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2025 당진문화재단 '이 시대의 작가전' 김영식 개인전 《검은 오류》 도록에 실린 글.
윤태균
1.
오늘날 별개의 분과로 여겨지는 두 문화, 기술적 문화와 심미적 문화는 본래 하나의 실천 영역에 속해 있었다. ‘테크네’(τέχνη, tékhnē)는 인류가 세계와 관계 맺는 이 창조적 실천의 영역을 총칭한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완강한 언어 구조, 즉 서구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 신화, 전설, 가부장제, 젠더, 자본주의의 존속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이 하나의 사유를 여러 갈래로 분리해 냈다. 과학, 수학, 공학은 경험주의적 기구를 통해 자본 창출의 수단이 되었고 예술, 공예, 장식은 신화의 영역에 잔존하며 자본 탕진의 수단이 되었다. 반 세기 전부터 이 두 문화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두 영역에서 동시에 시도되었지만 실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강제적 분리 이후에도 두 분과가 공유하는 순수한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세계를 어떤 질서로 환원할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테크네의 제일 목표로서 기본 단위를 찾아내는 일은 여전히 실천의 두 종파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무엇인가? 개념의 기본 단위는 무엇인가? 언어의 기본 단위는 무엇인가?
김영식의 짧지 않은 휴식 후에 새로이 제작된 일련의 3D 프린트 작업들은 이러한 탐구를 위한 사고실험에 가깝다. 사적 개념미술의 실패와 형식주의의 재림 이후 조각 작업은 다시 강도 높은 육체적 수행을 요구한다. 제도가 승인하는 ‘완성도 있는’ 조각의 상태는 작업실에서의 실험적 검증으로 성취된다. 김영식의 신체는 조각-노동을 수행하기 적합하지 않은 상태로, 사고실험은 이러한 수행 주체의 현재 상태에 의해 채택된 방법론이다. 그의 사고실험이 도달한 지점은 모던한 형이상학이다. 한편, 유물론과 과학철학의 전방위적 대두,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이미지의 급가속은 본질이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테제를 더욱 빠르게 강화했다. 이러한 맥락을 비추어 보았을 때, 김영식의 사고실험은 지극히 모던한 (혹은 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 형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큐브-모듈은 형태-개념의 환원 지점을 찾을 수 있다는 고전적 의지의 상징적 환유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전적 의지는, 동시대의 맥락에 배치됨으로써 어긋난 시간성을 갖는다. 구상과 조형에 디지털 작업이 동원되었다는 점이 이 어긋남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 시대적, 물질적 이질성을 사변적으로 접합하면 창조적 독해가 가능해진다. 이 역학적 접촉의 장에서, 고전적 미학과 동시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공유할 수 있는 자기력은 ‘정보’이다. 감각과 수용 이전의 단계로서, 정보는 물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이다. 또한 정보는 문자, 모국어, 이미지 등 지지체 없는, 바벨탑(Tower of Babel) 이전 순수언어의 상태이기도 하다. 20세기 개념미술의 실패 이후, 여전히 우리는 조형을 ‘개념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까? 김영식은 정보라는 기본 단위로 작동하는 디지털 끌개를 통해 물질을 재현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의 분리 이전을 번역한다. 람보르기니, 인간과 동물의 몸, 의자와 같이 김영식이 재현한 물질에서 객체에 달라붙은 외부의 언어는 의도적으로 탈각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복합적 의미로 점철된 사물에서 본질을 제외한 것이 아니다. 김영식 또한 본질을 추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각가의 새로운 디지털 끌개로 작업한, 재현 이전 객체의 재현이다. 정보의 추출이 아니라 정보의 구축이다. 따라서 김영식의 3D 프린트 플라스틱 모듈(module) 덩어리에는 고정된 의미 혹은 내용이 부재한다. 정보의 재현으로서 조형은 관객의 관측 시점에, 관객의 언어에 의해 오염됨으로써 비로소 안정된 물질과 사유로 고정된다. 형식과 개념으로서 내용을 정보라는 환원점으로 사유한다면 언어와 (물적) 세계라는 이질적 영역이 비로소 화해된다. 기억해야 할 명제는 하나이다. 정보는 결코 하나의 결과로 이행되지 않는다. 불확실성은 모든 정보의 기본 속성이다.
2.
