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퍼블릭아트 2025년 8월호에 게재되었음.
Issue 227, Aug 2025
퍼블릭아트 2025년 8월호 Contents 028 Editorial 불안_정일주 030 Art Log 두번째 삶 2025 ACC 포커스: 료지 이케다 시야오 왕_날개 없는 그림자 백남준의 도시: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김남두_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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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위그: 리미널
외상과 역치의 (역)현실에서
윤태균(독립 큐레이터)
테크놀로지와 오컬트(occult)를 함께 사유할 수 있을까? 전시 《피에르 위그: 리미널》은 이 두 영역을 한 시공간에 중첩한다는 점에서 위화감을 갖는다. 전시에서 작품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이전에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디스플레이 모듈, 데이터 송수신기, LED 마스크와 같은 첨단의 기계이다. 그 이후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감각된다. 얼굴 없는 인간 신체, 그와 반대로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백골만 남은 인간의 유해와 그 유해를 훑는 로봇 팔, LED 마스크를 뒤집어쓴 익명의 퍼포머. 우리가 인간임의 조건이라 여기는 신체적, 정서적 요소들은 각 작품에서 일부분 도려져 암흑 상태로 남겨지거나 비인간적 모습으로 치환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으스스한 감각이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혹은 무언가 있어야만 할 때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라고 말한다.[1] 이러한 점에서 피에르 위그가 구사하는 이미지는 항상 일정한 으스스함을 내포한다. (전시장 전반에 내리깔린 어두움이라는 연극적 장치 또한 이 으스스함을 보조한다) 흔히 테크놀로지와 같은 경험주의적 기구는 우리의 인식 밖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영역을 이성으로 밝히는 역할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반대로 주술, 밀교, 귀신, 괴물과 같은 신비적 체험은 원시성이라는 비이성적 영역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설명에서라면, ‘이성적’ 도구로 여겨져 왔던 테크놀로지가 ‘이성적으로’ 명확히 설명될 수 없는 으스스함과 공존한다는 점이 위화감의 원인일 것이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에는 총 12점의 작품이 등장한다. 그중 일부는 실시간 데이터와 생명공학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교란하며, ‘기계-주술적’ 현실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전시와 동명의 신작 <리미널>(2024–현재)에서는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센서를 통해 환경을 감지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움직이며 시선을 주시한다. <이디엄>(2024–현재)은 황금색 마스크를 쓴 익명의 존재들이 생성하는 언어의 장면을 제시한다. 이 언어는 인간의 발성과 신경망 데이터에 기반해 실시간으로 생성된다. 이 역시 기술과 기호, 주체와 비주체 사이에서 부유하는 ‘말해진 것’의 주술적 효과를 환기한다. <U움벨트-안리>(2018–2025)는 외부의 기후·광원·온도 등의 데이터를 감지하고, 동시에 <암세포 변환기>(2016)가 생성한 세포 분열 데이터를 시각 이미지로 전환한다.
여기서 테크놀로지는 알고리즘, 코드, 언어, 데이터, 인공적 지능의 내재적 작동 방식을 지탱하는 틀로 작동한다. 그런데 오컬트 또한 감각 너머에서 작동하는 실재적(으로 여겨지는) 힘을 지칭하며, 우리가 인식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영역에서 현실을 매개하고 변형하는 작용들이다. 위의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테크놀로지와 오컬트의 명확한 이분에는 설명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테크놀로지는 본래 오컬트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컬트는 테크놀로지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역사적으로도 계속 그 기저에 있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라는 지루한 문장은 흥미로운 고고학적 격언이 될 수 있다.
에이미 아일랜드(Amy Ireland)의 ‘오컬트 테크놀로지(occult technology)’ 개념은 기술과 주술, 과학과 마법, 감각 가능한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해체하는 사유 틀이다.[2] 테크놀로지는 단지 물질적이고 도구적인 장치로 환원하지 않고, 언어적·기호적·사변적 층위에서 현실을 호출하고 변형하는 힘이다. 그렇기에, 《피에르 위그: 리미널》에서의 위화감은 절대 만날 수 없는 영역이 교차해서 발생한 특수한 정서가 아니다. 우리가 미처 사유하지 못했던 현대성의 주술성, 마술성을 비로소 마주했기에 발생한 일상성의 재사유에 기인한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 혹은 ‘운하임리히(unheimliche)’인 것이다.[3] 조형적 형식이든, 알고리즘적 구조이든, 그것은 반복과 기호의 질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호출하는 마술적 메커니즘이며,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기계적 변환 장치이다.
