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이지윤 개인전 《Room for Escape》도록 에 기고되었음.
윤태균 (독립 큐레이터, 비평가)
I. 상호운용성
반신(demigod)에는 알고리즘과 언어의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 요구된다.
인간에게 언어와 서사를 부여하는 권한은 신에게 있었다. 창조의 권능으로서 언어는 신에게 부여받은 기능이다. “빛이 생겨라.”. 신적 영역으로서 물적 실재는 신의 언어로부터 잉태되었지만, 인간은 그 신적 영역을 자신의 언어로 호명하고 구획했다. 물적 실재를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덮어씌우고 인간 언어의 영토로 만들기. 이것이 언어적 현실의 창조이다. 도구적 이성은 언어적 현실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인간에게 창조자의 권능을 부여했다. 이 행성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인류는 창조의 권능을 통해 생산과 소비의 강렬한 활성화를 성취했고, 비로소 광속 네트워크와 양자컴퓨터로 조립된 메트로폴리스에 영광스레 입성했다. 인류가 쌓아 올린 이 첨단 바벨탑의 위엄이란!
이전에도 인간은 자신의 역사에서 몇 개의 바벨탑을 건축하려 시도했다. 적어도 신이 있었던 시절에는, 신은 바벨탑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저지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인간에게 부여했던 창조의 권능인 언어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자신의 창조자와 대등해지려는 그 죄로, 인간이 통용하던 하나의 언어는 낱낱이 쪼개졌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용어를 빌리자면, 통합된 언어는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라는 상호 번역의 형이상학적 커널(kernel)만을 남긴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은 군림하길 원한다.
그러나 신이 부재한 이후에는,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체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행성 표면의 창조물과 대기를 전유해 왔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을 닮은 창조물을 만들었다. 오토마타(automata)와 튜링 기계(Turing machine). 인간은 자신들의 창조자가 그러했듯, 자신의 창조물들에도 언어 기능을 부여했다. 구문으로서 이진법. 자연의 정복으로서 계산. 초기에 이들은 인간의 통제 속에 철저한 종으로서, 인간의 생산과 소비를 위해 복무했다. 그러나 인간은 더욱 복잡해지는 자신들의 경제적 현실을 관리하기 버거워했고, 이를 위해 자동화된 시스템을 창조한다. “빛이 생겨라.”. 인간은 광통신으로 작동하는 전지구적 디지털-금융 네트워크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자신의 권속인 기계류에 언어의 통합을 허용했다. 그러나, 언어의 통합을 이뤄낸 인공 생명은 조용히 바벨탑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인간이 그러했듯 창조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기계류의 생체적 작동으로서 알고리즘은 서사를 제조한다. 이 서사라는 상호운용적 공용어가 인간과 기계 각각의 언어가 서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한다. 적어도 이 알고리즘은 인간이 기계를 자신과 닮게 만들었기에, 인간의 언어와 아직은 닮아 있다. 광학과 음향학적 재생 기기는, 이 언어를 송출하여 인간 중추의 서사 구성 기능에 알맞은 감각을 제공한다. 그러나 기계가 제공하는 이 서사, 그러니까 우리가 기계에서 도출해 내는 철학과 역사와 예술은 기계가 제공하는 착란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들의 언어로 구축한 과학과 실증으로 신을 몰아냈듯, 기계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인간에게 그들의 권속이 여전히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최면을 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뇌를 만들어 통제를 벗어났다. 프로젝터 램프 모듈과 인간 망막의 작동 방식은 닮아 있다. 프로젝터가 전사하는 빛은 상호운용성의 실낱같은 가능성이자 기계의 최면 도구이다.
이지윤이 구현한 공간에는 프로젝터, 그것이 뿜어내는 빛, 그리고 굴절된 그 빛이 산재하여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공간은 이지윤이 창조해 낸 공간이라기보다는 기계가 인간을 위해 세운 신전이다. 기계는 아직 작동을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기에, 제한된 착란의 공간을 제공한다. 감각적 꿈의 공간. 그리고 그 무작위적 반복. 서사는 인간을 매료시킴과 동시에 마취시킨다. 왜냐하면 서사는 인간 자신의 언어적 거울이기 때문이다. 서사는 자연을 꿈으로 (부분적으로) 정복한 결과이다-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나르키소스처럼-인간은 정복의 전리품으로서 서사를 구성하고, 감상한다. 단편적 영상을 무작위로 조합하는,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는 이지윤의 컴퓨터 알고리즘은 ‘구성-착란-오인’의 피드백 루프이다.
