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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유세은 개인전 《𝔽𝕝𝕚𝕔𝕜𝕖𝕣 𝕍𝕠𝕚𝕕》 서문

윤태균(큐레이터)

 

 - +의 교차. 0 1의 연속적 맞닿음.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빛의 깜빡거림(flicker)은 착란을 유발한다.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 이 착란의 기원이다. 빛과 빛 사이의 어둠, 그 공허의 지점은 의식의 연속성을 무너뜨리는 무저갱(abyss)이다. 이미지가 나타나는 그 빛의 순간은 언어로 포획할 수 있지만, 이미지가 사라지는 어둠의 순간은 감각 정보가 없는 무료한 지점이다. 따라서 뇌가 기억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면, 뇌는 의식 안에서 어둠을 메꾸거나 제거해야 한다. 기억의 연속, 즉 이야기가 개인 의식의 통일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점멸의 순간마다 망각이 발생한다면 의식은 수많은 이야기들로 쪼개져 한 명의 개체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뇌는 막 소멸한 그 빛을 잊지 않기 위해, 다음 생성된 빛을 이전의 빛에 접합한다. 없음과 있음 사이의 공허는 후두엽이 생성해 낸 환각으로 정복된다. 우리는 왜 망각을 두려워하는가? 사실 망각은 신경 회로의 단거리 폭주를 예방하는 최적화 작용이다. 축적된 정보의 과다는 신경 회로와 그 커널인 뇌를 과열시킨다.

 

 한편, 광학 테크놀로지와 이미지 산업은 망각을 방지하기 위해 공허의 틈을 좁히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아왔다. 초당 프레임 수(fps, frames per second)의 증가는 망각 자체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보다 매끄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했다. 망각 자체의 망각. 이 과정은 망각을 퇴출하기 보다는, 기억과 망각의 상호 전환 속도를 더욱 빠르고 반복적으로 만든다. 공허의 틈을 좁힘으로써 의식이 빠져들어 망각에 잠식되기 전에 다시 빛으로 인양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기계로서의 우리에게 내장된 커널-뇌는 이 반복 과정의 속도를 처리할 수 있는가? 틈이 보이지 않는 빛의 연쇄에서 모든 이미지를 언어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까?

 

 유세은의 회화면에서, 이미지의 시간적, 공간적 편린은 점멸한다. 각 형상 레이어의 비연속적 분리가 망막에서의 점멸을 가능케 한다. 캔버스 위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그리고 순간순간 사라지는 빛-형상들. 유세은이 다루는 것은 이미지의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의 위상(phase)이다. -형상들은 이곳저곳 나타나거나, 서로 겹치거나, 반전되거나, 깜빡거리며 그 시공간 사이에 의미의 공백- 즉 공허를 만들어 낸다.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 형상과 형상 사이, 배경과 배경 사이,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 이 비연속적 배치는 구체적인 서사를 지시하지 않는다. 이 공허의 가치는 의미의 합일을 위한 착란이 아니라 의미의 낭비와 망각에 있다. 각 이미지 에셋, 각종 그래픽 조각, 배경은 조형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놓여 있지만 이질적인 해상도와 재현 방식을 통해 후두부의 의미 형성 이전 단계에 남는다. 보이진 않지만, 유세은의 회화에서 달의 뒷면-공허는 분명히 실재한다. 의미의 잠재성은 공허에 매복한다. 그리고, 회화 안의 이질적 그래픽 유닛에 서사를 부여하는 역할은 오로지 심연의 무한한 사변에게 맡겨진다.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사이의 공허는 무()가 아니다. 관측되지 않은 입자(particle)의 안개가 자욱한 장(field)이다. 빛에 부여되는 의미는 흐르며 미끄러지지만, 그것이 놓인 맥락에 의해 어느 순간 고체화된다. 그러나 공허는 끊임없이 흐르는 액체가 담긴,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조이다. 그러므로 망각은 의미를 제거하기보다는 의미를 공허로 해방하여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카오스는 빛의 그림자가 아니라, 사실 빛이 탄생한 무한한 우주이자 의미가 탄생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미 형성 과정은 빛의 점멸이 아니라, 어둠의 점멸이라 말할 수 있다. 공허를 받아들이기는 의식의 반전을 긍정한다. 그러한 면에서, 유세은은 의미의 사슬로 모든 빛들을 빈틈 없이 체결하기보다, 의미가 해방되는 그 어둠의 영역을 현실의 일부로 편입한다. 따라서 유세은의 회화는 점멸하는 이미지 네트워크의 초현실적 재현이다. 빠르게 반복되는 망각, 즉 분열증을 받아들인다면, 의미의 연속적-변증법적 서사라는 폐쇄적 루프에 갇힌 개개의 찰나를 보다 넓은 의미의 원천으로 해방할 수 있다.

 

유세은 개인전 《𝔽𝕝𝕚𝕔𝕜𝕖𝕣 𝕍𝕠𝕚𝕕》
《҉F҉l҉i҉c҉k҉e҉r҉ ҉V҉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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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6. ~ 2024. 11. 24. (월, 화 휴관) ҉
13:00 - 18:00
팩션 (서울특별시 삼선동 5가 4 지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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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윤태균
디자인: 유세은
사진 촬영: 익수케
주최: 팩션
후원: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