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된 미래, 추적 가능한 출처들
*본문은 전시<<아포칼립스 모으기>> 도록에 게재되었음.
2021년 7월 22일 - 2021년 8월 5일
갤러리 175
유지원, 김연재
윤태균 (비평)
1.
아카이브는 다른 시공간을 지금의 역사로 포섭하려는 강박이다. 수집된 것을 감각하고 독해할 때에 수집된 것이 본래 속해있던 바깥의 시공간은 비로소 인식론적 시공간과 맺어진다. 이 말은 또한, 수집된 것으로서 아카이브는 항상 자신의 출처에 대한 지향이라는 것이다.
2.
망각과 죽음 충동은 현재를 과거와 단절시킨다. 데리다도 말하듯, 아카이브를 향한 열망은 망각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아카이빙을 통해 실재로서의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듯, 아카이브는 과거 혹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다. 데리다는 아카이브의 근원을 “유령과 같은 토대”, 즉 끊임없이 지연되며 도달이 불가능한 지점으로 둔다.[1] 그에 따르면 아카이브는 일종의 사후 작용으로, 기억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을 오가며 ‘현재에서’ 재구성된다.[2] 즉각적인 기억 행위는 그것은 언어적 이미지로 통합하지 못하지만, 반복을 통해 강박적으로 그것을 통합해낸다. 결국 기억은 항상 사후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의 조건에 의해 다시 주조된다. 아카이브 또한 사후적인 것으로서, 변형되고 굴절된 기억의 이미지이다. 즉 아카이브는 기억의 현재적 재현을 수집한 것이며, 망각에 의해 촉발되지만 동시에 망각에 의해 과거의 완벽한 재현은 좌절된다.
3.
그러나 아카이브는 과거의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즉각적인 아카이브는 빠르게 미래로 흡입되어 더 이상 볼 수 없는 현재의 이미지들을 붙잡고자 하는 열망에 의존하기도 한다. 과거 기억의 외상적 반복보다는, 지금 이미지의 즉각적인 반복들과 이 반복되는 것들의 수집 행위가 빠르게 휘발되는 현재(즉시 과거가 되어 망각될 현재)를 언어적 이미지로 기억하는 방식이자 전략이다. 과거의 망각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지금의 망각에 대한 우려가 공포로 다가올 때에, 우리는 오늘날 반복되는 것들을 모은다. 이때 이 반복의 정도는 최소한 우리가 ‘현재’라는 사건들을 언어적 서사로 인식할 수 있을 때까지의 반복이다. 예컨대 근 2년 가까이 매일 반복되는 COVID-19의 확진자 수 발표는 현재 혹은 오늘이라는 시간들을 언어로 엮을 수 있는 반복의 여건을 충족한다. 즉각적인 수집의 전략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자폐적 세계로 이탈하지 않기 위함이며, 여전히 통합된 주체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연속적 역사의 한 부분에 안정적으로 위치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3-1.
반복적 종말은 항상 내일을 종말-이후로 내쫓는다. 미래는 오늘의 반복이기에, 미래를 수집한다는 것은 오늘을 수집하는 것이다. 휴거와 서드 이펙트를 외치는 여러 종교적 선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수렴된 종말론적 서사는 어제와 오늘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이상스적 시작이다. 종말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파괴된 언어들을 마주하며 이 언어들을 무심히 지나친 채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들은 사실 아포칼립스를 통해 외상적 현재를 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폐허를 마련하려는 지극히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쓰여진다.
도처에 죽음이 만연하다. 언론에서는 연일 사망과 부고 소식을 쏟아낸다. [사망] 혹은 [부고]라는 헤드라인의 외상적 충격은 우리에게 죽음을 필연으로서 마주할 수 있도록 길들인다. 그러나 죽음과 종말이 비단 생물학적 기능의 정지만은 아니다. 유지원이 과거-현재의 환경에서 수집해온 여러 오브제들의 재현은 반복되는 외상과 강박의 결과이다. 에세이스트로서, 유지원은 기관의 관료체계와 포드주의적 생산 업무를 경험하며 그것의 상징으로 A4 이면지, 사무용품들을 채택한다. 그러나 아카이브 자체가 희망을 위한 열망에 기인하는 바, 유지원의 수집 행위는 단지 예상할 수 없는 미래와 탈출할 수 없는 현재의 반복을 암시하기 보다는 이 폐쇄된 반복적 현재들에 균열을 형성한다. 비록 그것이 사무용품들의 모사일지라도, <사무실 물품 리스트>는 다큐멘터리이기 보다는 구태여 한차례 더 모방된 에세이적 수행이다. 이면지에 그려진 상(像)들은 이미 재현과 관측의 수행을 거치며 (반복된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원의) 은폐된 욕망을 파열하고자 한다. 이러한 파열의 욕망과 회화적 수행은 <이면지에 그린 수묵화>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3-2.
