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Garton, 윤태균 (역)
Vincent Garton은 『Leviathan Rots』에서 시작해 『Machine Decision is Not Final』에 수록된 "Automaticity and the Mystery of State" 장을 예고하며, 리버럴리즘의 무혈한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끝까지 탐구한다.
21세기 전환기에서 리버럴리즘은 거의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반동적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 속에서 구질서의 복원이 임박하게, 자연스럽게, 저항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완전히 창조적인 은밀한 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¹ 그는 역사가 필연적으로 정통성의 권리를 확립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200년의 시간이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리버럴리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은밀한 힘이 작동했든 간에, 그것은 리버럴리즘을 방해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리버럴리즘에 수많은 승리가 귀속되었지만, 엄밀한 지적 체계로서의 리버럴리즘은 여전히 정의하기 어렵다. 역사가들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리버럴 정전(canon)’이 실제로는 훨씬 최근에 형성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존 로크(John Locke)는 오늘날 리버럴 사상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지만, 영국의 위그 계몽주의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부끄럽거나 꺼려지는 인물로 여겨졌다.²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헤겔(Hegel)은 오랫동안 반리버럴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으며, 빅토리아 시대 말기 영국 대학에서 지배적이었지만, 대부분은 프로이센 권위주의의 하수인으로 여겨지며 퇴출당했다.많은 사람들은 이제 리버럴리즘을 넘어서는 사유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리버럴리즘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리버럴리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일부 좌파 작가들은 ‘리버럴리즘’을 비난의 용어로 사용하며, 그것을 피상적인 비판의 이데올로기로, 의미 있는 행동을 회피하는 태도로 본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리버럴리즘이 재산 소유자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노예 소유자와 부르주아 억압의 피로 물든 이해관계를 세련된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리버럴리즘—‘고전적 리버럴리즘’—은 헌법주의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정부 개입의 제한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특히 미국에서 ‘리버럴리즘’이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지지하기 위한 국가 개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종종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접근하거나 최소한 그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그것을 언어의 우위로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리버럴리즘이 장려하는 재산권은 사회적 관계를 법의 투명한 언어로 새긴 것이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지적하듯, 의미 있는 정치적 행동을 주저하는 것은 언어가 행동을 가로막는 결과라고 주장된다. 정부의 핵심적인 통제 지점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으며, 혹은 그것을 확장해 동일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언어의 우위만으로 리버럴리즘을 총체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기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리버럴리즘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리버럴리즘에 대한 언어적 이론을 고려할 때, 법이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법의 지배’는 전형적인 리버럴리즘의 이상이다. 이는 군주가 법을 구현하는 존재였던 오래된 격언의 반대 개념이다. 군주나 황제가 법을 창조하는 대신, 이제는 법 자체가 판사를 통해 말해야 하며, 그 언어는 객관적이고 정밀하며 투명해야 한다. 이는 결정보다 규범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며, 이는 서면으로 기록된 단어에 구현된 규범이다.
과거의 정의 개념은 이제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시리아 연구자들은 함무라비 법전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법이 아니었고, 심지어 선례의 체계적인 기록도 아니었음을 밝혔다. 그보다는 주권자의 관대한 정의를 보여주는 승리의 임의적 사례로 여겨졌다.³ 그리고 중국의 법가들이 임의적 의지에서 벗어나 투명한 서면 법을 추구했을 때, 진 왕조의 암울한 기록은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야망이 현실적 한계를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리버럴리즘의 법치 개념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으로 독특하다. 이는 확정된 법전이나 판례법의 복잡한 기록물에 구현될 수 있다.
리버럴리즘의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주장은 언제나 표현의 자유와 반대 의견에 대한 관용이었다. 리버럴리즘은 의회 정치이며, 의회는 ‘언어의 공간’이다. 이 주장은 논의된 질문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리버럴리즘은 결말에 도달하지 않는 농담과 같다. 리버럴리즘은 언어를 정치 생활의 중심, 나아가 목표로 삼아 정당화한 것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점은 비판자들에 의해 분명히 인식되었다.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표현의 자유를 중산층의 집착으로 신랄하게 비난한다.⁴ 니체(Nietzsche) 역시 ‘의회적 무의미’의 정치와 아침 식사 중 신문을 읽는 ‘존경스러운 의무’를 조롱했다.⁵
예전에는 한가로운 귀족과 성직자만이 누리던 특권이었던 정치적 글쓰기와 발언은 이제 리버럴 시민의 근본적인 의무가 되었다. 이 관점에서 정치적 시위는 주로 관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 행동은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 글쓰기도 중요하며, 이는 단순한 체크 표시일지라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국민투표에서 투표용지에 남긴 얼룩조차도 집단적 동의를 표현하는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동의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사용된 공식적 환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버럴리즘 시대의 투표는 대신 합리적이고 개별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읽혀야 한다. 모든 투표는 고유한 진술이며,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언어적 시뮬레이션으로 새겨진다.
