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은 다음과 같다. Eugene Thacker. 'Black Infinity; Or, Oil Discovers Humans'.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 ed. Ed Keller, Nicola Masciandaro, & Eugene Thacker (New York: puctum books) p. 173 ~ 180.
유진 대커- 검은 무한성: 혹은, 석유의 인간 발견
(Eugene Thacker - BLACK INFINITY; OR, OIL DISCOVERS HUMANS)
번역: 윤태균
1964년, 호러 및 판타지 작가 프리츠 라이버(Fritz Leiber)는 "블랙 곤돌리에(Black Gondolier)"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이 이야기는 아캄 하우스 앤솔로지(Arkham House anthology) 《Over the Edge》에 실렸고, 이후 에이스 출판사(ACE)의 더블 볼륨 《Night Monsters》에 재수록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이름이 없는 화자는 그의 친구 댈러웨이의 미스테리한 실종 사건에 관해 말한다. 댈러웨이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유전 근처에 사는 은둔자이자 독학자였다. 댈러웨이는 석유에 대한 기이하고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그는 석유의 단순한 천연 자원으로서 가치나 지정학적 가치가 아닌 고대의 신비롭고 숨겨진 세계의 징후로서의 석유에 집착한다. 댈러웨이와 화자의 대화는 점차적으로 신비주의적인 환상의 형식이 되며, 댈러웨이는 이를 일종의 고딕적 장례식 같은 음산한 느낌의 끈적이는 액체(ooze)로 묘사한다.
“… 모든 생명의 검고 사악한 본질, 사실상 궁극적이고 불가사의한 과거의 거대하고 깊은 검은 무덤을 구성하며, 가장 어두운 유령들을 품고, 석유은 수억 년 동안 기다려왔다. 검은 꿈을 꾸며, 지구의 돌로 된 피부 아래에서 느릿느릿 맥동하며, 빛 없는 웅덩이와 늪 가스에 덮인 지하와 암석 저수지를 가득 채우고 수많은 통로를 통해 흐르며…”[1]
석유가 은밀하게 기다리는 듯한 이 모습은 석유의 이미지에 모호하게 비밀스럽고 의도적인 특성을 부여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석유의 사악한 의도를 표현한다. 라이버의 과장된 문체에서 석유는 냉전 시대의 괴물 영화에서 보이는, 지구 표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부로서 표현되지 않는다. 대신, ‘블랙 곤돌리에’에서 석유는 이미 표면에 있는 생동하는 액체로 묘사되며, 현대 산업 문명의 모든 통로자연스럽게 흐른다. 여기에는 주요 도시에 석유를 공급하는 중앙 파이프라인부터, 그 도시를 구성하는 개별 가정과 자동차까지 포함된다. 이야기의 한 지점에서, 화자는 댈러웨이의 다소 엉뚱한 이론들을 일관성 있는 형태로 정리하려고 한다.
“댈러웨이의 이론은 그의 세계 역사, 지질학, 그리고 오컬트에 대한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원유—석유—는 단순히 산업과 현대 세계, 현대의 전쟁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생명혈(life-blood)’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는 희미한 생명과 의지를 가진 무기억적 또는 무의식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모두 그 꼭두각시나 피조물이며, 그 화학적 정신이 현대 기술 문명의 발전을 이끌고 심지어 강요해왔다고 주장했다.”[2]
“간단히 말해서,” 화자는 결론짓는다, “댈러웨이의 이론은 인간이 석유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석유가 인간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3]
라이버의 소설 중심에는 인간과 불가사의한, 즉 인간 사유의 지평을 구성하는 다른 무엇 간의 전복이 있다. 이 '다른 무엇'을 비인간(unhuman)이라고 부르자. 비인간은 단순히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동물, 기계, 바다, 도시 등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가 라이버의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비인간이 아니다. 또한 비인간은 인간의 모습을 가진 것도 아니다. 즉 깃털이 없고, 두 발로 걷고 말하는 석유 덩어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이런 모습도 라이버의 이야기에서 암시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비인간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의인법(anthropomorphism)이라는 두 가지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비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한계가 없는 개념으로, 언제나 도달하려 하지만 결코 인간의 사유 범위 안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라이버의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비인간의 네 가지 단계를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비인간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에서 댈러웨이가 설명하는 현대 산업 자본주의의 규범적 세계이다. 비인간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문명 안에서 살아가면서 주변 세계에 대해 일방적이고 도구적인 관계를 가진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이 관계는 (인간의) 인간중심적인 전복(anthropic subversion)에 의존한다. 비인간은 오로지 인간의 범위 내에서만 존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이 항상 인간의 지식과 기술에 완전히 포괄되기 때문에 인간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비인간은 인간 지식의 지배를 받고 인간 지식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이다. 이 수준에서 인간중심주의는 거의 완벽하게 의인법과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라이버의 소설은 점차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면서, 인간과 비인간 관계의 전복을 통해 비인간의 개념을 탐구한다. 라이버의 이야기에서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석유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석유가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석유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뒤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구를 사용하는 대신, 지구가 인간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지구가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와 같은 통찰을 통해서라면 과학, 기술, 경제에 대한 인간의 분투 등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관계의 용어들은 여전히 “인간적”이다—의도성, 도구적 합리성, 심지어는 사악함이라는 감각까지도 특색 없는 석유의 끈적거림에 부여된다. 비인간은 오히려 인간의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인간중심적 전치(anthropic inversion)이라 부를 수 있다. 인간중심적 전치는 비인간의 개념이 출현할 수 있게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능성과 의도성과 같은 인간적 범주 안으로 환원된다.
