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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독립’, ‘작가’, ‘비주류’라는 개인주의적 동일성의 재생산

*이 글은 ❬2025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발표와 연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semacor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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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적 동일성이 미술계를 떠돈다. 현장의 작동을 하나의 기계적 프로그램으로 비유하자면 노드(node)로서 사람(들), 그리고 노드 그룹으로서 네트워크와 집단, 그리고 클러스터로서 지역적 공간을 구성체로 가진다. 스스로를,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공간 운영자, 대표, 선생님, 테크니션, 독립 큐레이터, 디자이너, 미술관, 신생 공간, 독립 공간… 이는 물론 관료 체계의 삼연한 호칭은 아니다. ‘독립’과 ‘작업자’라는, 모호하고 만연한 이 이름들은 우리의 어떤 주체성으로 인해 출현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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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라 칭해지는 실질적인 영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공공성에 관한 해석을 살펴야 한다. 공공성은 오늘날의 미술에 필수적인 규범처럼 여겨지는데, 흔히 통용되는 공공성은 명료하고 엄밀한 개념이 아니라 접근성, 개방성, 시민 친화성, 다수가 동의 가능한 미감 같은 복합적 가치들을 혼합한 혼종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통합적인, 넓은 공공성의 규범은 주로 국공립 미술관이 제공한다. 다수의 시민에게 장막 없는 문화 생활을 제공해야 하는 게 주요 어젠다로 작동하다 보니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성에 관한 가장 넓은 범주가 미술계 전반을 가로질러 가장 작은 단위라 할 수 있는 행위에까지 적용된다(물론 이는 단순한 하향식 학습이 아니다). 많은 독립 공간이 여전히 미술관식 공공성을 모방하며, 결과적으로 공공성이 국지적 해석으로 수렴되는 데 기여한다. 이것이 주류의 질서가 외부에서 내부로, 공식에서 비공식으로 스며드는 방식이다. 이 수렴은 독립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안전한 방식으로 희석한다. 공공성은 장소와 조건 그리고 규모와 주체성에 따라서, 말하자면 각각의 전시, 행사, 발표마다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독립 공간에서 공공성이 발현되는 지점은 대규모 관객 동원보다 결정적 소수가 교차하는 관계의 질적 깊이에 있다. 그렇기에 공공성은 방문자 수의 집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과 리듬을 가진 주체들이 어떻게 공존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가로 측정되고, 또 규범 지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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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신진 작가와 기획자는 자신의 작업 생활을 공공(복지) 기금에 의존한다. 동시에 그 대부분은 지금과 같이 기금에 의존하는 생활이 문제적이라 느낀다. 이는 일종의 구조적 소외이다. 지금의 기금은 양식화되어 있다. 지원금 신청서와 평가 기준은 새로운 규범적 문법을 생산한다. 심사가 아무리 다양성을 고려해서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 기금을 받는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전시와 공연 등 정량적 성과로 확인할 수 있는 형식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작은 공간은 기관의 위탁 실행자가 된다. 기관이 가지는 물리적 공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선정된 각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물리적 공간의 제공은, 마치 하청업체와 같이 작은 영세 공간이 도맡는다.
기금과 자본이 현장을 조직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노골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공공 기금, 재단, 대형 페어와 자본이 한편으로는 분명 좋은 전시 기회와 제작비를 마련해 주지만, 그 안에서 항상 공공성이라는 이름의 반성 없는 해석과 검열, 자기 검열이 따라붙는다.