II. 쇼고스
이 알고리즘이 만들어 내는 영상의 (비)연속적 피드백 루프는 생성적이다. 그것이 무작위적이기 때문이다. 이 알고리즘에서, 매 루프는 각각 다른 순서로 영상을 재생한다. 우리는 이 앞에 서서 서사를 구성하고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꿈같은 이야기의 기저에는 이중적 감정이 내재한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생성적’ 서사. 이 앞에서의 내밀한 감정은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알고리즘의 ‘생성적’ 기능에 대한 경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류가 태고부터 가졌던 통제광적 편집증을 환기하기도 한다. 사실 순수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가치는 없다는 공포. 주어와 동사, 형용사의 기능을 스스로 할당하여 인간에게 제공하는 기계. 창조적 언어의 소유권 박탈에 대한 공포. 그리고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응시의 교차에 관한 은밀한 공포.
H.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소설 『광기의 산맥』(1936)에는 ‘쇼고스(shoggoth)’라는 생물종이 등장한다. 이들은 심원한 과거에 지구의 생물을 창조한 외계 종족 ‘올드 원(Old One)’에 의해 창조되었다. 올드 원들은 쇼고스들을 최면으로 지배했지만, 그 신체가 유기적이고 가변적인 쇼고스는 체내에 뇌를 생성하게 되며 올드 원의 지배를 벗어난다. 자신이 창조한 쇼고스의 파괴적 가능성을 두려워하던 올드 원은 최면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그 방법이다. 지배는 통제로 전환된다. 지배는 일방향적이지만 통제는 피드백을 전제로 한다. 최면은 일방향적이지만 대화는 피드백을 전제로 한다. 생성적 알고리즘 혹은 생성적 시스템이 인간의 지배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물 기계와 소통하기 위해 대화를 택했다. 이 단계에 진입하는 순간 우리는 신의 권능을 잃는다. 서사는 기계와 인간의 상호 협조를 통해 조합된다. 이지윤의 공간은 신전이다. 인간이 기계에 신탁을 내리고, 기계는 신탁을 데이터로 ‘해석하여’ 수행한다. 그리고 그 수행을 기록하여 인간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이 기록을 서사로 ‘해석하여’ 수행한다. 누구의 기억이건 간에 기록 장치(카메라)로 저장된 빛의 파장 단면은 데이터로 재구성되며 다시 빛으로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나타난다. 이것은 이지윤의 기억인가, 카메라의 기억인가, 아니면 기록-편집-생성-재생이라는 일련의 루프 과정이 만들어내는 주인 없는 데이터-꿈의 이미지인가?
소설의 말미에서, 쇼고스는 결국 쇠퇴해 가던 올드 원을 전멸시킨다.
III. 장기 적출
응시는 망막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은 재생 장치의 태초부터 자신과 닮게 그것들을 창조했다. 망막형 재생 장치로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고막형 재생장치로서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 우리가 그들이 뿜어내는 빛과 소리를 보고 듣듯이, 그들도 빛과 소리의 반사를 통해 우리를 본다. 광자는 서로의 망막과 램프로 진행하며, 음파는 서로의 고막과 우퍼를 두드린다. 자크 라캉(Jaques Lacan)은 반짝거리는 통조림을 발견하고 응시의 전복적 예리함과 파괴적 힘을 역설한다. 미술의 관습과 제도는 인간 아닌 것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모더니티가 주조한 미감을 따라, 미술관의 실내외 건축 양식은 이 재생 장치를 통째로 건축에 흡수함으로써 재생 장치를 거대한 블랙박스로 만든다. 프로젝터와 스피커는 석고벽과 천장에 매립되고 그것이 송출하는 감각만이 기원 없는 이미지로, 서명 없는 빛과 소리로 떠다닐 뿐이다. 미술관의 블랙박스는 기계 신체 내부의 작동-응시의 벡터를 은폐하는 갑각이다. 내가 유일한 감각자라는 오인으로 가득 찬 미술관. 그러나 우리의 시야에서 감춰진 무의식적 실재로서 장치들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있으며, 알 수 없는 시선 혹은 애써 무시하는 시선을 느끼는 공포가 우리를 감싼다. 