의 소실로서 망각. 이 두 극단을 값으로 가지는 함수는 역사의 벡터를 결정한다. 고대의 터에서 발견되는 파피루스와 양피지, 아카데미와 인쇄, 자본의 잉여와 인터넷 통신망에 떠도는 데이터는 축적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 제노사이드(genocide), 착취와 지배는 망각이다. 그렇다면 역사화란 무엇을 축적하고 무엇을 망각할지 저울질하고, 이 사고실험을 서사로 짜맞추는 과정일 것이다.

 20세기의 중반까지의 미술사는 자신이 축적해야 할 값을 ‘매체(medium)’으로 결정했다. 계속되는 매체의 갱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역사의 변증법적 함수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매체의 심원한 본질을 구하려 했다. 모더니즘이 그 정반합의 과정이다. 매체는 어디로 수렴하는가를 정의하는 일은 역사가 모더니스트에게 쥐여준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끝없는 미분은 역사에 자신을 박아 넣으려는 자들에게 어느 순간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전지구적 전시 상황과 경제 공황은 인류가 가지는 정신 에너지의 심각한 소진을 야기했다. 매체의 갱신 행렬 끝에 도달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버거워 질 때쯤 미분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편집증은 역사 서술가들을 함수 자체를 다시 쓰도록 이끌었다. 전후의 미술사는 매체를 망각의 대상으로 정했다. 축적이 임계에 다다라 기억의 축적과 망각이라는 두 항이 뒤바뀌었다. 편집증은 정신 분열로 전환되었다. 순수성을 지키던 매체는 산업 공정과 키치, 그리고 ‘예술 아닌 것들’에 감염되어 다수의 자아로 분열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파편화와 해체를 긍정적으로 재현해냈다. 당연히 매체 또한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매체 자체는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에 의해 두 조각으로 찢겨졌다. 매체가 강요당한 근친교배와 순수성은 강력한 트라우마가 되었고, 곧 형식과 개념으로의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나누어진 형식과 개념은 감염된 매체로서 각각의 위상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개념은 형식이 스스로를 고양하여 도달해야 할 목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그노시스주의(Gnosticism)는 오히려 형식과 개념의 이원론적 분열을 견고하게 만든다. 이 언어 구조에서 형식과 개념은 각각 이종발생(Xenogenesis)하여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개념과 형식은 ‘설치 미술’, ‘대지 미술’, ‘제도 비판 미술’, ‘개념 미술’에서 각각 어떻게 전유되는가? 결국 바로 매체가 이 다양한 미술 (혹은 미술 아닌 어떤 것들)의 파편을 만들어낸, 그들의 원부(原父)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체라는 개념의 운명이 연대기적으로는 그 자체로 문제적 후유증(설치미술이라는 국제적 현상)을 결과적으로 낳았던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제도 비평, 장소 특정성)의 부상에 속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직 ‘매체’라는 단어만이 일련의 이러한 사태를 이끈 것처럼 여겨졌다.”[1]

 

 미술 작품의 감상 경험에서, 가장 강력한 중력은 (제도를 포함한) 미술사이다. 앞서 역설했듯, 이 둘은 미술이 미술로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언어적 조건이자 당위이다. 역사에 침투하여 그 조직을 다시 현재로 가져오는 자들. 이들에 의해 과거 미술사의 조직은 현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재독해된다. 할 포스터(Hal Poster)는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 하는가?」에서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 다니엘 뷔렌(Daniel Buren), 마이클 에셔(Michael Asher)와 한스 하케(Hans Haacke) 등으로 대표되는 1950~19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가 기존 미술사의 해체에 실패한 시도가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그러니까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급진적 수행성의 재독해이자 재지도화라 말한다.[2] 과거의 미술사를 망각의 무저갱에서 꺼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것을 되살릴 수는 없다. 그 생동적 수행성은 시간에 의해 분해되었지만, 그 개념과 형식은 오늘날을 유령처럼 떠돈다.

