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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관측과 사변 사이, 서정(抒情): 이수진 개인전 《폴리포니 클럽: 몬더그린 확장본》

관측과 사변 사이, 서정(抒情)

 

*본문은 퍼블릭아트 2025년 11월호에 수록되었음.

윤태균

 

실체는 인간으로부터 물러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실재가 아니다. 오직 유동하는 관계적 사건만이 실체이다. 사건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과 그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힘, 그리고 정보의 총체를 우리는 사건이라 칭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건에 관여하는 모든 정보는 실체를 생산한다. 우리가 명백하다고 믿는 감각 정보와 그 정보를 엮어 냄으로써 인식되는 경험, 그리고 인류사적 과정을 통해 견고한 믿음 기반을 가지게 된 과학과 그것이 당연하게 제시하는 지식. 이처럼 쉬이 믿을 수 있는 요소,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감각하고 서로에게 담보하는 그 사실은 물론 실체의 중요한 특질 중 중요한 일부이다. 그러나 실체는 사실로 여겨지는 정보만으로 구성되지만은 않는다. 우리가 명백한 사실이라고 여기는 정보도, 종종 모호한 방식으로 생성된다. 객관성은 신화이다.

사변과 픽션은 관측과 역사만큼 현실을 지탱하는 정보이다. 이수진의 개인전 《폴리포니 클럽: 몬더그린 확장본》은 가장 견고하다 여겨지던 정보를 해체하여, 가장 허구적이라 여겨지던 정보와 같은 평면 위에서 뒤섞는다. 전시의 주요한 모티프(motif)는 작가가 지난 7월 말부터 아라온호에 탑승해 약 한 달간 북극해를 항해한 경험이다.[1] 아라온호는 북극의 환경에서 과학적 데이터를 추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항해한다. 그러나 학술적 연구를 위한 과학적 관측으로 얻어지는 정보와 작가의 유한한 감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격은, 비평 없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현실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 평면을 열어 보이는 계기가 된다. 관측되고 수량화되어 추출되는 데이터는 과학이라는 우리의 믿음 체계에 기초한 사실을 위해 봉사하지만, 강렬한 감각으로 경험되는 북극해의 광활한 풍경은 관찰자의 인식을 터무니없는 사변으로 이끈다. 이 관측과 사변의 간극으로 발생하는 분열증(schizophrenia)은 현실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기보다는, 세계에 잠재한 다양성을 증폭하여 다중의 현실을 개시해 보인다. 오히려 비평 없이 맹신되는, 인준된 지식의 권위로만 지탱되는 현실은 편집증자의 독선으로 유지되는 망상일 뿐이다.

전시의 전반은 관측과 사변의 복합적 구성체로서 서사를 가진다. (카메라와 마이크로) 관측되고 기록된 도큐먼트는 작가의 사변으로 비로소 실체화된다. ‘구름은 계속됩니다 The Cloud Continues’(2025) 시리즈는 관계적으로 구성된 구름이라는 어떤 실체()에 관한 체계화되지 않은 사건의 나열이다. 작가는 이러한 구름의 실체(), 그러니까 낭만주의적 풍경화에 나타난 구름의 숭고부터 오늘날 데이터 네트워크에 활용되는 구름(데이터 클라우드)을 평탄화한다. 구름을 둘러싼 이 다중적 현실을 서로 관계하는 사건으로 엮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건 다름아닌 작가의 사변이다. 이 복합적 실체의 의미가 겹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이 생성된다. 관측과 기록, 그리고 사변 사이 이미지와 이야기가 발생한다.

영상 작품 <폴리포니 클럽: 바람에 피와 살을 입히기 Polyphony Club: Put Flesh and Blood on the Wind>(2025)은 원시주의적인 제의의 형식을 더 강하게 참조한다. 그러나 전시가 현실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여전히 일관된다. 전시는 과학이라는 지식 생산의 권력에 관해 비판적으로 발언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대신, 전시는 현실이 관측과 사변, 경험과 상상을 통해 발생하는 일시적인 사건들의 연쇄일 뿐이라 말한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과학적 관측과 북극해에서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작품인 <폴리포니 클럽: 몬더그린 확장본>(2025)에서도, 세계는 (상관주의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현실보다 더 방대한 과잉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북극 항해과정을 통해 구상한 착청 주파수와 생명체들의 소리 구성을 통해 심해 속 존재하는 여러 생명을 상상한다.[2] 토테미즘적 사유 체계에서 자연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여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나, 경험주의적 사유 체계에서 과학적 관측과 지식으로 자연을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사변하여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나 인지할 수 없음에 관한 기호들을 현실의 구축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현실은, 그리고 실체는 어느 한 주체성에 의해 독단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수진에게 과학적 관측, 신체적 관측, 생리적 경험, 제의적 상상, 종교적 상상, 엄밀한 사변, 과학적 픽션은 현실의 구성에 있어서 위계화되지 않는 요소이다. 이 모든 요소가 한 평면위에서 복합체로 벼려지는 순간 현실이 나타난다. 당연히 이 모든 요소는 한 주체의 독단으로 조립되지 않는다. 오늘날 함께 살아가는 모든 동시대적 주체성은 모두 현실의 지속적 구축에 기여한다. 이수진은 이 전시에서 자신이 취득한 기호의 일부를 매혹적인 다중 현실로 열어 보인다. 우울한 현실을 엄밀한 관측, 더 급진적인 사변 그리고 그 관계에서 창발하는 강력한 서정으로 극복 가능할 수 있을까? 전시《폴리포니 클럽: 몬더그린 확장본》은 이 질문을 심화한다.

 

 


 

[1] 작가는 2024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극지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북극해 탐사 프로그램 참여했다.

[2] 작가 노트를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