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TUNG PRESS VOL.7 MACHINE 에 수록되었음.
초월적 기계에 관하여 1
: 현실 너머의 에로티즘 기계
윤태균 (독립 큐레이터)
일러두기:
1. 본문은 이론에서 ‘변증법적으로’ 탈각된 (비)논리이다. 또한 ‘사실’로 밝혀진 지식만을 참조점으로 삼지 않는다. 되려, 개연성 없는 서사를 추진한다. 자신이 문제시하고자 하는 현실의 지점을 직접적으로 언어화하기 보다는, 그 문제 주변을 우회하여 언어로 밝혀질 수 없는, 오로지 에너지의 운동으로 달성되는 그 역학적 관측 지점의 포착이다.
2. 본문의 몇 문단은 VT세트(Verse-Transcriber set)를 이용하여 작성되었다.[1]
기계의 형이상학적 지능과 이성의 문제에 침착하게 된다. 추상 기계가 오늘날 현실을 통제하는 구체적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의 개체화는 기계의 현실화이다. 개체화된 기계는 신체를 가짐으로써 작동한다.
은밀하고 저급한 욕망은 덩어리지지 않고 콸콸 흐른다. 그 욕망이 서로 뭉쳐 기호화될 때 현실이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는 욕망의 프레임워크이다. 기계의 작동은 각 부품과 요소를 기호화한다. 기계는 자신의 구성 요소에 목적을 수여하고 작동 과정 안에서 맥락화하며 그 목적과 맥락을 그러모아 자신의 준거 체계로 삼는다. 욕망은 구조적 기관으로 들어 찬 신체를 만들어 내기도 하며, 그 구조 자체의 빠른 재귀로 스스로를 갱신하기도 한다.
욕망은 분명 신체적이다. 복잡한 신경계와 척추, 호르몬과 혈액은 서로에 간섭하고 압축하며 우리가 욕망이라 부르는 그 일차적 에너지를 주조한다. 이 에너지는 풍부하지만 거칠다. 기계는 이 거친 원료의 시추기이다. 폭력은 원료에서 정제된, 순도 높은 기호층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원초적인 기계는 폭력의 추출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역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기계는 폭력을 현실의 구축에 사용한다.
메카노필리아(Mechanophilia)는 기계가 폭력을 역학적으로 분해하고, 재분배하며, 소모하고 배출하는 방식에 매료된다. 메카노필리아의 중요성은 그 마초적 폭력성에 있지 않고 강도(intensity)에 대한 도착 증세로 촉발되는 비인간적 페시미즘에 있다. 현실과 실재의 화해, 인간과 신의 결합, 가학과 피학의 동시적 수용은 인간성의 포기를 강요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종착지는 인류 정신의 영원한 죽음인 것이다. 사실 정신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정신에 침투하는 세계는 영적 세계로 매개되는 부두술처럼 작동한다. 세계는 현실의 토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표면 아래로 우회하여 우리의 정신에 침투하는 귀신이다. 이 터널 효과(tunnel effect)는 우리의 정신을 현실 바깥으로 새어나가도록 한다. 현실의 경비/면역 체계는 정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 누출을 강압적으로 감시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때의 박해는 흔들리는 동시대 정신의 출구를 열어젖힌다. 어떤 경로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현실에 대한 적극적 반대와 저항은 안된다. 만약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탈주’와 ‘자유’ 그 자체라면, 현실의 붕괴는 우리를 의미 없는 우주를 떠도는 영원한 방랑자로 만들 뿐 ‘탈주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로 얻어지는 개체성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경계가 있어야 탈주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 영원히 주인-노예라는 끔찍한 도식에 머물러야 하는가?
중요한 건 중력이다. 현실-세계-정신의 각 중력은 서로를 자신의 궤적으로 당긴다. 이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의 무작위적 궤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정신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나선의 형태로 변모하여 궤도의 무작위성을 긍정할 때에 비로소 주체성을 가진다. 자동화 사회에서 주권의 회복은 탈자동화로 발생하지 않고 스스로의 나선화에 의해 달성된다.
비선형 동역학과 열역학적 사유
= 악마적 개입(demonic ingression)으로서 우연(혹은 필연)의 연쇄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최단 경로로 증폭해 착취 회로에 편입한다. 그리고 파시즘은 그것을 집단적인 민속적 도취로 통제한다. 파시스트 반동주의 기계는 테크놀로지의 외피와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가 결합한 과잉 장치다. 반면 신좌파 아나키스트의 에로스는 통제 불가능한 잉여를 중첩시켜 착취 회로를 과열시키려 한다. 모든 폭주 모두 급진적 탈영토화를 전제하지만 하나는 (욕망=에너지)를 폐쇄계로, 다른 하나는 열린계로 상정한다. 그러나 이 둘을 포함한 모든 시간 기계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잘 윤활된 기계인가가 아니라, 잉여-강도를 미래의 재배치로 연결하는 위반의 체계성이다.