기금을 받는 일반적인 전시를 생각해 보자면, 서문을 쓰는 비평가, 그래픽 디자이너, 대관, 설치, 촬영까지 전시를 가능하게 하는 대부분의 노동이 프로젝트 단위의 임시 고용으로 묶여 있다. ‘지원’과 ‘활성화’라는 정책적 슬로건이 이러한 임시 고용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이러한 양식화된 전시 구성 방식은 때로 당위 없는 기계적 순환처럼 보인다. 돈은 내부에서 순환하지만, 이러한 거대 규모의 현장이 어떤 언어와 기호를 생산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기금 순환이 정말 예술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는가? 그러니까, 가치와 집단적 정동의 생산에 도움이 되는가? 휘발이 전시의 숙명이라면 그 휘발 후에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서머 스크리닝 나잇 ❬Thrill&Chill❭(팩션, 2024) 전경. 팩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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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은 미술계 내 이미지 유통과 실질적인 작동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전시의 전경이 사진에 찍혔을 때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이제 전시가 열리고 기록되는 데 중요한 고려 요소이다. 피드에서 생성된 호응은 미술계 내의 입지에도 영향을 주는 듯 보인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이미지 생산과 경력 구축에 있어서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취향의 동조화를 요구한다. 모두가 서로를 팔로우하고, 같은 해시태그, 같은 레이아웃, 같은 어조로 이미지를 올린다. 모두가 서로를 알고, 서로의 전시를 스토리로 올려 준다. 그러나 정작 누가 무엇을 결정하고, 어떤 조건에서 이 이미지들이 돌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점점 흐려진다. 동시대 미술의 이미지 유통은 알고리즘 통치의 본격적 단면에 속한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파르마콘(pharmakon)이다. 자동화를 통한 통제 너머엔, 이전엔 가질 수 없었던 접속과 종합의 잠재성이 자리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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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모든 현상, 그러니까 담론과 지식의 다양성이 증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형식과 모습은 단일화되어 가는 이 현상은 소용돌이처럼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프리즈 서울 기간, 서울에서는 동시대 미술의 원천처럼 여겨지는 온갖 담론이 짧은 기간, 한정된 공간에서 방대한 양의 이미지로 나열된다. 비평가 마이크 페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이 모든 정치적 위기에 응답할 필요는 없고, 물론 그것을 ‘해결’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예술은 애초에 일관된 표현일 필요조차 없으며, 우회적으로 강력할 수도 있다. 만약 ‘동시대성’이 아직 현재에 대한 효력을 지닌다면 관객을 새로운 배열 속에 위치시키는 일은 변이를 야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제도들과 그에 협조하는 일부 예술가는 위기의 국면에 있다. [···]
정치적 맥락이 ‘긴급’하거나 ‘변혁적’이며 ‘정체성’ 혹은 ‘다중의 위기’를 호명하기만 하면, 어떤 병치나 경계의 흐림, 60년 된 형식적 장난이라도 잠시 눈부신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들의 본질은 폐허 관조의 의례 속에서 수행되는 멜랑콜리다.2


프리즈 서울의 등장 이후에 서울의 미술 생태계에서는 수평적 주변성이 증가했다. 현장은 전 지구적 미술계의 위계적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이는 주변성을 더 평평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플랫폼 네트워크로 흡수될 것을 요구한다. 비주류는 주류가 자신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결정짓기 위해 타자화하는 위치이며, 이 타자화는 때로는 제도 바깥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 내부의 언어를 통해 조율된다. 우리는 제도 안쪽에서 주변화가 수행되는 장면을 목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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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술계에서 소외와 고립은 이중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먼저 우리는 미술계 내 담론 생산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소외를 철폐했다고 느낀다. 담론과 지식 생산에서 위계가 예전보다 강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온갖 담론과 주제로 가득 찬 이 거대한 덩어리는 프리즈 서울이나 아트위크 같은 하나의 기념비로 서울에 세워진다. 나는 앞선 논의에서 미술계 노동의 금융화와 우버화를 지적한 바 있다. 그 맥락을 빌려 현재의 상황을 복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국가 재정에 의존하는 한국 예술계는 국가가 관리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각각에게 투자 유치를 위한 포트폴리오 쌓기를 요구한다. [···] 미술계의 조직과 개인은 피투자자로 거듭나는데, 이는 기업가적 유토피아보다는 실체 없는 화폐들의 네트워크-거버넌스를 형성한다. [···] 이 포스트 임노동 시스템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주체성은 전통적인 예술가적 자아가 아니라 화폐 유희의 철저한 투기로 결정된다. [···] 미술계의 상징 자본 네트워크와 금융화된 시스템 안에서, 자기 피드백과 그로 인해 생성된 전시-이미지의 응집은 양으로 결정된 ‘좋은’ 미술과 동종 선호로 인해 어떤 미술이 ‘중요한’ 미술인지 설정한다. 이 현상은 해시태그로 뭉쳐 웅성거리는 특정한 부류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미술계의 통용되는 규범으로 부상시켰다. ‘팔로우-팔로잉-함께 아는 사람’의 네트워크, 프로젝트의 노출도와 참석의 경제. 이 다층적 투자자-피투자자의 금융 네트워크에서 과연 누가 무엇이 중요한 미술 현장인지를 결정하는가? [···] 시스템 내에서의 투자에서는 이러한 차익으로 어떤 문화-예술적 상징 자본, 말하자면 미술계 내에서의 영향력과 참석의 경제 통화를 추출해 내는지가 관건이다. 예컨대 투자된 공공 기금은 피투자자의 임금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예술 네트워크에서 유효한 상징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결과를 요구한다. [···] 예술인은 노동자에서 피투자자가 되었다.3