 

2.

 자본주의와 금융, 기후 위기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사태를 다루기 위해 인류는 자신들의 정신 에너지를 모두 소진했다. 비판 이론과 비평은 부재하며 이론은 아카데미에 감금되었다. 실재는 박동하며 질주하지만 사유는 역사를 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동시대적 시간성은 고립된 현재이다. 그러나 폐쇄적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비밀스런 강령술은 동시대 시간성의 확장을 위해 그 경계에 작은 틈을 벌린다. 이는 과거의 도래와 미래의 귀환을 가능케 한다. 박창서는 미술사의 그 소환자(summoner)로서, 오늘날 흩어진 과거, 현재, 미래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다이어그램으로 배치한다. 이 다이어그램은 언어, 특히 구술과 문자가 갖는 형식과 기호성에 빙의한다. 뒤섞인 시간선의 다이어그램. 박창서는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의 말을 붙잡는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2017)에서, 그는 큰 사각형의 스펀지 여러 개에 과거 작가들의 말을 기록했다. 스펀지 위에는 개념만이 남아 문자가 아닌 공허한 구술만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 기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펀지에 스미고 변색되어 자신의 물질적인 형식을 주장한다. 또한 <5607250>(2022)에서 박창서는 로만 오팔카(Roman Opalka)가 마지막으로 남긴 숫자 ‘5607249’에 ‘1’을 더하여 네온 사인으로 거치한다. 그가 모호한 과거가 아닌 이미 정교히 언어화된 미술사를 다시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멸종한 개념 미술의 역사의 끝에 오늘날의 작업을 직접적으로 더하려는 노력은, 공룡과 닭의 가족 유사성을 찾는 것만큼의 시공간적 간극을 수반하지 않는가? 그러나 박창서의 작업은 과거 미술사의 개념을 형식으로, 형식을 개념으로 삼는다. 이러한 약호 전환은 과거 미술사에서 분리되었던 개념과 형식의 호환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념 미술이 경계지었던 개념과 형식을 전치시킨 것만이 아니다. 미술사와 그 미술사의 개념과 형식은 박창서가 자신의 일관된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고유한 논리의 재료이다. 개념의 형식화와 형식의 개념화. 이것이 박창서가 추론한 역사적 개념 미술의 진행 방향이었다. 과거의 작가들이 언어와 문자를 개념적으로 사용한 방식은, 그것이 역사가 되어 박창서에게 형식으로 전유되고 개념을 위해 최소화했던 형식은 박창서가 자신의 작품을 미술사 위에 서있게 할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 박창서의 위 두 작업에서 문자, 비석, 예배당 등의 다양한 문화적 기호가 사용된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라.

 

 

 개념 미술은 ‘매체’를 갱신하기 위해 매체를 개념과 형식으로 해체했는데, 다른 방식으로 다시 조립하지 못했다. 박창서는 이 시도의 급진성, 그러니까 비평가나 도슨트가 아닌 작업 스스로가 ‘매체임’을 선언할 수 있는 능동적 수행성을 독해한다. 역사적 개념 미술은 미래에 재독해되고 재전유되면서 비로소 구원의 여지를 갖는다. 따라서 박창서의 작업은 개념 미술의 새로운 역사 구축보다는 고고학의 역진적 분석을 행한다. 무덤, 남겨진 글귀, 시간적 암시를 파헤침으로써. 다시 포스터를 참조하자면, 어떤 사건을 언어화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사건의 사후(Nachträglichkeit)이다. 사건의 언어화는 지연되고, 그것을 다시 약호화할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등재된다. 어떤 사건을 역사화, 언어화하고 해석적 실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재구성된 과거들과 예상된 미래들을 복합적으로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박창서는 개념 미술가들이 매체를 해체함으로써 구축하고자 했던 그 ‘매체성’을 독해하여 일관된 방법론으로 삼는다. 크라우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미학적 일관성을 위한 기반으로서 특정한 매체를 연장하려는 일의 절대적 당위성을 주장하는…(중략)… 작가들은 이 각각의 토대를 통해 그것에 고유한 ‘규칙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나아가 매체 특정성의 재귀적 자명성을 위한 기반이 된다. 만약 이 작가들이 자신들의 매체를 ‘창안’하고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매체가 예술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지에 대한 현대미술의 망각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3]

