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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디지털 안개 위의 방랑자 : 시리얼타임즈 <<우리는 디지털을 모르고 디지털은 우리를 모른다>>

본문은 시리얼타임즈 기획전 <<우리는 디지털을 모르고 디지털은 우리를 모른다>>의 도록에 기고되었음

 

디지털 안개 위의 방랑자

윤태균 

 

1.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의 정초에 다가가고자 한다. 인식이 어떠한 대상의 본성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것을 알아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앎이란 것은 대상에 지향성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것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의 범주적 개념들과 후험적으로 축적된 유비적 지식을 되풀이할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징적 언어로 정의된 개념적 앎은 우리가 진정으로, 또 오인 없이 대상을 인식하는 데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완전한 앎은 가능한가? 아니, 단일한 총체로서 대상이란 가능한가? 대상과 서로 접합되어 끊임없이 연관되는 저 많은 다양체들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가? 어쩌면 앎을 위해 분투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세계를 격렬하게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세계를 ‘알기’ 보다는 그것의 격렬함에 뛰어들어 우리의 신체를 내맡기는 것이 우리의 인식적 삶을 가능케 할 것이다. 세상은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렇기에 삶은 나아갈 수 있다.

 

2.

어느 순간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삶을 잠식해 들어왔다. 디지털 디바이스는 신체의 새로운 기관으로 부속되었고, 어느 공간이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시스템에 개입한다. 유행은 소셜 미디어를 거쳐 형성되고, 초국가적 금융거래는 디지털 전산망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음식점에 방문하면 종업원 대신 키오스크(KIOSK)가 우리를 맞이한다.[1]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은 디지털 프로세싱을 통해 작업한다. 이처럼 근 몇 년간 세계의 물질적 토대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우리는 변화된 토대 위에 살아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때로는 폭력적인 기제 하에 그것에 적응한다. 적응의 동기는 차치해두고, 적응의 결과는 단순한 ‘익숙해짐’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컴퓨터 언어는 부호화된 것들을 다시 표상으로 약호화한다. 이 때 디지털이 산출해내는 표상은 단순히 컴퓨터의 아날로그적 재현이 아니다. 디지털은 디지털적 표상을 산출해내고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중요한 것은 디지털 그 자체의 속성이기 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떤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느냐이다. 디지털은 작동 방식일 뿐만 아니라 표상 방식이기도 하다.

 

3.

디지털 디바이스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은 빽빽하게, 밀도있는 스펙타클을 형성한다.[2] 스펙타클은 광학적 디스플레이 뿐만 아니라 스피커와 여타의 기관들로 우리의 총괄적 감각을 일깨운다. 예컨대 (스마트폰, 키오스크 등의) 컴퓨터는 밝게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디스플레이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TTS(Text-To-Speech)의 음성을 통해 시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심지어 우리는 광학 현미경을 통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눈 앞에 놓이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빛으로 인식할 수 있고 가 볼 수 없는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블랙홀 탄생 순간의 소리를 스마트폰의 스피커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감관(感官)에 의존하게 되었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이 변화된 매체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신체를 변조(modulation)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확장된 감각의 영역에서 매일 새로이 요구되는 토대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침투에 대응하여 스스로의 신체를 변조해 나가는 것이다.

생리적 신체의 인식은 취약하다. 신체는 텅 빈 아카이브 공간으로 시작하여 인식 체계를 형성해 나간다. 이것은 고정되지 않은 불안한 주체의 끊임없는 ‘되기(devenir)’ 과정이다. 언급했듯, 동시대에 이 인식적 전회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이다. 우리는 디지털의 표상 방식을 기제삼아 신체를 변조해 나간다. 그리고 다시 이 변형된 신체의 인식에 적합한 테크놀로지를 발명해 낸다. 이것의 중간 결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보자. 포털 사이트의 인터페이스는 근 20년 간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검색창의 위치와 로그인 창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바뀌어 왔다. 그것은 스스로 변화해온 것이 아닌, 사용자 즉 변화하는 신체의 요구(이 예시의 경우 시각이다.)에 부합하여 변화한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디지털로 인해 특정한 지향으로 변형되며, 또 이렇게 변형된 신체에 적합한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요구한다. 이 재빠른 매체적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느 시대에 머무르는 ‘고정된 인간’의 상이 아니라 ‘포스트-휴먼 되기’의 과정에 놓인다.

 

 

김민경, <거꾸로 보는 몸의 일기>, 2020, 2채널 비디오, ©시리얼타임즈

 

 

<거꾸로 보는 몸의 일기>(김민경, 2020)에서 보아하듯, 김민경은 자신이 설정한 단기간의 실험에 자신의 신체를 피실험체로 사용한다. 그는 몇 일간, 정해진 시간동안 HMD(Head Mounted Display)를 착용하고 행동한다. 이 HMD의 디스플레이는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을 역전시켜 거꾸로 뒤집어진 세상을 전사한다. 이 뒤집어진 세계의 경험자는 중력이 전복되고 상하가 뒤바뀐 환상의 스펙타클 속을 걷는다. 시각은 환상을 거닐지만, 분명 경험자의 신체는 실제 세계에 거한다. 그러나 전복되어 새로워진 환상의 스펙타클을 ‘보는’ 경험자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이 뒤집어진 눈으로 내 신체를 움직이기에는 신체가 어디로 향할 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 반복은 인식의 강력한 체화를 야기하기에 위는 위, 아래는 아래라는 익숙한 시각체계를 갖고 살아온 경험자는 세상의 중력은 물론 자신의 신체마저 어디로 향할 지 모른다. 김민경은 이렇게 축적된 인식체계를, 정확히 위아래로 전복된 인식체계를 자신의 일상에 도입함으로써 해체하고 재구축하려 한다. 우리의 인식은 얼마나 연약한가! 어제의 인식과 오늘의 인식은 다르다. 저 강렬한 스펙타클에 신체는 내던져지며, 아카이브 저장고로서 날마다 새롭게 축적된다. 그리고 신체와 스펙타클을 매개하는 것은 생리적 신체의 감관인 것이다. 매체는 세계와의 매개이고 신체는 매체와의 매개이다. <거꾸로 매달린 사람>(2020)에서 보여지듯, 한 사람에게 상대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처럼 보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상대가 똑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은 서로를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바라보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그들은 같은 서로의 몸을 붙잡고 있으며 같은 바닥 위에 서있다.

