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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변적 디자인 (Speculative Design) - 베네딕트 싱글턴(Benedict Singleton)

원문은 다음 단행본에 수록되어 있음;
Robin Mackay, Luke Pendrell, and James Trafford, eds., Speculative Aesthetics (Falmouth: Urbanomic, 2014)

 

베네딕트 싱글턴(Benedict Singleton)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디자인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디자인의 산물로 촘촘하게 짜인 환경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그에 비해 기묘할 정도로 원시적이다. 사실 디자인 개념은 기술 철학의 정교한 분석에서조차 검증되지 않은 가설, 역사적 변덕, 그리고 은밀하게 잠입한 정치적 의도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디자인의 한계에 관한 몇 가지 사유를 시작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통상적으로 디자인의 한계는 그 적용 범위를 비생물적 재료에서 인간의 행동으로 확장하는 지점에서 설정되곤 한다.

 

필자가 이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은 2004~2005년경으로, 당시 많은 디자이너가 서비스나 조직을 디자인의 객체로 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발상은 1990년대 초반부터 존재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본질적으로는 불변한 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주류 담론에 이들이 편입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이것을 디지털 인터페이스 디자인 이후 등장한 지극히 현대적이고 신선한 흐름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른바 서비스 경제 혹은 지식 경제에 관한 논의가 무성했고, 디자인이 역사적으로 사회적 부식과 환경 파괴를 야기하는 소비주의의 하녀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자각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결말이 뻔한 플라스틱 폐기물을 양산하는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많은 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우리는 아주 오랜 기간 서비스를 위한 물리적 도구들을 제작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흐름은 단순히 서비스 웹사이트를 구축하거나 버스 좌석을 설계하는 차원을 넘어서고자 했다. 디자인은 '협력적'이어야 하며, 디자이너는 미학적 독재에 대한 열망을 버리고 비전문가와 협업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과거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했던 이들을 대등한 주체로 참여시키는 것이 곧 해방이자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경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집단은 공공 서비스를 '참여적' 구조로 재편하는 데 몰두하던 영국의 신노동당 정부와 같은 권력 주체들이었다.

 

당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가 호명되던 분위기 속에서, 예산 부족과 공공 및 제3섹터 클라이언트들의 불안감이 결합하였다. 그 결과, 이는 형태와 내용 면에서 당시 예술계의 '관계미학', 예컨대 노인들과 공동체 정원을 설계하는 식의 활동과 궤를 같이하며 표류하는 경향을 보였다.

 

필자는 서비스와 조직을 디자인의 매개체로 삼는다는 기본 아이디어가 실제 구현된 결과물들보다 훨씬 더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했다. 이 개념을 엄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는 곧 인간의 행동 자체를 디자인의 객체로 상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비스란 최소한의 요건으로 물적 토대 없이 두 사람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성립 가능한데, 만약 디자인이 서비스를 설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법률가, 정치인, 경제학자, 정신과 의사 등은 인간이 서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규범적 결정을 내리는 것을 직업적 본질로 삼는다. 그러나 디자인이 이러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철저한 금기로 간주된다. 실제 이 분야의 고위직 인사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행동 디자인'으로 해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완강히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설계가 특정 행동을 '장려'하거나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미묘한 개입이 행동 디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는 이 모순을 규명하고자 했으며, 그 방법론으로서 디자이너가 자신의 재료를 물리적 물질(나무, , 금속, 플라스틱, 픽셀 등)에서 인간으로 확장하려 할 때 발생하는 '의구심의 역사'를 추적해 보고자 했다.

 

오늘날 지배적인 의구심은 인간 행동을 디자인하는 행위가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인간을 '사물화'하고 행동을 하향식으로 규정하는 가학적 행위로 간주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반감은 공장 체제의 출현과 함께 형성되었다. 사람들이 인간과 사물을 비교할 때 염두에 두는 모델은 바로 공장 생산물이다. , 대체 가능하고, 익명적이며, 행동 양식이 철저히 규격화된 객체 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이 기계의 작동 원리에 종속되어야 했던 공장 환경이 도덕적 공분을 촉발한 것이다. 당시의 지형 속에서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이질적인 침입이었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단순히 푸코적인 판옵티콘적 감시 체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신체 훼손의 위협 속에서 기계의 작동 역학에 물리적으로 영합해야만 했다.

