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노말 오페라- 서막
Paranormal Opera
2022
제작: 윤태균 (기획/비평)
유령과 환영
예술은 항상 유령이었다.
이 유령은 망각되어 현재와 단절된 시간들, 경험할 수 없는 공간에 잠재하는 것들을,
자신의 환영으로 암시한다.
유령은 단절된 시공간을 지금 여기와 매개함과 동시에
그것을 감각적인 서사로 통합하는 환영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유령으로서, 예술은 이 강력한 영매 과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작품은 스스로가 가진 조형의 환영성으로 자신의 서사적 맥락을 암시한다.
작품이 제작된 시공간으로의 사유 통로를 ‘서사 요소들의 힘과 관계들’로 드러내 보인다.
유령은 우리가 내재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그리고 포착하는 현실의 환영적 알레고리인 것이다.
이 유령들은 결코 세계의 단순한 모사가 아니다. 우리와 뒤얽혀 있는,
세계의 맥락으로 향하는 관계들의 단면이다.
그렇기에 예술에서 ‘유령’은 현상의 방식이다.
유령은 자신이 소환하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지시하기 보다는,
선후 관계를 갖지 않는 의도와 행위, 작품과 맥락이 서로를 자극한다.
유령은 얽힌 물질과 서사의 환영적 덩어리이다.
우리는 이 덩어리들을 감각하며 우리가 필연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작가마저 예측할 수 없었던 무수한 힘의 관계들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유령이 무엇을 위해 출몰하는지,
혹은 어떤 것의 망령인지 고정된 언어로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유령의 환영이 보여주는 존재와 인식, 행위와 동기, 물질과 사유가 뒤얽힌 총체적 세계를 이미지로 이해한다.
이 모호한 환영으로서의 유령은 스스로가 위치한 현실의 다종다양한 서사를 열어젖히는 ‘마법같은 힘’을 갖는 것이다.
타인과 주체, 자아와 객체라는 구분된 범주들은 수행적으로 얽힌 총체적 장(field)에서 환영으로 다가온다.
위의 범주들이 총체적으로 얽힌 모호한 이미지-물질의 구분된 덩어리를 유령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 덩어리를 감각적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환영성이다.
현상의 포착은 환영으로 재현된다.
몽타주, 유물, 수집, 기억.
환영성은 예술의 시작부터 그 고유한 특징이었다.
동굴 벽화는 인류가 자신들의 물질적 환경을 표출하고 투영하기 위한 기억 장치, 혹은 그 물질적 상황의 소환 장치였다.
그러나 유령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즉 환영이다.
유령, 환영, 근원. 그것은 본래 하나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은 모두 유령이자, 실재이다.
유령은 떠도는 입자들의 구획이다.
그것은 관측되어야만 비로소 환영으로 나타난다.
환영은 세계를 관측한 결과값이며 세계가 우리에게 침투한 결과값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세계를 관측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세계의 수행적 변화에 관여하며 세계도 그러하다.
기억과 욕망
천체 지도를 보면 그것이 그려진 시기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구에서 바라본 별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그린 이 천체 지도는 마치 사진과 같이, 당시의 하늘의 순간을 포획한 지표(index)와 같다.
그리고, 오래된 재현과 묘사의 흔적은 뒤러의 기억이자 당시 물질적 세계의 전사(轉寫)이다.
지구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마치 회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별들의 위치는
그 순간에만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도의 고고학은 우리를 그의 시공간으로 매개한다.
하지만 하늘만이 우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상식처럼, 지구도 공전하고, 자전한다. 광활한 우주에서 배회하는 수많은 천체들 중 하나에서
우리는 그 흐름들 사이의 내부 기록자인 것이다.
운동하는 우주의 흐름들 ‘속’에서,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포착하고 기록해왔다.
그렇기에 기억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지도와 예술은 다를 바 없다.
이 천체 지도는 뒤러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다종다양하게 뒤얽힌 물질들의 기억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기억과 기록의 행위들은, 어쩌면 물질이 우리의 의식을 통해 세계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재현된 기록들은 인간 의식에 침투한 세계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세계에 침투한 인간 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고유한 수행성을 가진다.
세계는 단순히 입자들의 총합도 아니고,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의 배열도 아니다.
세계는 나와 타인을 포함한, 모든 물질들이 수행하며 발생하는 현상들의 총체이다.
하지만 이 수행들은 항상 변하고, 새롭다.
그렇기에 우리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같은 ‘나’로 여기기 위해서는
펼쳐진 시공간에 흩어진 수행들을 기록해 하나의 총체적 ‘나’의 이야기로 엮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록의 실천은 주로 ‘기억’의 행위이다.
기억은 우리가 경험한 물리적 시공간을 스크랩한 시청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현실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기억은 우리의 감각이 욕망에 흘러 들어온 것이다. 이 기억은 우리가 경험한 세계의 수행들에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다.
꽃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제 아침에 보았던 집 앞의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는,
실제 꽃의 구체적인 수행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 얽히고 설킨 물질의 수행들과 수많은 기억들이 한 데 뒤섞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당신과 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을 쉽사리 구분해낼 수 없다.
작가들이 기록한 수행들과 기억들은 어쩌면 당신의 것일 수도 있다.
