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비주얼: 환각과 팍투라
윤태균
1.
리얼 타임 아트(Real-time Arts)는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한다.
2.
리얼 타임은 고속 컴퓨팅에 기반한다. 즉 정보의 투입은 고속으로 처리되어 ‘실시간으로’ 산출된다. 물론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과 같은 현상이 아니라면, 투입과 산출에 걸리는 시간은 0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인터페이스를 마주하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투입하고, 우리가 그 장소를 떠나기 전까지 알고리즘을 거친 정보를 산출하는 것이다.
3.
리얼타임 오디오 비주얼에서는 오디오의 생성, 오디오에 대한 비주얼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미리 설정된 오디오, 즉흥적인 코딩(coding), 혹은 생성적(generative)으로 발생하는 오디오는 내부적 과정을 통해 비주얼 영역의 매개 변수(parameter)를 결정한다. 오디오의 볼륨, 피치(pitch) 등의 유동하는 변수는 오디오의 속성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비주얼의 변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오디오 비주얼 프로그래밍의 과정에서 비주얼은 오디오에 후행하먀, 비주얼의 작동은 사운드의 결과에 대응한다. 그러나 0에 가까운 대응 시차는 두 영역이 동시에 작동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분명 비주얼은 사운드의 대응이지만 사운드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비주얼은 사운드와 동등한 개체의 부분이다. 생성된 오디오와 비주얼은 언제든 분리될 수 있지만 쉽사리 분리될 수 없기도 하다. 오디오 비주얼은 비주얼에 대한 사운드의 반응, 혹은 사운드에 대한 비주얼의 반응이라는 다소 순진한 방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통합적 감각 개체의 총체를 형성하는 부분들로서 정밀하게 결합하는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폴리 사운드 혹은 배경음악, 나레이션 등의 오디오 요소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오디오 비주얼에서와 같이 ‘하나의 장면’이라는 개체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장면의 비주얼과는 전혀 다른 코드로 작동한다. 영화에서의 비주얼과 오디오는 서로의 ‘은유’로 작동할 수는 있어도, 비주얼이 오디오의 혹은 오디오가 비주얼의 문법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디오 비주얼에서는 양자가 같은 문법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가진다!)
오디오 비주얼에서 오디오와 비주얼이 동일한 문법으로 결합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파편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주얼은 기존의 영상 미디어에서 지속되었던 서사적 조건들을 가지지 않는다. 수많은 그래픽 입자들로 구성된 형태들은 비재현적이며 어떠한 것에 대한 상징 또한 아니다. 오디오 비주얼이 기대는 오디오 또한, 강력한 다이나믹(dynamic)을 가지는 순간적이고 순환적인 음악을 선호한다. 강력한 다이나믹의 오디오는 마찬가지로 비주얼의 움직임에 강력한 다이나믹을 야기한다. 다이나믹에서 튀어나오는 지점들, 즉 오디오의 강한 리듬과 그에 따른 그래픽의 강렬한 움직임들. 이러한 장치들은 오디오와 비주얼의 더욱 단단한 인식적 결합을 가능케 한다. 결국, 오디오 비주얼에서 오디오와 비주얼은 각자 제작된 후 하나로 ‘조합’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동시에’ 규정해 나간다.
그렇다면 비서사적인 파편들, 다이내믹한 오디오와 이에 완벽하게 감응하는 비주얼, 이렇게 구성된 오디오 비주얼이 인식론적 장소에서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4.
장소(Ort, site)는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사건의 장소이자 감각 자료들이 사유에 의해 모이는 인식론적 공간이다. 장소는 지극히 공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실 장소가 장소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고유한, 동시에 가변적이기도 한 시간성에 있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에,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시간, 그리고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서로 뒤얽혀 영화라는 사건이 위치한 고유한 장소가 된다. 장소는, 우리가 그곳에 들어설 때에 비로소 생성되며 우리가 그곳을 벗어날 때에 사라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건이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사건에 장소가 부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총체적 시공간으로서의 장소는 그 위에 얹어진 사건이 어떤 특질을 가지는지에 따라 그 견고함이 결정된다. 이 견고함은 인식이 사건의 경험에 진입하고 나올 때까지의 집중 혹은 침잠과도 같다. 혹은 인식이 장소에 온전히 스며들어 사건의 한 부분이 되는 ‘환각’이다. 장소의 견고함이 사건에서의 인식과 관계한다면, 사건이 현시하는 감각 정보들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딛고 있는 장소의 질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5.
다시 돌아와보자. 먼저 서술하자면 오디오 비주얼이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강렬한 감각적 경험은 침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침잠은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말하는 ‘환각’과도 같다.[1] 맥루언에게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두 범주는 미디어가 가지는 정보의 밀도, 즉 ‘정세도’에 의해 결정된다. 정세도가 높은 뜨거운 미디어는 정보의 완성을 위한 수용자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며 정세도가 낮은 차가운 미디어는 정보의 완성을 위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이때의 참여는 사실 빈칸을 메우기 위한 ‘상상능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맥루언에게 미디어의 뜨거움과 차가움은 매체의 본성을 정하는 결정론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뜨거운 미디어는 뜨거운 정보를 전달하며 차가운 미디어는 차가운 정보를 전달한다.