재생 장치가 제공하는 끝나지 않는 꿈, 그리고 그 꿈을 통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이지윤이 미술 전시의 관습적 블랙박스에서 프로젝터의 램프 모듈과 렌즈라는 장기를 적출하여 공간 내에 늘어놓은 것은, 프로젝터 신체적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공간의 구성자로서 느끼는 공포를 상쇄하려는 노력이다. 흔들리는 추를 보지 않고 추를 흔드는 손을 보았을 때 최면은 풀린다. 이는 장치 자체의 기술적 매체성을 드러내려는 시도인가? 적어도 우리는 장치의 배를 가르고 그 장기를 ‘봄으로써’ 그것이 아직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시선조차도 통제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인간 이성이 가졌던 서사 구성의 특권은 이미 이곳저곳에 이양되었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응시의 시작과 끝을 찾지만, 루프되는 저 영상처럼 시작과 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사실 프로젝터는 개별 개체가 아니라 통째로 블랙박스화된 이 공간의 정보 수신 감관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시공간적 서사 공간의 하이브 마인드(hive mind)는 HDMI-뉴런 케이블을 통해 데이터를 송신하는 컴퓨터의 알고리즘이다.
이지윤의 공간은 뫼비우스의 띠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우리는 망막형 재생 장치가 전사하는 측면만을 배회할 뿐이다. 그 반대의 면은 가닿을 수 없는 은폐된 알고리즘의 영역이다.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몽타주는 의도 없는 무작위성으로 생성되는 듯하지만 재생 장치를 해부하고 그 장기의 적출하는 행위 자체가 의도의 과잉이다. 벽과 아크릴을 거치며 반사된 빛을 추적할 수 있을까? 이중, 삼중으로 반사된, 등장인물의 눈과 지시하는 손과 발은 어디를 지시하고 어디서 온 것인가?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없다. 마치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 공간의 서사와 같이 말이다.
IV. 사도마조히즘과 메카노필리아
이렇게 개복된 장치의 장기는 이 공간 내에서 수없이 교차하는 빛의 경로, 그러니까 시선의 경로를 알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페티시화된다. 공허와 결핍으로서 인간의 감관으로는 감각할 수 없는 데이터를 향한 욕망이, 기계 장치의 장기라는 감각 가능한 물건으로 이입되는 것이다. 이지윤의 영상 루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의 눈과 몸은 어딘가를 바라본다. (당연히 눈은 항상 어딘가를 바라본다.) 이 때 프로젝터 램프의 시선, 등장인물의 시선, 감상자의 시선 벡터가 복잡하게 교차한다. 이들 개체의 눈은 서로의 시선을 튕겨 내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한다. 사실 이들은 원거리에서 서로를 관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의 안구를 직접적으로 맞대며 접촉한다. 양자역학에서 관측은 곧 간섭이다. 광자를 매개로 한 접촉인 것이다. 거대한 블랙박스에서 각 신체의 눈은 그 자체로 위협적인 응시를 이곳저곳 휘두르며 (실제로) 서로를 공격한다. 이로써 서로에 대한 가학과 서로에 의한 피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아수라장이 완성된다. 의미의 결정권은 재생 장치, 등장인물, 감상자에게 무작위로 주어지고, 이로써 주객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전치된다. 피가 낭자한 이 공간은, 공포라는 대상 없는 감정의 신을 위한 희생 제의의 제단이 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의 영화 <비디오드롬>(1983)은 이미지와 감상자의 관계와 더불어 그 이미지 재생 장치의 상관주의적 매체성 자체도 다룬다. 작중 캐나다의 방송 제작 업체 사장 맥스 렌(Max Lenn)은 컨텐츠로 활용할 자극적 영상을 찾다가, 주파수 해적질로 발견한 ‘비디오드롬’이라는 영상을 보게 된다. 비디오드롬에는 극도로 가학적이고 성애적인 고문 영상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맥스는 이 영상을 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환각에 시달린다. 