 

따라서 노동 착취의 고발이든, 세계를 '부품화된 자원'으로 치환하는 기술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든, 공장 체제 이후의 모든 담론은 인간과 사물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는 지점으로 수렴된다. 사물은 인간의 순종적인 하인이어야 하며, 이 위계가 붕괴될 때 인간은 기술이 요구하는 제스처와 속도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객체화(objectification)'는 곧 '비인간화'와 동의어가 된다. 인간 행동의 디자인이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명확하며, 여기에 20세기의 테일러리즘과 전체주의가 결합하면서 그 부정적 함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유는 마르크스, 하이데거,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왔다. 그 뿌리는 18~19세기 전환기의 러다이트 운동가들의 언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전의 관점은 이와 상이하다. 전근대 및 비서구적 사고 전통에서는 오늘날의 디자이너에 해당하는 존재들에 대해 전혀 다른 종류의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공장 체제가 대체한 '숙련 기술(craft)'은 오늘날 정직하고 건전한 노동으로 추앙받지만, 이는 사실 공장 체제가 만들어낸 사후적 신화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기술적 기예에 대한 관념은 그 나름의 비판적 패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현대 영어에서도 'craft(기예)' 'crafty(교활한)', 'design(설계)' 'having designs on(수작을 부리다)', 'fabrication(제작/위조)' 등의 어휘적 연결고리를 통해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어디인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발견되는 관점이다. 기원전 350년경 플라톤이 저술한 『법률』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시민들에게 '(trap)'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덫을 제작하는 행위는 동물의 식습관 같은 환경 내의 특정 경향성을 파악하고 이를 우회적으로 조작하는 특수한 지능을 함양하기 때문이다. 덫은 먹잇감을 물리적으로 압도하여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먹잇감의 탈출 시도가 오히려 올가미를 조이게 만드는 식으로 대상의 힘을 역이용하여 스스로 파멸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덫은 약자가 강자를 전복하는 수단이자 반란의 논리를 체현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논리가 단순히 덫에 국한되지 않고 인공물(artifice) 일반, 즉 디자인 전반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덫을 설계하는 행위'와 같다. 대장간 일이나 직조 역시 재료의 속성을 기만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이며, 이 재료에는 인간 또한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교활한 독창성을 '메티스(mêtis)'라 명명했다. 이는 척박하고 가변적인 상황 속에서 비범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지능을 의미한다.

 

만약 이 개념이 전통적 의미의 디자인을 인간사로 연결한다면, 그것은 음모, 결탁, 쿠데타, 게릴라전 등과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 이는 대개 정상적인 질서로부터의 일탈로 간주된다. 서구의 지적 전통은 플라톤 이래로 이러한 '메티스'에 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억압해 왔다. 우리는 '목적'에 몰두하느라 '수단'에 관한 지적 결손을 방치했다. 서구 정치 이론은 대개 현재의 결핍과 이상적 미래를 대조하는 데 치중할 뿐, 그 사이를 잇는 이행의 과정, '수단의 논리'에 대해서는 빈약한 설명만을 제시한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격언이 진부해진 현실은 우리의 인지적 우선순위가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를 방증한다. 반면 메티스는 철저히 '수단의 논리'이며, 실질적으로 사태를 진전시키는 방식에 관한 일반 도식이다.

 

이러한 함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사변적 디자인(Speculative Design)의 과업이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제공하며, 현대 철학의 흐름과도 조응한다. 세상을 불투명한 환경으로 간주하고, 사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극단적 가설이라는 귀추적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 CCRU의 논의와 궤를 같이한다. 만약 철학이 세상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여 그 수법을 재구성하는 '법의학'적 세계관을 견지한다면, 사변적 디자인은 이를 반전시켜 음모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음모를 '구성'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모든 홈즈(Holmes)에게는 그에 대적할 모리아티(Moriarty)가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