<카마타>(2024–현재)는 폐허 같은 풍경 속에서 인간의 유해를 탐사하는 기계의 퍼포먼스를 담는다. 영상은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견된 해골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소환하는 듯한 반복적인 동작을 수행한다. 인간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그 흔적을 다루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기계가 인간의 사후를 의식하고 신화를 구성하는 장면은 근대적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파괴하며, 관람자에게 기술-주술적 장례의 감각을 환기한다. 영상은 실시간으로 편집되고 순환되어 끝도 시작도 없는 형태로 지속된다.[4] 기계는 특정되지 않은 시공간에서 인신세(Anthropocene)의 지층을 살핀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여타 지질학적 구성 물질의 층위로 물러나며 이 고고학적 기념의 행위에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된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2014)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주거와 출입이 제한된 구역을 배경으로 한다. 인간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는 남겨진 집의 이곳저곳을 거닌다. 실제 주거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집은 더 이상 기능적으로 인간을 위해 의미화되지 않는다. <카마타>가 익명의 장소에 인간의 흔적만을 상징적으로 남겨두었다면, <휴먼 마스크>는 인간이 사용했던 구체적 장소에서 인간을 제거한다.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야 할 곳에 있는 행위자로서 기계와 원숭이는 오늘날 현실의 기호계의 기저를 흐르는 실재적이고 으스스한 수행적 물질의 이미지이다. 위그는 단단한 기호로 밀봉된 인간적 현실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에서 끈적하게 흘러나오는 실재의 ‘알 수 없음’을 일시적으로 밝힌다. 원숭이의 행동은 인간의 것과 같은 충동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의 얼굴을 한 원숭이의 산보는 비인간적 실재의 누출된 지층이다. 그런데 연출되는 세계에서의 인간 소외는 으스스함과 동시에 어떤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수조로 설치된 <주드람 4(Zoodram 4)>(2011), <주기적 딜레마(Circadien Dilema (El Dia del Ojo))>(2017),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2018)은 인간에게 무관심한 지층의 디오라마(diorama)로서 완전히 언어화되지 않는 상태를 보인다. 전시장 내에서 관객은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대지의 여러 상태를 감각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갱신한다. 그리고 그 동기는 지금까지 논한 으스스함과 우울함이다. 위그가 연출한 전시 전반의 장소성은 지오트라우마(Geotrauma)적 주체성으로서 인간의 비능동적인 존재론적 위치를 은유한다.
지오트라우마는 장소에서 인간 정신이 형성되기 위해 겪은 원초적 파열, 충격, 혹은 외상을 뜻한다.[5] 이 개념은 심리적 트라우마의 범주를 넘어 존재론적이고 지질학적인 외상, 즉 인간 이전의 심연적인 시간과 우연성, 그리고 인간 주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사유를 전제한다. 이는 지구의 역사적·물질적 과정들이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 너머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 사건들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로빈 맥케이(Robin Mackay)는 이 개념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 시간 경험, 정신이라는 것이 사실상 지구의 장력, 에너지, 단층선, 충돌, 진동 등의 지질학적 리듬과 충돌한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지오트라우마는 형이상학적 우울의 형태를 띤다. 이 우울은 정신이 자신이 시작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리고 지구는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한 채 지속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는 한계에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시에서 강조되는 “공존”이라는 용어는 인공적인 윤리적 당위에 대한 강조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역사화된 자연의 질서를 묘사하는 개념에 가깝다.[6]
[1]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안현주 역 (서울: 구픽), 2019, p. 97.
[2] Amy Ireland, The Poememenon: Form as Occult Technology, Document: Urbanomic (Falmouth: Urbanomic, 2017).
[3] 운하임리히(Unheimlich)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익숙한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 발생하는 불쾌하고 기묘한 감정이다.
[4] 전시 서문 참조.
[5] Robin Mackay, Introduction to ‘Geotrauma’, in Collapse: Philosophical Research and Development, Vol. IV (Falmouth: Urbanomic, 2008), p. 4~5.
[6] 전시 서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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