얽힘과 절단
나는 전시의 주요한 테제로 양자역학의 실험들, 그리고 그것으로 도출되는 ‘존재인식론’을 상정한다.
카렌 바라드는 양자역학의 실험 결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다.
그 중 대표적인 실험이 이중 슬릿 (double slits) 실험이다.
이중슬릿은 과학자들이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실험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이다.
이중 슬릿 실험은 두 개의 미세한 틈이 있는 판에 광자를 방출하는 실험이다.
만약 빛이 입자라면 그림의 좌측과 같이 광자가 이중 슬릿을 통과해 두 줄의 스펙트럼만을 기록한다.
반면 빛이 파동이라면 그림의 우측과 같이 광자가 회절 현상을 통해 여러 줄의 흩어진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첫 번째 실험에서 어떠한 관측 장치를 포함한, 빛의 입자에 간섭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제거하고 결과만을 확인하였는데, 빛은 입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두 번째 실험에서 이러한 과정을 관측하기 위해 관측 장치를 이중 슬릿에 설치하고 결과를 확인했는데, 빛이 파동이라는 결과가 검출되었다.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빛이 입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이 입자이거나 혹은 파동으로 작동하는 결과는 어떻게 확정되는 것일까?
그 매개변수는 관측의 여부이다.
간섭 현상이 없는 첫 번째 실험에서는 빛이 입자로 검출된 반면, 관측 장치라는 간섭 현상이 있는 두 번째 실험에서는 빛이 파동으로 검출된다.
두 번째 실험에서 광자가 카메라라는 관측 장치의 양자(quantum)과 상호작용했다.
관측은 단지 카메라 설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관측은 상호작용을 동반한다.
이 때의 관측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관측의 의미보다는, 입자 간의 상호작용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입자를 보는 것 또한, 빛의 입자가 대상 물체에 부딪혀 반사돼 우리의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기 혹은 물과 같은 매질의 양자가 대상 물체와 상호작용한다.
카렌 바라드는 이러한 양자역학의 설명을 자신의 철학에서 전유한다.
기존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인식에서 ‘물러난’ 객체, 즉 실제 고정적인 물질이 분명 존재하고, 그 객체들은 고유한 각자의 물리적 힘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라드는 양자 역학의 설명을 사용하여, 물질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 물질을 보거나 만지거나 이해할 때에, 입자 혹은 파동처럼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물질이 우리와 상호작용 함으로써 비로소 "고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측"현상은 비단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돌과 나무가 있다면 돌과 나무는 서로의 입자에 간섭하여 서로의 상태를 확정한다. 존재는 인식과 상보적인, ‘현상’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바라드는 이를 ‘존재인식론’이라 칭한다.
이처럼 세계는 온갖 입자와 물질들이 서로에게 간섭하고, 서로의 상태를 확정하는, 즉 서로를 "관즉"하는 얽힘의 총체적 장(field)이다.
2022년 4월에 Science journal review에 게재된 새로운 양자 역학 실험 논문을 확인했다.
실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기존 양자 역학은 양자(quantum)이 어떤 공간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미시 세계에서 양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범위 내에서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양자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 상호작용, 즉 관측이다.
본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기획했다.
그들은 어떤 양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얇은 간격을 가진 이중 슬릿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모든 관측 현상을 배제한 실험 환경을 조성하고, 그 사이로 양성자 입자 딱 하나를 쏘았다.
분명 입자 하나를 쏘았으니, 상식적으로 입자가 두 틈 중 하나로 통과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를 확인하니 하나의 입자가 두 틈 모두를 통과한 것이다.
관측 전까지, 입자는 두 틈 중 모두를 통과할 수 있는 확률을 가지는 것이다.
두 틈 중 하나만을 통과하는 것은 관측 현상이 이루어질 때 뿐이다. 즉 관측이 입자의 위치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가 보거나, 만지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과 상호작용한다면 불확정적이던 대상이 비로소 그 상태와 위치가 확정지어진다.
이것은 대상이 원래부터 확정적으로 존재해서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봄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의 존재가 고정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어떤 현상 안에서 감각하는 확정된 세계는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물질들이 서로 뒤얽히며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나는 기억의 이미지나, 기록, 그리고 예술이 그러한 현상을 절단하여 확정된 형태로 재현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발딛고 서있는 이 물질적 세계의 확정된 현상을 수직으로 절단하여 매체에 담아내는 것이다.
기억과 기록, 예술과 서술은 불확정적인 세계를 확정지어 환영으로 재현해낸다.
우리는 이 유령같은 불확정적인 현상 안에서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물질들을 확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물질들도 우리의 상태를 확정하여 우리는 비로소 총체적인 현상에, 존재인식적 세계에 살아간다.
나는 오히려 환영-유령-물질-실재의 절단된 얽힘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예술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이미지의 과학적 해제와 언어화는 오히려 이차적 재현으로서 이미지의 본래적인 역동의 힘을 은폐한다.
“의도와 행위, 욕망과 그 토대로서의 물질이 뒤얽힌 입자의 유령” – 파라노말 오페라
Paranormal Opera
2022
Written and Directed by Yoon Taegyun
단채널 비디오, 17분 11초
제작 윤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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