기존의 서사적 작업들이 극도로 뜨거운 미디어였다면, 오디오 비주얼의 정보들은 차가운 미디어로 반전된 것이다. 정보들이 시각과 청각의 결합, 맥루언이 말하는 ‘촉각’으로 인식되며 어떠한 정밀한 서사적 정보를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과거의 TV와는 달리 이러한 차가운 미디어로서의 오디오 비주얼은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각 담론으로서 오디오 비주얼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며 탈정치화하는 기의 그 자체이다. 뜨거워진 서사적 미디어와 달리 이 차가운 촉각적 덩어리들은 감각의 냉각을 야기한다. 그리고 감각의 냉각은 곧 우리를 “환각에 빠지게 한다.”[2] 환각 상태의 인식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서 서사를 재구성할 필요도 없다. 이 몽롱한 환각 상태에서 인식은 침잠의 상태로 치닫는다. 즉 오디오 비주얼은 독해되지 않고, 직관된다.
6.
장르 통합적이고 촉각적인 예술 형식을 창작하려는 시도는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오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일종의 종합적 예술작품으로 격상시키려 시도했다. 음악, 극본, 무대, 의상 등의 모든 요소들은 어느 한 부분에 종속되지 않고, 통합되어 하나의 예술 개체로 상연된다. 바그너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건축적 공간의 결합을 꾀함으로써 그가 되돌아가고자 했던 태초의 예술형식, 즉 디오니소스 축제를 향한 것이다. 원시의 종합예술로서 디오니소스 축제는 언어와 소리, 그리고 춤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제의적 공간을 연출한다. 축제에서 상연되었던 극은 참여했던 시민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었고, 시민들은 극의 ‘장소’에서 춤을 추며 트랜스 상태로 치닫기도 했다. 장르적 개별성을 극복하고 개체화된 통합적 감각의 장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쉽사리 연상되듯, 이러한 환각적 장소는 오늘날의 공연장, 특히 레이빙(raving)을 위한 나이트 클럽에서도 출몰한다. 2000년대 이후의 컴퓨터 인터페이스와 발전된 광학 기기들은, 단순히 조명과 음악만이 조응하던 클럽에 새로운 반응성 비주얼을 가능케 했다. 오디오 비주얼의 통합적 작업을 위한 프로세싱(Processing), 터치디자이너(Touch designer), 에이블톤 라이브(Abletone Live) 등의 새로운 유저 인터페이스들의 등장은 더욱 정교한 오디오-비주얼의 제작과 결합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제 대형 나이트 클럽에서는 오디오에 반응하는 비주얼 설치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MUTEK , Awakening 등의 대형 페스티벌에서 비주얼은 또 하나의 새로운 감상 요소로 자리잡았다. 레이빙은 환각적이고 트랜스적인 장소를 전제로 하기에, 공연은 위와 같은 오디오와 비주얼 그리고 공간의 통합적 구성을 통해 제의적 상황을 연출한다.
한편, 나이트 클럽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오디오 비주얼의 태동과 발전은 레이놀즈가 언급한 “컨셉트로니카의 부상”에 힙입어 클럽을 벗어난 미술관, 대안공간 혹은 조용한 공연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3] 컨셉트로니카는 기존의 EDM, 테크노, 정글 음악과 같은 음악들에 대한 반동에서 탄생했으며, 이에 대응하는 비주얼 또한 기존의 강렬한 원색과 공간을 가득 채운 그래픽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오디오 비주얼이 미술관으로 이동하고 감상의 대상이 됨에 따라, 어두운 방(chamber)에서 몰입을 요구하는 광학적 디스플레이의 무빙 이미지들과 청자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해체적 소리 덩어리들은 더욱 추상적(abstract)으로 치닫았다. 오디오는 신디사이징(synthesizing)과 샘플링(sampling)을 통해 전자 음악이라는 물질적 포맷에 충실하게 되었고, 비주얼 또한 프로그래밍된 컴퓨터 부호들, 그리고 샘플링 된 비주얼 조각들을 통해 전적으로 디지털적인 그래픽으로 구축되었다. 결국 클럽 밖에서 상연되는 대부분의 오디오 비주얼에서, 오디오는 “해체된 클럽음악(Deconstructed Club)”의 특성을 가지며, 비주얼 또한 재현된 것이 아닌 디지털 프로세싱으로 구축된 순도 높은 그래픽 덩어리들로 작동한다.
7.