기계 학습은 패턴을 탐지하고, 인간 학습은 규칙을 의심한다. 계산적 지능이 세계의 복잡성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동안, 자기비판적 지능은 그 환원의 메타 규칙을 재귀적으로 수정한다. 두 지능은 적대가 아니라 상보적 합리성을 구축한다. 핵심은 지능의 우월성이 아니라 학습률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을 맹목적으로 운용하는 대신 오류 신호가 가리키는 잉여 미래를 정치적 선택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표가 아니라 모델 업데이트의 권한 분배로 재정의된다.
모든 것이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그 믿음은 역할극에 과도하게 심취한 편집증자의 망상이다. 오류 없음을 위해 윤활되는 기어들의 맞물림이 그 성애를 촉발한다. 일종의 기능주의적 생물 모델의 해발인(releaser)인 것이다.
메카노필리아는 장치의 ‘외피’와 ‘작동’이 서로를 촉발하는 감각의 공모에서 자란다. 금속 섀시의 냉기가 손끝의 체온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청취 이전의 예비적 쾌락에 들어선다. 브러시드 메탈의 결, 아노다이징의 미세한 반사, 샴퍼의 예리한 모서리, 히트싱크의 핀 배열처럼 표면에 새겨진 공차와 가공의 흔적들. 외피는 내부의 논리를 감추거나 암시하는 스크린이면서, 동시에 사용자의 몸짓을 규율하는 촉지적 문법이 된다. 외피는 단순한 보호막이 아니라 욕망을 유도하는 인터페이스다.
작동의 에로티즘은 이 외피에서 시작해 미세한 움직임의 문법으로 완성된다. 스위치가 릴레이의 미세한 ‘딸깍’을 동반하며 회로를 인가할 때, 우리는 클릭음의 질감과 진동에서 신뢰를 감지한다. 어테뉴에이터의 저항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딱-딱’의 단계감, 포텐셔미터의 점성 토크와 끝단에서의 부드러운 스토퍼, 토글 스위치의 짧고 확실한 경첩감은 모두 눈-손-귀 결합의 감각을 총체화한다. 신호가 스피커에 이르기 전, 사용자의 손가락은 기계의 내부와 음향을 예감하는 순서를 체화한다. 메카노필리아는 이 의식을 행위의 전조로 삼는다.
빛과 열, 그리고 시간은 메카노필리아가 구성하는 또 다른 삼항이다. 랙 안쪽의 파일럿 램프가 서서히 밝아지고, 진공 상태의 필라멘트나 표시창의 휘도 변화가 워밍업의 리듬을 제시할 때, 장치는 ‘숨을 쉰다’는 은유를 쉽게 획득한다. 통풍 슬롯을 통과하는 미열, 히트싱크를 타고 오르는 따뜻함, 팬의 극히 낮은 RPM이 만드는 바람의 기척은 사용자가 장치의 생기적 징후를 모니터하는 감각을 낳는다. 이 감각은 공학적 안정성의 신호가 아니라 작동 그 자체의 정동으로서 축적된다.
케이블링과 배선은 외설과 단정 사이를 오가는 의상이다. 두툼한 외피, 과장된 커넥터, 직조된 슬리브, 깔끔한 라우팅, 라벨링의 타이포그래피까지. 케이블은 보이지 않는 전자적 흐름을 시각적 도상으로 번역하며, 그 번역이 과도할수록 신호에 대한 신앙은 두꺼워진다. 랙의 위치, 전원 분배의 계층, 접지의 루프를 피하기 위한 장치적 거리두기까지 모든 ‘정리’는 곧 미학이다. 여기서 미학은 효율의 도식과 욕망의 도식이 포개지는 자리다. 질서가 쾌락이 되며 배치는 서사가 된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성애가 가치의 회로로 증폭된다. 한정판, 기념 각인, 중고 가격의 시계열 그래프는 에로틱한 도판이 되고 분해 사진은 내밀한 신체의 스너프 사진처럼 소비된다. 메카노필리아는 소유의 형식을 정당화하는 가장 교양 있는 언어가 된다. 장치의 아름다움은 은폐가 아니라 서술이 되고, 성애는 사적 소유의 회로를 벗어나 공유 가능한 프로토콜로 변환된다.