어떤 담론이 어떻게 일 년의 주요한 이야깃거리가 되는지는 이 비기표적 기호 유기체의 작동으로 결정된다.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이런 유의 자유주의가 우리가 향해야 하는 민주주의라는 환상이 팽배하다. 전례 없는 지식의 교환과 증대 때문이다. 벤저민 노이스는 소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외가 극복된 사회에서는, 정치를 전문직 계층의 고유 영역으로 제한하는 구조가 약화하며, 궁극적으로 폐지될 것이다. 정치는 더 이상 소수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치의 고립성을 제거하는 것은, 동시에 정치적 고립을 줄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개개인은 결정에 대한 영향력의 증가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집단적인 권력의 증대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4


이러한 이유로 이제 비주류는 스스로를 ‘대안’과 ‘독립’이라는 수식으로 명명하여 주류로부터의 소외 혹은 고립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개인으로부터 수많은 이즘(-ism)과 담론이 생산되고 거버넌스가 이를 주류로 기꺼이 승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외의 철폐는 또 다른 강력한 소외를 가리는 환상이 되기도 한다. 무수한 담론의 증가는, 노이스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변화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으로 상쇄”된다.5 우리는 삶의 토대로서 노동 및 생산과 관련된 정치적 결정에서 소외되어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전통적인 권력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자동화된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별 주체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계로서 미술계인 것이다. 예술가나 큐레이터 같은 개인의 정체성은 스스로의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다. 이는 작게는 정책으로부터의 소외, 제도로부터의 소외이며 더 크게는 자본주의 사이버네틱스에서의 소외, 문화 생산에서의 소외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동적 관찰자에 머물거나, 우리의 활동은 찬반 표현 정도로 제한된다. 이런 경우 집단적 변형은 후퇴하고, ‘집단적’ 결정으로 포장된 개인의 판단만이 남게 된다. 즉 모두가 담론과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어지지만 그 구조를 조정하고 변화할 수 있는 주권적 논리에서는 소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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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말한 이 현상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하기 위해서는 주류와 비주류가 스스로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여긴다. 개념적인 범주로서의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를 위계화해서는 안 된다. 주류와 비주류라는 범주는 흔히 위계적 질서로 오해되기 쉽지만, 실제로 이 둘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유통되는 자본의 밀도, 관심의 편향, 시선의 집중도에 따라 반복적으로 재편되는 가변적 상태에 가깝다. 주류는 ‘중심’이 아니라, 특정 시기와 환경에서 더 자주 호명되고 더 많이 순환될 뿐이다. 반대로 비주류는 덜 소비되고 덜 가시적인 흐름을 가리키지만, 그 또한 한 시점에서의 임시적인 위치일 뿐 본질적 결핍을 가지지는 않는다.
이 두 범주를 위계적으로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미술이 아니라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가 생산한 시선의 구조를 비판 없이 수용하게 된다. 주류와 비주류는 원래 수직적 구분이 아니라, 대안적 지향 간의 횡적 긴장이다. 문제는 현장에서 이 범주들이 자주 정체성적 라벨로 오용된다는 점이다. 주류라는 표식은 안정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비주류라는 표식은 실험성과 주변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낭만주의적 예술 열병의 과잉을 조장한다. 그러나 주류와 비주류 모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반복되는 언표 행위를 통해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비의도적 삶》(팩션, 2023) 전시 전경. 사진: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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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란 무엇인가? 언급했듯 독립 큐레이터나 독립 공간처럼 독립 또한 비주류와 연결되는 어떤 라벨처럼 여겨진다.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제도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며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개별 주체로 오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크 피셔가 말하듯 자본주의는 더 이상 탈개인화를 촉진하지 않는다.6 오히려 지극히 진부한 개인주의적 동일성을 양산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결코 개인을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유치한 자아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더 거시적으로 살펴보자. 