러시아 초기 아방가르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그것이 “팍투라(facture)”의 방법론을 따른다는 것이다. 벤자민 부클로(Benjamin H. D. Buchloh)는 팍투라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며 그것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팍투라는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그들은 회화 혹은 조각의 구성을 통해 감상자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의도했다.[4] 다시 말해, 구성주의자들은 회화 혹은 조각 구조들이 가지는 기능들과 그 상호관계, 특히 구조를 구성하는 재료의 물성과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리고 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팍투라의 방법론을 성취하려던 것은 제작된 구조물이 구성하는 지각 현상의 특수성이었다.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의 시기에 도달했을 때, 팍투라는 이미 회화적 기표의 자기지시성, 그리고 그 기표와 다른 기능들과의 얽힘을 의미했다. 예컨대 부클로가 예시로 든 로드첸코의 <매달린 구조물 Hanging Consturction>(1920)은 어떤 의미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그것의 기표는 물질과 단단하게 결합하여 스스로를 지시하고 있으며 물질적 기표는 그 자체로 지위를 얻는다. 부클로는 이러한 과정들이 당시의 모더니즘적 패러다임, 즉 소련의 산업화 시기에서의 시공간적 경험을 예술가 스스로의 생산물에 결합하고자 했던 열망에 의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렇기에 팍투라는 유물론적이고, 과학적이며 역사적인 맥락을 포괄하는 미학적 방법론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재료는 매개없이 자신을 직접 재현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치밀하게 구성된 자기-재현은 감상자로 하여금 지각의 역동성을 성취하게끔 만든다. 결국 팍투라는 본래 공산주의적 실천을 위해 구축된 급진적인 형식주의 실험이었다. 팍투라는 산업의 생산체계의 구체적 과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동시적이고 집단적인 감응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였지만, 부클로는 그것이 여전히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적 전통, 즉 모더니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한계는 러시아의 아방가르드가 팍투라에서 재현적인 팍토그람(Factogrophy)로 이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팍투라는 단순히 목적 성취를 위한 방법론이기 보다는 하나의 충동 혹은 열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충동은 테크놀로지에 기반하며,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생산하는 물질적 기표 자체에 표현되려는 열망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시도는 키네틱 아트와 옵 아트로 이어진다.) 팍투라적 충동은 테크놀로지가 스스로를 온전히 지시하게끔 하려는, 추상적이면서도 유물론적인 양가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미래주의적 열망도 아니며 단지 생산 도구와 그 과정의 충실한 ‘드러냄’이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전시가 아니며 그것의 기표와 생산된 물질들의 동일화이며 각 기능들의 접촉이다.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혹은 전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작동한다. 재현적이거나 기록적인 영사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디오 비주얼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컴퓨터 언어로 구축된 이미지, 사운드이다. 또한, 테크놀로지와 일체로 결합된 디지털-팍투라이다. 이미지 기표와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한 몸이 되어 감각적인 시청각 요소로 감상의 여지를 전달한다.
8.
컴퓨터 언어는 코딩 혹은 프로그래밍은 알고리즘을 통해 지각되는 정보로 결정화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을 통해 디지털은 ‘순도 높은’ 결정체들을 만들어낸다. 구축된 디지털 그래픽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설정된 변수를 따라 움직이며, 변형된다. 발진기(Oscillator)에서 출발해 디지털 프로세스로 합성된 오디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성된 비주얼과 오디오는 어떠한 2차적 의미도 지시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형성하는 디지털 입자들을 현시할 뿐이다. 그리고 이 납작한 운동들은 설정된 프로그램이 지시하는 명령어를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이 명령 과정을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재현적이지 않고, 비서사적인 그래픽과 오디오들은 디지털의 팍투라적 충동을 반영한다. 디지털은 ‘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재현하는 또다른 현상학적 장소를 형성하며 이에 감응하는 감상자는 디지털이 제공하는 디지털적 의식을 치룰 수 있게 된다. 다시 미술사에서의 팍투라로 설명했을 때에, 오디오 비주얼은 오히려 조각이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와 계보적으로 더 가까이 있다. 오디오 비주얼은 기존의 서사적 무빙 이미지에 대한 반동이기보다는 팍투라적 충동에 충실한 것이다.
무빙 이미지는 항상 매혹적이다. 더욱이 그것이 재현이 아니라 컴퓨터 부호로 무에서 프로그래밍 된 것이라면 무빙 이미지는 무의식적 침잠으로 성애화된다. 타오르는 장작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처럼, 오디오 비주얼과 같은 무빙 이미지는 새로운 현상학의 경험을 통해 우리를 매혹한다.
9.
‘탈-진실’과 ‘가상’에 대한 무수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는, 이 불안한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장소의 견고함으로 되돌아오려 한다.
[1]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성기 (역), 서울:민음사, 2002, p.71.
[2] 앞의 책 p. 71.
[3] Simon Reynolds, The Rise of Conceptronica, Pittchfork.
https://pitchfork.com/features/article/2010s-rise-of-conceptronica-electronic-music/
[4] Benjamin Buchloh, “From Faktura to Factography”, October Vol 30 (Autumn 1984), pp. 8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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