전시 공간이 외부와 차단되는 방식은 다소 결벽증적으로 감각된다. 입구는 거대한 흰 가벽에 가로막혀 내부와 외부의 시선 교환을 차단한다. 지극히 모던한 (혹은 고전적인) 흰 좌대와 직선적 배치는 이러한 폐쇄적 구성을 강조한다. 이 현실과 괴리된 공간에서 정치는 망각되고 경험은 초기화된다. 이러한 반정치적 결벽증은, 김영식의 조각이 모더니즘으로 향하기 위한 반동적 벡터(Vector)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정보를 추출하기 위한 통제 실험을 위해 마련된 연극적 연출을 위해 공간에 부여된 역할이다.[1]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동시대의 조각가는 자신의 조형이 증강 현실로 작동하길 바라는가 혹은 미술사의 역사적 변종으로 작동하길 바라는가? 전자나 후자 모두, 환원으로의 집착으로 전시장을 실험을 위한 무균실로 만든다. 김영식의 이 전시 공간이 적절한 예시이다. 지저분한 물질과 언어가 외부와 교환되지 못하는 닫힌계(closed system)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실험에서 닫힌계는 가능한가? 예술은 그 무엇보다 현실과 깊이 관계하는 것 아닌가? 예술이라는 분과 자체가 감각과 사유로 수도 없이 더럽혀진 진창에서 기어 나온 것이 아닌가? 앞선 논의가 무색하게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음모를 의심할 수 있다. 정보라는 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그 또한 우리가 언어로 주조해낸 우상이 아닌가?
적어도 글의 형식을 취하는 비평이라는 비실증적 실험으로는 이 음모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면, 예술에 제기된 그 음모를 해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가설은 예술의 가정과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효과, 즉 현실과 예술이 차단되었다는 설정 자체가 조형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보는 예술에 대한 인식적 이해 이전에 있는 모든 가능성이다. 감각은 이 중첩 상태를 특정한 사유의 벡터로 조정한다. 김영식의 정보는 좌대 위에 놓인 개별 조각 개체마다 부여되는 것이 아닌, 닫힌계로 연출된 전시장 전반에 관한 것이다. 작업은 전시장 내에 놓인 개별 조각이 아니라, 현실에 놓인 미술관 그 자체이다.
흰 벽을 등지고 서 있는 김영식의 검은 의자는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의자를 떠올리게 한다.[2] 그러나 코수스의 의자는 재현-형식-개념이라는 세 영역을 변증법적으로 합일하지만, 김영식의 의자는 고정된 개념이 탈각되어 불안정한 중첩 상태에 가깝다. 검은 의자 주위에 흩어진 3D 프린트 과정에서의 필라멘트 찌꺼기들은 정보라는 최초 단위의 달성을 위한 거름의 흔적이다. 코수스가 실행한 이미지-언어의 평준화와는 달리, 김영식의 실행은 환원이다. 즉, 김영식이 재현한 의자라는 정보는 잠재성과 내재성의 잠재태이다. 존재하지 않는 근원을 사변하기. 그리고 앞서 논의했듯, 이 잠재태는 전시장 안과 밖의 밀도 차이에 의해 실현된다. 정보로의 접근을 통해, 관객의 경험에는 정보라는 객체의 상상된 근원이 새겨진다. 김영식이 재현한 이미지는 인식에 가상의 자국을 새김으로서 수행성을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내용에 부여되었던 권위는 정보로 이양되었다. 정보는 개념과 다르다. 개념과 조형 모두 그 환원점은 정보이다. 컴퓨터, 신경계, 뇌와 CPU, 그리고 모니터와 망막의 통화로서, 정보는 오늘날 세계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모더니즘의 재독해는 여전히 감각의 계보에서 유효하다. 오늘날 세계의 증가하는 앤트로피에서 예술은 부엔트로피의 역할을 행하는가? 세계라는 혼돈계에서 예술은 로렌스 방정식(Lorenz equation)이 될 수 있는가?[3] 예술가 개개의 실천에서는 도출할 수 없는 이 질문에, 김영식은 또 하나의 인덱스를 남긴다. 모더니즘–근대성은 여전히 유령으로 떠돈다. 김영식의 시대적 이질성은 단일한 현재에 놓임으로써 단일한 벡터를 가지는 현재성을 교란한다.
[1] 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가지는 수학적 개념으로, 위치, 속도, 힘과 같은 물리량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수학적으로는 (x, y) 또는 (x, y, z) 형태로 표현하며, 그래프에서는 화살표로 나타내어 길이는 크기를, 방향은 운동 방향을 의미한다.
[2] 조셉 코수스,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 1995.
[3] 로렌츠 방정식은 대류 현상을 설명하는 비선형 미분 방정식으로, 혼돈 이론과 나비 효과의 대표적 사례이며, 작은 초기 조건 변화가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하는 혼돈 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복잡한 시스템에서도 일정한 패턴이 존재함을 밝힘으로써, 혼돈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기준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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