 

 또한 박창서의 회화 시리즈<당신의 기억으로부터>(2020~)는 문자와 평면적 그림을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다층적 레이어를 통해 미학적 경험의 시간적 단면을 그대로 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미학적 경험은 ‘순수하거나’ ‘고유한’ 고정된 경험이 아니다. 매 번 다르게 감각되는 감염된 경험이다. <당신의 기억으로부터>의 객체성은 각 작품에 쓰여 있는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에 있지 않다. 결정되지 않은 의미의 환기 자체가 박창서의 회화를 기능화한다. 같은 내재성의 평면. 이 회화가 보유하는 그림, 문자의 통사적 조합은 결론을 말하는 명제가 아닌, 관측에 의해 고정되는 정보의 입자의 무작위적 ‘구름’이다. 여기서 문자는 의미가 충만한 강도(intensity)이기도 하지만 의미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회화에서 구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기도 하다. 개념과 형식의 상징인 문자와 그림을 동질화하여 경계 없음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 회화 시리즈는  박창서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을 때 마주했던 생소한 언어와 문자의 외상적 기억, 그 내밀한 트리거(trigger)로 조립되었다. 그러나 외상은 징후로만 드러날 뿐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이 회화가 작가의 과거 기억을 징후적 방법으로 축적한 기록이라면, 이 이미지 기록은 누군가의 다른 외상적 기억을 꺼내올 수 있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창서의 회화는, 인식적으로는 언어 과정 자체의 구상적(혹은 상징적) 재현이자 감각적으로는 재현적이지 않은 추상이다. 예술가들에게는 불쾌하고 자존심 상하지만, 예술의 도구화와 정치화를 통한 재지도화는 오히려 주체-객체라는 따분한 루프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한다. 외부의 경험을 감염시켜 의미의 영속성을 탈피하기. 박창서의 문자-그림의 객체성은 관측될 때마다 새로운 시간선을 만들어 낸다.

 

 

 

“현대적 재현의 구조는 우리의 인식을 고정되고 침투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이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상호 연결된 일련의 개념적, 감각적 틀의 산물이다. 인간의 감각기관과 그것이 존재하는 거대한 행성 미디어 네트워크, 그리고 이 둘이 속해 있는 더 넓은 우주는 서로의 작은 지류에 불과하다.”[4]

 

3.

 박창서가 전유하는 개념과 형식의 논리적 조합은, 개념 미술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매체로 사용될 수 있다. 그가 비석과 예배당이라는 죽음의 상징을 사용한 바와 같이, 그는 과거의 미술사를 애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시도를 지속한다. 박창서는 개념과 형식, 말과 문자의 관계를 고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 또한, 시간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 역사화되어, 미래의 인식에 의해 엄밀하게 독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독해됨으로써, 오늘날의 사건 또한 사후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박창서는, 미래에 읽힐 자신의 비석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 무언가는 자신이 자신임을 가능케 하는, 자신의 작업이 매체임을 가능케 하는 일관성일 것이다.

 

 


[1] 로잘린드 크라우스, 『언더 블루 컵』, 최종철 역, (서울: 현실문화, 2023), 10.

[2] 할 포스터. 이영욱 외 역.「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 하는가?」. 『실재의 귀환』. (부산: 경성대학교출판부. 2003).

[3] 크라우스, 41-42.

[4] Robin Mackay et al ed, Speculative Aesthetics (London: Urbanomic, 201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