오래된 부르주아-자본주의적 기계 신체를 증강하여, 즉 사운드 재생 장치 시스템이 제공하는 가상에 합류함으로써 정보-생명으로 진화할 것인가?- 업믹스된 멀티 채널 시스템과 돌비 애트모스-비디오드롬![2] 혹은 기존의 우주에 남아 무작위하고 축 없는 과잉의 사운드 교차점에 유기적 신체를 맡겨 진화할 것인가?- 초월적 청취 시스템으로서 -크래쉬![3]
벡터의 분기점에서 각 계통은 다른 종으로 진화한다. 어찌되었든, 둘 모두 다른 종류의 플라스틱을 소화하는 새로운 장기를 생성한다.[4] 수렴진화. 각 종은 인류의 이종발생이지만 이 이종은 다시 (근친) 교배하여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탈부착 가능한 가상 체험 장치. 이는 가상과 현실의 감각적 차이와 기능적 경계가 오늘날 오히려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석
1)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사회적 기계의 세 가지 유형은 각각 특정한 유형의 표상을 생산하는데, 야만적 영토 기계는 흐름의 코딩에 해당하는 "함의-연결(connotation-connection)" 시스템을, 야만적 전제 기계는 오버코딩에 해당하는 "종속-분리(subordination-disjunction)" 시스템을, 그리고 문명 자본주의 기계는 흐름의 해독에 해당하는 "조정-접속(co-ordination-conjunction)" 시스템을 사용한다.[5] 분열분석(schizoanalysis)은 사회적 생산과 욕망-생산의 관계, 그리고 각 사회 형성에서의 이 관계의 변화를 흐름의 일반화된 이론을 통해 고찰할 것을 주장한다. 욕망은 결코 속을 수 없으며, 이익은 속을 수 있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6]
2)
애나 그린스팬(Anna Greenspan)의 『자본주의의 초월적 타임머신』은 2023년 미스카토닉 가상 대학 출판부에서 재간된, 2000년 워릭대 박사학위 논문에 기반한 저작으로, 초월적 시간 철학과 시간 기록의 사회-기술적 실천을 접속시키려 한다. 이에 따르면 칸트의 시간 개념, 즉 시간을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자 ‘내적 감관의 형식’으로 설정하고 변화로부터 분리한 조치는 사고를 ‘추상적 시간 생산’에 종속시켰다. 칸트의 도식론은 감성과 지성을 매개하는 ‘기능적 기계’로서 시간을 특정 결정에서 해방하고, 이 추상적 연결 평면이 근대 자본주의의 시간 체제와 수렴한다. 기계식 시계의 발명과 표준시(GMT)의 정립은 질적, 천문학적, 지역적 시간이 아닌 동질적, 양적, 세속적 시간을 확립하며 “시간=돈”의 등식이 산업 생산, 신용, 이자, 자본 흐름의 인프라가 되었다. 이로써 초월적 조건은 인간 주체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본주의의 기술적·문화적 기계들 속에서 구현된다. 칸트적 시간의 초월성, 자본주의적 시간 장치의 역사,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건 시간을 접속시켜, 그린스팬은 추상적 사유와 물질적 실천이 동일한 시간의 기계에서 작동함을 논증한다.[7] "그 누구도 추상적인 것 외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다".[8]

[1] J. G. Ballard, “Studio 5, The Stars,” Science Fantasy 15, no. 43 (February 1961).
[2] Videodrome, directed by David Cronenberg (1983; New York: The Criterion Collection, 2010), Blu-ray.
[3] Crash, directed by David Cronenberg (1996; New York: The Criterion Collection, 2020), Blu-ray.
[5]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nti-Oedipus (New York: Viking Press, 1977), 50.
[6] Ibid., 40.
[7] Anna Greenspan, Capitalism’s Transcendental Time Machine (Arkham, MA: Miskatonic Virtual University Press, 2023), 4~29.
[8] Ibid., 47.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관측과 사변 사이, 서정(抒情): 이수진 개인전 《폴리포니 클럽: 몬더그린 확장본》 (0) | 2025.12.20 |
|---|---|
| 연산하는 영혼, 확장된 표현의 회로에서 - 박다희 퍼포먼스 리뷰 (0) | 2025.12.16 |
| 디오니소스적 퓨쳐리즘(Dionysian Futurism) Ver. 2 (0) | 2025.08.04 |
| 피에르 위그 《리미널》 REVIEW: 외상과 역치의 (역)현실에서 (0) | 2025.08.02 |
| 회로 전시: 감각 기계와 (비)정향적 재귀 (0) | 2025.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