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은 월간미술 2025년 4월 제483호 'Curators Voice'에 기고되었음.
윤태균 (독립 큐레이터)
소닉(sonic)은 사운드(sound)의 물리적 속성을 일컫는다. 음파의 속도, 음파의 세기, 음파의 진동수(frequency)와 같이, 소닉은 방향과 힘을 가진 운동이다. 전시 《소닉 크로노시스(Sonic Chronosis)》가 사운드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소닉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 전시에 심심지 않게 등장하는 사운드라는 미디엄(medium)의 재료적, 질료적 성격을 재고하기 위함이다. 또한 전시의 제목에서 소닉이 수식하는 크로노시스(Chronosis)라는 용어는 레자 네가레스나티(Reza Negarestani)와 키스 틸포드(Keith Tilford)가 공저한 그래픽 노블 이론서 「크로노시스(Chronosis)」(2021)의 제목을 빌렸다.[1] 이 책은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시간에 관한 사변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선형적 흐름이 아닌 복잡한 물질적·수학적 구조이다. 다양한 벡터, 즉 다양한 방향과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사고와 존재 방식도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시간적 매체로 이해하는 사운드에 관해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소닉 크로노시스》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은 구조를 잠재한다면, 시간적 미디움으로서 사운드 또한 다른 구조의 시간으로 안착할 수 있지 않을까?
사운드가 현대 미술에서 다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초기에 사운드는 미술사의 전통과 매체를 교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의 소음 생성 기계인 ‘인토나루모리’(Intonarumori)는 당시 산업화된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소리 중 기계가 내는 소음인 테크노포니(technophony)를 예술의 맥락에 삽입함으로서 사운드에 가속적인 정치성을 부여했다. 또한 1960년대에 플럭서스(Fluxus)의 퍼포먼스는 사물의 구체적인 사운드(concrete sound)를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재료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미술의 포스트모던적 열병은 사운드를 견고한 미술관과 공인된 제도로 편입해왔다. 그러나 나는 사운드가 미술의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사건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겠다. 문제는 사운드 아트가 물리적 의미의 ‘미술관’에 배치된다는 사실 자체이다. 수 세기를 거치며 완전한 시각중심적 공간이 된 미술관은 사운드의 물리적 속성, 즉 소닉의 운동을 미리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통제는 엄격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기보다는 서툴고 혼란스럽게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사운드가 미술관에 배치될 때에, 청취 환경인 어쿠스틱(acoustic)은 전시의 시각적 공간 디자인에 비해 덜 중요하게 이해된다. 사운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 혹은 학예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시 기획에서 청취 환경의 조성은 부차적 고려 사항이었다. 시각이 전시의 기획 의도와 벽에 의해 통제 가능한 감각이었다면, 청각적 경험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럽고 우연적인 환경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접근은 다소 순진하고 시각중심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사운드의 특징적 속성을 고려한 접근이기도 한다.
청각은 시각만큼 쉽게 통제될 수 없다. 파동은 귓바퀴만을 통하기 보다는 발 끝부터 정수리까지의 온 몸을 통해 고막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림은 벽과 천장을 타고 음원의 너머 공간까지 쉽게 전달된다. 또한 회절(diffraction) 현상으로 인해 음원 공간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다면 바깥으로 넓게 퍼져 나간다. 완벽하게 청취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면 사운드를 위해 복잡하고 위험한 공학적 설계와 비싼 시공비를 투자할 미술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운드의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보아, 사운드가 미술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때 소음의 정치성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운드의 물질적 속성이 그러하다면, 왜 그 속성을 통제해야 하는가? 매체특정성은 말해져야 하는 것이지, 감춰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소닉 크로노시스》는 사운드의 매체특정성을 다루는 전시이다. 이 전시에서 사운드의 침투하는, 회절하는, 진동하는 특성은 통제되지 않고 해방된다. 각 작가의 사운드는 공간의 벽과 바닥, 천장에서 서로 교차하고, 겹치고, 얽히며 관객의 몸까지 도달한다. 《소닉 크로노시스》의 공간은 분할되어 개별 작가에게 할당되지 않고, 모든 참여 작가의 작업이 한꺼번에 진동하는 공유지이다.
당연히 전시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요청된다. 이 지점에서 내가 전자음악가로서, 사운드 엔지니어로서 가진 지식은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한다. 전시를 준비했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참여 작가는 큐레이터에게 두 개의 사운드 작업 파일을 보낸다. 큐레이터는 총 6개, 6채널의 스피커를 전시장에 배치하고 각 작가의 사운드가 송출되는 공간과 시간을 결정한다. 개별 작업이 가지는 구체적인 내용과 맥락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 사운드만이 전시되는 《소닉 크로노시스》의 공유지에서 개별 작업은 각자 따로 청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구체적인’ 김유수의 시가 낭송되는 순간은 언어와 발화가 그 맥락을 내려놓고 사운드로의 인상으로 회귀하는 때이며, 동시에 관객이 언제, 어디 지점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단일한 선형적 시간성은 각 작가 사운드가 가지는 복합적 시간성이 이리저리 얽히며 복잡한 다중-시간 구조로 뒤틀린다. 당연히 전시의 시작과 끝은 없고, 오직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전시는 온전히 사운드를 다루는 큐레토리얼 실천 방식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시각적 완성도와 전시의 서사적 내용은 언젠가 찾아올 미래로 유예되었다. 전시에 방문한 몇 작가들이 내게 건넨 공통된 평을 기억한다. 전시를 어떻게 감상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전시에 사용 설명서(user manual)가 필요하다는 감상이었다. 다음 인용은 그러한 의견에 대한 답이자 《소닉 크로노시스》의 큐레토리얼 노트의 마무리이다. “우리의 정신이 더 활짝 열릴 때, 그 정신은 낡아빠진 목적론 대신에 오직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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