리버럴리즘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개념적으로, 리버럴리즘의 등장은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가 ‘합성 병렬(parathesis)’이라고 명명한 변증법적 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인간 사유의 역사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상반된 응답의 상호작용에 의해 추동되며, 이는 흔히 ‘정명(正名, thesis)과 반명(反名, antithesis)’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병렬적(parathetical)’ 사고는 상반된 입장을 동시에 주장하며 절충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성경에서 가장 명확한 부정적 형태의 병렬 논증은 바울(St. Paul)의 말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실체는 신의 임의적 의지에 불과하며, 그리스인들에게는 현실이 원인과 결과의 영원한 기계 장치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철학은 이러한 병렬적 형식을 취하며, 양극단의 위험한 반대 주장들을 극복하고자 중간 지점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중세 이후,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대적’ 신학과 ‘그리스적’ 과학의 상반된 주장을 조화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분투했다.
철학에서 이 노력은 결국 칸트에 의해 결론에 도달한다. 칸트의 체계에서 철학은 특정한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를 비판하는 방법, 즉 비판적 방법으로 정의된다. 모든 철학적 입장은 결국 이 비판적 방법의 다양한 표현으로 환원된다. 이 방법은 끝이 없으며, 코제브의 말처럼 “칸트와 함께 말하는 것은 끝없이, 영원히 모순 없이 말하는 것”이다.⁶
리버럴리즘이 비모순적 언어의 체계라면, 좌우 양쪽의 반대자들이 상징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권적 현실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리버럴 민주주의가 국민과의 동일화를 언어로 표현한다면, 급진 민주주의의 주요한 응답은 이 상징의 연쇄를 분해하고, 중개되지 않은 직접적 의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 경제학자들은 리버럴리즘의 형식적 정의와 평등의 수사가 부당하고 폭력적인 물질적 현실을 가리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러한 비판을 인식한 20세기 리버럴리스트들은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고, 그들의 물질적 기반을 리버럴리즘의 언어가 암시하는 이상과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리버럴리즘의 내재화’라고 명명한 전환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대표 선출은 민주적 절차가 아닌 과두제적 절차로 명백하게 여겨졌다. 권력의 순환은 중세 이탈리아 귀족들 사이에서도 흔히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중을 참여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리버럴 언어의 비현실성에 대한 비판은 본질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리버럴리즘은 단지 필연성의 물리학을 해체하려는 실패한 시도가 아니다. 실제로 리버럴리즘은 새로운 삶의 영역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필연적 사실의 지배에서 벗어나 언어적 임의성으로 해체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현실 자체의 해체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은 완벽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저항 세력들이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언어적 흐름의 확장을 방해하는 자기 모순을 만들어냈다. 리버럴 정치 이론의 중심 과제 중 하나는 추상적 구문 속에 집단적 권리를 통합하는 것이다. 이 권리들은 종족, 국가, 가족과 같은 필연적 현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수자 권리’라는 오래된 전략이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이러한 본질적 특성들을 ‘해체’해 임의적인 언어적 술어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첫 번째 해결책은 완전하지 않으며, 두 번째 해결책은 성공적으로 일반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해체 작업이 스스로를 겨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이 완성되지 않는 한, 가장 오래된 정치적 형태들은 리버럴리즘의 언어적 네트워크 내에서 계속 재등장할 것이다. 명백한 현재 사례 중 하나는 서구, 특히 미국이 중국 노동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 주로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려는 오래된 이교적 충동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규칙 기반 국제 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라는 추상적 형식 속에서도 이 우월성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리버럴리즘의 근본적 성취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업의 순환을 제한하고 재구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과거에 대체한 구체제와 더욱 유사해진다.
그러나 이는 단지 발전의 부족 또는 세련되지 않은 문제일 뿐이다. 현대 리버럴리즘이 직면한 더 중요한 내부 모순은 그 자체의 확장에 따른 의미 상실에서 비롯된다. 기호가 지시 대상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무의미함의 상태가 발생한다. 시뮬레이션은 더 이상 시뮬레이션하지 않는다. 결말 없는 농담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 즉 소리일 뿐이며, 이는 청중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언정 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언어의 비합리성은 완화하기 어려워졌으며, 이는 종종 정치적 반대자들의 야망과 결부되어 불순하게 묘사되었다.