유지원의 드로잉 실천에서는 반복되는 현재와 폐쇄된 시간을 파괴하여 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역사를 다시금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이 빛나고 있다. 이러한 파괴의 충동이 강박적 행동으로 이행되는 순간이 <부수자>에 나타난 행동의 흔적이다. 인과를 추측하여 쉬이 예측할 수 있듯 파괴된 사무용품(의 대용 조각)은 충동에 의해 거칠고 무작위적으로 부서져 있다.
그러나 현재적 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혁명으로 촉발되지 않는다. 시도들은 항상 좌절되고 반복되는 외상에 의한 순응과 강력한 상징계적 제약으로 인해 통제된다. 뻔한 이야기겠지만,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제약 없이 뱉어낼 수 있다면 이미 관료제를 뛰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여전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유지원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재적 시간에서 물건들을 수집하고 이 물건들에 관한 상상적 에세이를 서술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에세이는 작은 실천이기도 하다. 자그맣지만 변혁을 촉발할 수 있는 변증법적 실천들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현재를 과거-미래와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똑같은 용지들에 드로잉하기, 사무 용품을 깨부수기, 서류 봉투에 회화 넣어두기. 이러한 에세이 쓰기 행위들은 정신병리학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치료 행위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변혁은 항상 좌절되겠지만, 갇힌 현재를 탈출할 수 있는 상상 가능성을 제공하여 외상적 강박을 해소한다. 자폐적 현재에 갇힌 수행자들은 앞으로 나아갈 시간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4.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광포한 진행은 현재를 방금 전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가두려는 경향을 산출한다. 상용화되지 않은 수많은 기계들은 아카이브의 형식으로 비엔날레와 전람회에 출품된다. 이러한 미래주의적 아카이브는 현재를 마치 지나갈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동시대의 '현재'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리기에, 더 이상 유효한 현재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현재는 다가올 미래, 그러나 결코 현재와 섞일 수 없는 전미래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현재밖에 인식할 수 없는 동시대적 인식이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반복하지만 이 구성된 미래는 결코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 또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미래는 없다. 현재에 비추어지는 미래는 사변적인 것이고 현재의 토대에 기댄다. 언급했듯, 이것은 유령과도 같다. 이 구성된 미래가 현재에 기여하는 방식은 '긍정적인 전미래' 이자 미래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욕구이다. 구성된 미래는 희망이고 바램이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구성한 것 또한 긍정적인 것이다. 현재에서 그것의 부정을 실천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현재에서 구성된 미래가 인식되는 방식은 지나온 과거가 인식되는 방식과도 같고 모든 것을 자신의 시간으로 회귀하려는 현재는 더욱 자폐적인 시간으로 머무른다. 현재는 과거에 비추어 정당화되지 않고, 다가올 미래의 전 단계로써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지나온 과거와 구성된 미래는 오직 현재성을 위해 봉사한다. '구성된 것'으로써 미래주의적 아카이브는 여느 다른 아카이브와 다르지 않다. 수집물들의 내재적 구성은 지금 여기와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현재와 ‘가능한’ 관계들로 매개되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수집된 것들은 가능한 비-현재를 내포하며 이 시간성은 그 어느 시간보다도 이질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카이브는 명백한 물질이다.
4-1.
아카이브의 기능은 우리 인식의 총체화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카이브는 실재의 총체화를 위해 봉사한다.
4-2.
수집된 미래의 물화임과 동시에, 김연재의 <인간되기>는 구성으로서의 아카이브이다. 그러나 이 아카이브의 방식은 단순한 수집과 나열이 아닌, 적극적인 침투와 감염을 통한 연금술이다. 이 포스트-인간의 몸에 이미 침투해 있는, 그리고 감염되어 있는 것들은 김연재가 수집한 미래의 객체들로 신체는 아카이빙을 통해 저장의 장소가 된다. 스타킹과 마스크 등의 수집물들은 몸에 차곡차곡 쌓이고 혼합된다. 그러나 이런 구성 행위가 철저한 사변으로 남지 않고 위와 같이 수집된 것들의 출신(미래)을 밝힐 수 있는 이유는, 김연재가 수집한 것들이 사실은 미래보다는 오히려 현재와 가까운 전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미래는 현재가 있기에 가능하다. 미래적 아카이브 또한 수집하는 자가 속한 현재의 조건에 의해 선별되고 보여지는 사후 작용이지만, 이는 망각된 기억의 재구축보다는 상상 가능한 미래라는 유토피아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망각이나 종말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라는 연속적 역사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현재를 과거, 미래와 총체화하여 역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수집하고 선별한다. 적어도 상상가능한 미래는, (그것이 아포칼립스 이후일지라도) 현재에서 상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유토피아이다.