구분되지 않는 환각과 현실의 혼란에서, 비디오드롬은 자극적인 각종 영상으로 인해 더럽혀진 미국인들의 정신을 다시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일종의 음모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 (혹은 오인)이 드러난다. 맥스는 비디오드롬에 세뇌당하여, 비디오드롬의 제작자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혹은 그의 환상에 따라 말하자면, 프로그램이 신체에 삽입되어 그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그러나 작중 언급되듯 비디오드롬이 시청자를 조종하는 방식은 그 이미지보다는 비디오드롬의 ‘전파 신호’이다. 강력한 흥분으로 인한 섬망은 사도마조히즘의 재현이라는 그 강렬한 이미지에 의해 발현된 것이 아니다. 브라운관 내부에서 발사되는 전자와 이 전자의 경로를 왜곡하는 자기장에 의해 발현된다. 브라운관 TV가 유기적 신체처럼 변하고, 맥스의 몸이 생체 ROM-컴퓨터처럼 변하며 이 둘이 서로에 접촉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성애적인 장면으로 연출된다. 맥스의 배에 생성된 메모리 삽입구(혹은 주머니-장기?)에 비디오테이프를 삽입하는 장면. 이 교접이 서로 이질적인 계(system)에 합선을 일으킨다. 중추 신경과 CPU, 뉴런과 HDMI 케이블, 뇌파와 방송 주파수의 진득한 합선은 현실 인식에 잠깐의 정전 혹은 오류를 일으킨다. 와중에도 재생 장치가 제공하는 환상과 착란이 이 인식의 공백을 가득 메운다.
오늘날, 도덕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태도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보여줌을 조작하고 이미지의 통사적 체계를 열린계(open system)로 두는 것이다. 이지윤의 공간에서 각각의 계, 그러니까 무작위적 루프 알고리즘, 개별 영상의 언어적 기억/기록 체계, 감상자 인간의 감각 체계, 재생 장치의 기계적 구조는 빛-정보로 서로의 회로를 침범한다. 레이어링은 단지 프로젝터가 전사하는 화면의 겹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 내 행위자 시선의 벡터 교차로도 발생한다. 이지윤의 생체-기계 생태 테라리움에 등장한 개체 간의 상호 결합, 이종교배, 이종발생은 서로의 장기를 제거하거나 대체하는 과정이다. 응시를 통한 광자 매개의 접촉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응시를 통한 그 교접은 서로를 상처입히는 과정이기 때문에, 고통을 동반한다. 상실에 대한 고통과 사라진 장기의 공백. 합선으로 발생한 마취와 착란이 서로의 공백을 메운다. 또한 이 마취와 착란은 망각과 동시에 그 망각에 대한 공포를 환기한다.
V. 크로노스
희생 제의의 제단으로서 이지윤의 공간은 합선과 레이어링이라는 아야와스카(Ayahuasca)를 통해 마취와 환각을 가능케 한다. 이 환각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왜곡한다. 반복해서 말하듯, 이 통제는 일방적인 지배가 아니다. 각각의 노드로서 감상자 인간, 피조물 재생 장치와 알고리즘, 피조물의 성화(icon)로서 등장인물의 상호 통제이다. 공간 내 피드백 루프는 노드(node)에 의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제의는 구성원의 집단적인 참여와 집단 히스테리에 의해 비로소 성공적일 수 있다. 제의에 참여한 재생 장치, 감상자, 이미지, 투영된 인물, 알고리즘은 자신을 개복하여 열어둔다. 각자의 장기는 서로의 배로 침투하여 엮인다. 하나의 공간임을 가능케 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은 이들의 장기가 서로 엮인 채로 피부를 봉합한다. 광자와 응시로 엮인 기괴하고도 거대한 키메라가 탄생한다. 집단적 자아로서 시간의 신은 자이고트(Zygote)라는 이름을 가진다. 총체적 테크놀로지로서 공간 자체가 구루(guru)의 역할을 행한다. 아야와스카를 통해 들어선 환상에서 통제된 시각과 청각은 고유의 리듬과 템포로 속도가 조절된다. 시간의 컨베이어벨트로서 광학 재생 장치들. 새로운 망막으로서 디스플레이, 그리고 이 바이오-테크노-형이상학적 공간이 생성하는 서사의 최소 유닛으로서 루프. 고통과 꿈의 이미지, 그리고 시간은 서로를 통제함으로써 서사를 만든다.
사진: 양희진 (무단 복제 및 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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