즉각적인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현상을 헤드라인으로 응축하고 이를 반응적으로 재생산하는 언어적 응답의 확산을 가속화했다. 이는 인쇄 저널의 발명으로 시작된 과정의 다음 단계에 불과하며, 그 속도는 실질적 의미의 상실과 함께 발전해 왔다. 마지막 결론은 거대한 언어 모델(LLM)의 등장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인공지능’의 전형적인 형태로 자리 잡는다. 이는 리버럴리즘의 중심 활동인 언어 생산의 결정적 자동화이다. 그러나 이 과정의 가속은 결과물의 황폐화를 초래하며, 작업이 완성될 수 없는 경우 이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회의론자들은 LLM(거대 언어 모델)의 산출물이 인간의 사고를 단순히 흉내 낸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추정하는 것보다 적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모델들은 형식적으로는 인간의 글쓰기를 닮았지만, 내용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결과물은 ‘환각(hallucinations)’이라 불리는 인위적 산물로 간주된다. LLM이 스스로의 산출물에 노출될 때, 이들은 빠르게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훈련 데이터의 상당 부분을 이러한 산출물이 차지하게 되는 현재 상황에서 특히 문제가 된다. 기호가 가속화될수록 그 의미는 사라지며, 이 과정에서 현실은 점차 붕괴된다.
리버럴 철학자나 소피스트의 끝없는 발언은 두 가지 방식으로 끝날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을 통해서이다. 끝없는 논쟁은 영원한 생명을 전제로 하며, 리버럴 사회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배제해 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 즉 자신의 생명을 걸 준비가 된 상황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진다. 이삭(Isaac) 위에 놓인 칼처럼, 죽음의 부재는 리버럴 정치의 게임 같은 진지하지 못한 특성을 강화한다. 고대 로마인, 타밀 왕조의 군주, 중국 학자 모두 실패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독교적 보편주의와 비인간적 국가 기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리버럴 민주주의는 책임을 분산하는 고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구축했다. 이러한 사실이 정치적 체제의 회복력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죽음의 부재는 결국 무제한적인 언어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
인류의 멸종은 진정한 의미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역사적 결말이 아닌, 끝없는 존재의 반복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결과는 자유의 종언과 인간 역사의 끝을 동시에 가져올 것이다. 생물학적 삶은 본질적으로 죽음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죽음이 없는 인간 삶의 시뮬라크르, 즉 영원한 삶은 결국 삶을 대표할 수 없다. 이 점은 자명하지만, 이 오류와 비현실성은 리버럴리즘 내에서 본질적이다.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단편적 사고의 상징이며, 이는 동등한 부정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리버럴 언어의 흐름이 끝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의 완벽한 완성을 통해서이다. 이 경우 기호의 네트워크는 자족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시뮬레이션이 자족적인 의미에 도달하면, 더 이상 의미 상실과 해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헤겔은 이러한 가능성을 예견했으나, 그것을 공자의 기호 우주에서 발견하고 경계했다. 이는 단일한 선형 방법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 J. de Maistre, Considerations on France, tr. R. A. Lebru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05.
- D. Bell, ‘What Is Liberalism?’, Political Theory 42 (2014): 682–715.
- See the overview in L. S. Fried, The Priest and the Great King: Temple–Palace Relations in the Persian Empire (Winona Lake: Eisenbrauns, 2004), 34–35.
- C. Schmitt, Political Theology: Four Chapters on the Concept of Sovereignty, tr. G. Schwab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62. See also C. Schmitt et al., ‘Diskussion über “Presse und öffentliche Meinung”‘, in Verhandlungen des 7. Deutschen Soziologentages vom 28. September bis 1. Oktober 1930 in Berlin: Vorträge und Diskussionen in der Hauptversammlung und in den Sitzungen der Untergruppen (Tübingen: Mohr Siebeck, 1931) 57–58.
- F. 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tr. I. Johnston, Part VI, §208, <http://johnstoniatexts.x10host.com/nietzsche/beyondgoodandevil6html.html>.
- A. Kojève, Essai d’une histoire raisonnée de la philosophie païenne. 1: Les Présocratiques (Paris: Gallimard, 1968),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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