5.
COVID-19, SARS, MERS는 동물과 인간에게 모두 감염되는 바이러스로, 인간의 인식적 실재의 변방에있던 동물과 그들의 생태는 이 인수공통감염바이러스로 인해 비로소 인식으로 편입된다. 인수공통감염바이러스라는 실재적 객체는 인간의 인식적 실재와 얽혀들 때에, 이렇게 총체화된 장에서 내부작용(intra-active)을 통해 사회와 경제 그리고 보건과 체제까지도 새롭게 규정짓는다. 한편, 이 인식적 실재가 비로소 언어화 될 때에, 독해 가능한 결과로서 우리는 관측을 필요로 한다. 일목요연한 숫자와 문자들은 이 복잡한 실재의 현상들을 솎아내어 눈 앞에 제시해주고, 이미지로서의 그래프와 사진 기사들은 어떤 상황이 도래했는지를 정확히 관측하는 듯 보인다. 이처럼 관측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재현의 행위자들은 이 갱신된 실재의 관측을 생산해낸다. 우리가 매일 확인하는, 갱신되는 확진자 수를 통계지어 인쇄해낸 그래프들, 백신 접종률과 부작용들을 표시한 통계들부터 안티 백서(Anti-vaxxer)들이 줄기차게 인용하는 조작된 통계들과 음모론…
이렇게 김연재의 <오픈데이터 판데믹>은 여러 통계 자료들과 그래프들이 그러모아진 수장고가 된다. 그러나 이 수집된 관측 결과들은 실재의 재현(혹은 반영)으로써 이 물질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애초에 이 관측들은 실재의 직접적 재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프와 통계들이 재현하는 것은 욕망으로 변형된 실재로, 이들이 실재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직 징후만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재현하는 것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관측자의 욕망이다. (물론 이 관측자의 욕망은 실재와 얽혀 있으며 실재의 부분이자, 결과이며 원인이다.) 예컨대 여타 국가의 정부에서 발표하는 확진자 통계는 고도의 정치적 욕망이 투입된 결과이다. 정치적 역량으로 여겨지는 방역과 대책들은 매일 갱신되는 확진자 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한 명확하게 알 수 있듯 안티 백서들이 인용하는 페이크 뉴스의 통계들은 놀랍도록 정교하게 짜여진 여러 결과와 숫자들의 유희로 결정된다. 김연재는 이러한 욕망의 재현을 다시금 회화면에 이식한다. 역설적이게도 중첩된 욕망들은 본래 자신이 들러붙어있던 신체 (통계 그래프)에서 빠져나와 회화면 전체에 흘러넘쳐 스며든다. 중첩된 관측 결과들로 전면이 틀어막힌 회화면에서는 욕망의 종착점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식별할 수 없게 된 욕망만을 웅얼거리는 관측자들의 언표이다. 출처와 종착지를 잃고 부유하는 관측들은 여기서 한데 모여 식별 불가능한 욕망 덩어리의 기표가 된다. 결국 김연재는 재현불가능성을 재현한다.
6.
아포칼립스를 모으는 행위는, 욕망을 모으는 행위이며 욕망을 모으는 행위는, 욕망이 작동하는 조건인 실재를 총체화하는 행위이다.
[1] Jacques Derrida,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 Eric Prenowitz (tra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84.
[2] Ibid, p.84-85.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라노말 오페라: 서막 / 시청각적 서문을 위함 (video) (0) | 2022.09.19 |
---|---|
피상성, 기호, 이미지 - [윤태균, 유아연, 조아란] (0) | 2022.05.21 |
아카이브 아트 매뉴얼: 과거를 좀비로 만들기 (0) | 2021.03.29 |
¿ 새로운 카바레 볼테르 혹은 새로운 컨벤션 홀 ? (0) | 2021.02.25 |
오디오 비주얼: 환각과 팍투라 (0) | 2020.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