독립을 외치는 주체(성)들은 동일한 어휘, 동일한 설정값, 동일한 태도를 반복 학습한다. 이 동일성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앞으로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취향과 그 실행은 플랫폼이 선별한 가시성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담론 또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어휘 패턴과 무해한 비평적 제스처를 구사하며, 차이를 산출하기보다 이미 승인된 감각을 다시 퍼포먼스하는 양상을 보인다. 다양성이란 기표는 유지되지만, 그 기표를 지탱할 실질적 감각의 편차는 급격히 좁아진다. 그렇게 우리는 차이를 말하면서 다시 동일성에 기생한다.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이름은 다름을 약속하지만, 그 실천은 플랫폼이 요구한 동기화된 시간을 따라 흐른다. 이 개인주의적 동일성은 미술이 아니라 미술계라는 거대한 플랫폼 기계가 요구하는 캐릭터성이다. 나는 미술계가 거대한 거품에 쌓인 사기로 유지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전문가의 권위와 친숙함이 가치를 보증한다. 전문가는 유행 중인 담론의 키워드와 작품의 표면을 임의로 뒤섞는다. 그 작업이 이를 이용해 권위 있는 기관에서 전시된다면 그 신용은 더욱 증가한다. 그럼 미술계 내 여러 종사자는 그 작업에 자신의 관심을 기꺼이 투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업도 대단한 맥락을 획득한다. 이런 의심, 그러니까 미술이 사실은 의미가 없고 더 나은 미술이 없을 것이라는 의심은 이 거대한 버블을 붕괴시킬 수 있다. 때문에 알게 모르게 이 거대한 연극에 참여하는, 종말을 바라지 않는 이들은 이 의심을 애써 모른 척한다. 한 비평가가 어떤 작업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담론에 대한 보증을 거부하면 작가는 대기 중인 다음 비평가에게 간다. 보증을 거부한다면 비평가는 경쟁 인원에게 너그러움이라는 상징 자본을 빼앗길 것이다. 이 거대한 신용 체계는 (또 다른 권위로 작성된) 미술사와 미술 고등 교육 기관, 백만장자 미술 애호가와 기업 총수의 통 큰 기부와 절세에 의해 단단하게 지탱된다. 이 믿음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사실은 미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모두가 인정할 때가 오기는 할까? 다소 무기력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큐레이터 다니엘 바우만이 제안한 바로 그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거절’이다. 비록 그것이 작은 걸음이더라도 말이다. 아니라고 말할 용기, 실망시킬 자유가 필요하다. [···]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 글은 여러분을 실망시킬 것입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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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후이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집 없음’의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8 그런데 역설적인 점은, 이 ‘집 없음’이 또한 집에 있고자 하는 욕망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의 보수주의나 신반동주의 운동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동시대 이후의 미술은 과거 포스트모더니스트 미술의 찬란함을 향수하며 자기 지시적 결과물을 박물관 안에 늘어 놓는다. 페피를 인용하자면, “그런데 제도와 그에 협조하는 일부 예술가는 위기의 국면에 있으며, 평균적인 위기 대응은 자족적인 태도로 낡은 전략들을 재탕하면서도 현재의 한계를 시험하길 회피하는 쪽으로 기운다”.9 나 또한 미술이 과거의 저항, 대안, 반문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테다. 그러한 시도는 즉시 현재에서 미끄러져 자조와 향수로 추락할 것이다. 단지 우리가 현재 어떤 경사로에 서 있고, (미약한 희망일 뿐이지만 만약 선택권이 있다면) 무수한 경사로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등반하거나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탐색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 탐색의 시작은 시스템이 선사하는 안온한 동일성을 거부하고, 기꺼이 ‘집 없음’의 위태로운 장소로 자신을 내던지는 ‘거절’의 감각에 있을 것이다.



[1]윤태균, 「아트월드에 드리운 거대 우주」, 『월간 미술』, 471호(2024. 4). ↩
[2]Mike Pepi, “Contemporary Art’s Twin Follies”, Spike Art Magazine(2024. 9. 4), 2025년 12월 12일 접속, https://spikeartmagazine.com/articles/contemporary-arts-twin-follies.
[3]윤태균, 「담론 네트워크의 금융화, 예술 노동의 우버화」(2023), https://artcritic.tistory.com/29, 2025년 12월 17일 접속. ↩
[4]Benjamin Noys, “Non-alienated Life”. 이 글은 벤저민 노이스의 저서 『선한 삶을 상상하기(Envisioning the Good Life)』(2025)에 관한 발표문의 편집본으로, academia.edu에 업로드되었지만 현재는 삭제되어 확인할 수 없다. ↩
[5]Noys, “Non-alienated Life”. ↩
[6]Ray Brassier, “Accelerationism”, lecture presented at Backdoor Broadcasting Company(2010); comment by Mark Fisher during panel discussion. ↩
[7]Daniel Bauman, “What Happened to the Curator?”, Spike Art Magazine 80, The State of the Arts(Summer 2024).
https://spikeartmagazine.com/articles/question-what-happened-to-the-curator, 2025년 12월 23일 접속.  ↩
[8]Yuk Hui, “On the Recurrence of Neoreactionaries”, e-flux 151(February 2025).
https://www.e-flux.com/journal/151/652979/on-the-recurrence-of-neoreactionaries, 2025년 12월 23일 접속. ↩
[9]Mike Pepi, “Contemporary Art’s Twin Foll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