라이버의 소설 끝부분에서, 이 인간중심적 전치는 또 다른 전환을 겪으며 비인간을 만나는 세 번째 단계로 이어진다. 댈러웨이가 석유와 심연이 하나로 결합되는 끈적거리는 밤으로 기묘하게 끌려가면서, 모든 수평선이 부패한 검은 희미함 속에서 지워지고, 댈러웨이의 개체성은 사라지고 휩쓸려 간다. 이 순간, 그는 인간의 생명, 정신, 기술 범주가 사실상 비인간의 하나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인류 중심적 전복(인간이 석유를 사용하지 않고, 석유가 인간을 사용하는)과는 달리, 여기서 댈러웨이는 또 다른 형태의 전복을 경험하게 되며, 그것은 발생론적 전치(ontogenic inversion)로서, 모든 인간이 비인간의 한 사례로 드러난다. 발생론적 전복은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발생론적(ontogenetic)이다. 인간으로부터 사유를 배제하는 동시에, 인간의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인 특성의 징후를 의미한다. 발생론적 전치에서 인간은 단지 비인간의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사유는 불안정해지며, 우리는 "인간적대적 제거(misanthropic subtraction)"라고 부를 수 있는 네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 언어는 오직 부정적인 용어(“이름 없는(nameless),” “형식 없는(formless),” “생명 없는(lifeless)”)를 통해서만 계속될 수 있으며, 이들 용어는 스스로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실패는 초자연적 공포와 기이한 소설의 문학 전통에서 큰 효과를 발휘한다. 알저넌 블랙우드(Algernon Blackwood), 윌리엄 호프 호지슨(William Hope Hodgson), 그리고 물론 H.P. 러브크래프트(H.P. Lovecraft )와 같은 작가들은 언어를 이 한계점까지 몰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주 사용되는 두 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미니멀리즘 전략으로, 언어에서 모든 속성을 제거하여 “이름 없는 것,” “형체 없는 것,” 또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과 같은 골격만 남긴다. 또 다른 전략은 과장법(hyperbole)으로, 비인간의 알 수 없음이 바로크적 수사들의 연쇄를 통해 표현되며, 이들 모두는 궁극적으로 비인간을 인간의 사유와 언어로 규명하는 데 실패한다. 다음은 러브크래프트의 예시들이다.
“…빛 한줄기 없는 어둠 속 밀턴 풍(Miltonic) 기형의 저주받은 자들…
…이름 없는 혐오스러운 고대의 제사장들…
…지구의 심연에서 부패하는, 반쯤 물질적이고 이질적인 것들…
…혐오스러운 소리와 완전히 물질적으로 실체화된 검은 어둠의 판데모니엄(pandeamoniae) 소용돌이…”
종종 이 두 가지 전략—미니멀리즘과 과장법—은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의 불안정함에 관한 단일한 직관으로 합일된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The Unnamable’의 끝에서, 한 인물은 병상에서 친구 카터에게 자신의 기이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니, 전혀 그런 게 아니야. 그것은 어디에나 있었어. 젤라틴 같은, 슬라임 같은, 그렇지만 형태가 있었어. 기억을 초월하는 천 가지 형태의 공포가. 눈들이 있었고, 흠집이 있었어. 그것은 구덩이였어. 소용돌이였어. 궁극적 혐오였어. 카터,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어!”[4]
이 비인간의 네 가지 단계를 종합하면, 모든 사고의 한계를 사고하는 역설적인 직관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중심적 전복 단계인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 한계가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고, 비밀스럽고,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중심적 전치 단계인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 한계가 조건을 역전시키면서 전면에 드러나지만, 관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비인간은 여전히 숨겨져 있으며, 최선의 경우 간접적으로만 알려지며, 인간의 용어(예: 자각, 의도, 악의 등)를 임시로 사용하여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서는 발생론적 전치가 인간적대적 인식을 만들어 낸다. 이는 비인간이 인간에 대해 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이 인식은 네 번째 단계인 인간적대적 제거로 이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관계 자체가 역전된다. 여기서 비인간은 간접적으로도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직관되고 사유된다. 그러나 오직 모든 속성이 제거된 방식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 사유되는 것은 오직 이 절대적인 접근불가능성, 이 절대적인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며, 확립되는 것은 오직 부정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낯선 형식의 직관이며, 그 핵심에는 근본적인 반인간적(antihumanistic) 인식이 있다. 이는 인간 지식과 그것의 상대적인 사고의 지평에 대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거나(unthinkable), 실제로는 검은 계몽(black illumination)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비주의적 직관이다.[5] 검은 계몽은 인간에서 비인간으로의 전환을 이끌지만, 동시에 이미 비인간이거나 비인간의 한 사례이다. 검은 계몽은 비인간 내에서 인간의 확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대신 비인간의 무관심으로 열려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입장을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라고 언급한다). 비인간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비인간의 인간중심성), 또한 우리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비인간의 반인류적 성향). 검은 계몽은 무관심의 내재적 사고로 이어진다. 비인간은 그 한계에서 인간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무관심과 동일해지며, 동시에 이 무관심한 비인간은 또한 인간 내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초자연적 공포에서의 검은 계몽은 일반화된 인간적대적(misanthropy)인 흔적을 지니며, 철학과 호러가 서로를 부정하고 동시에 동일해지는 순간을 나타낸다.
[1] Fritz Leiber, “Black Gondolier,” in Night Monsters (New York: Ace, 1969), 14.
[2] Leiber, “Black Gondolier,” 14.
[3] Leiber, “Black Gondolier,” 15.
[4] H. P. Lovecraft, “The Unnamable,” in The Dreams in the Witch-House and Other Stories, ed. S.T. Joshi (New York: Penguin, 2004), p. 89.
[5] [역자] 닉 랜드(Nick Land)의 ‘암흑 계몽주의(Dark Enlightenment)’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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