 

4.

매체가 세계를 매개한다면, 우리는 디지털로 감각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는 디지털적(digitals-like)으로 감각하기도 하지만, 송천주가 <Blue Screen>(송천주, 2020)을 통해 암시하듯 디지털 디바이스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또 인식하는 것이다. 눈은 곳곳에 산재한 폐쇄회로와 카메라들로 수렴된 빛을 디스플레이로 수용하고, 귀는 마이크로 수집된 소리를 앰프(Amp)로 수용한다. 최근 등장한 디지털 웨어러블 기기로 여타의 감각들까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거치게 된다. 혹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감관을 대체한다고 말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그 어떤 매체들보다 신체의 감관을 필요로 한다. 디지털 디바이스가 매개하는 표상은 그 어떤 매체들보다 시각과 청각을 필요로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빛과 소리의 이미지 조각들은 논리적으로 독해되지 않고 납작한 잔해들로 수용된다. 디지털 이미지에서 의미는 내재면에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형성된다. 디지털 이미지는 에페메라(ephemera)와 같이 즉각적이며 일회적이다.[3] 구체적 세계의 대상은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통해 의미적으로 납작한 이미지로서 표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유동하는 정동(affect)의 세계를 일시정지하여 포착하고 납작하게 전사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 상에 점철된 또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스펙타클로 응축되며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고유의 정동을 생성하게 된다. 무의미한 파편들이 모이면, 또다른 의미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의미없는 디지털 이미지 혹은 소리 조각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강민준, <Revealation>, 2020, 가변설치, ©시리얼타임즈

 

 

<Revealation 묵시>(강민준, 2020)에서 관객은 여타의 감각을 차단당하고 청각과 촉각에 의존하여 공간을 표류한다. 관객이 표류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되어 있지만, 시각이 차단당한 채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청각에 의존하는 것 뿐이다.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를 형성하여, 관객이 위치한 방에 좌표적 공간성을 부여한다. 관객은 자신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또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관객이 방의 좌표 위를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방을 배회하는 관객의 신체가 좌표축이 되어 표상된 변수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가변적이고 일회적인 스펙타클에 둘러싸여 신체로서의 ‘나’는 안정된 세계에 설정된 좌표를 무화(無化)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신체가 위치한 지점을 세계가 가지는 좌표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 신체는 스펙타클 속의 한 점과도 같지만, 동시에 스펙타클의 중심에 서있다. 영화 <매트릭스>(1999)와 같이 인간의 생리적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어떤 매트릭스로 진입하지 않는 한, 디지털 디바이스는 감관을 대체하지 않고 감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감각하는 인간의 상태로 존재하기에, 결국 디지털은 현상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 신체는 세계에 닿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송천주, <Bug Zapper>, 2020, ©시리얼타임즈
송천주, <Oh my world>, 2020, 비디오, ©시리얼타임즈

 

 

송천주의 <Oh my world>(송천주, 2020)에서 보여지는 인물은 시종일관 광학 기기 앞에 머리를 밀어넣은 채 누워있다. 그것이 내뿜는 빛에 홀린 듯 멈추어 있는 인물의 모습은, 그 옆의 <Bug Zapper>(송천주, 2020)에서 유인등에 이끌려 그 앞에 쓰러져 있는 곤충들과 오묘하게 상통하기도 한다. 송천주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본 작업들은 디지털이 수행하는 세계의 매개의 기능을 다룬다. ‘가상’으로도 지칭되는 디지털 세계는, 사실 매개되고 재차 표상된 세계에 가깝다. 현실을 모방한 상이 아니라 현실과 나란히 놓인 것이다. 누군가 디지털 공간에서 경험한 것들을 과연 ‘거짓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은 적어도 지금의 경험에서는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그 대신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신체의 소외이다. 아무리 인식과 경험에 신체가 중요한 비중으로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후기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이 드넓은 표상들 사이에서 우리는 정말 능동적 주체인가? 어쩌면 이미지들의 스펙타클이 우리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타자적 욕망을 우리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펙타클의 한 점이 되어가는 우리의 신체는 단지 후기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금융체계의 디지털 시스템들에 충직하게 복무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일지도 모른다. 납작한 이미지들에 은폐된 초국가적 자본은 표상으로만 투사되는 일종의 허상과 같이 느껴지고, 성애적으로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신체를 완벽하게 소외상태로 치닫게 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 세계를 짚고 있지만 말이다. 흔히 컴퓨터 언어들과 후기자본주의의 금융 체계로 기능하는 저 디지털 물자체(Das Ding an sich)의 세계는 우리가 제공받는 광학적, 음향적 범주들로 개념화될 수 있는가? 아니, 디지털은 표상 그 자체이다. 우리는 동시에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요구하는 인식에 매번 대응하여 훈련하는 기특한 신체를 바라보며 이 일련의 디지털 현상들을 능동적으로 잘 살아나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테크노포비아와 테크노필리아의 이상이 전유하는 지점을 양자택일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디지털의 반복되는 표상만을 제공받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구체적 신체가 이 국면을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는지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알 수 없는 사건(event)들. 그야말로 디지털적 숭고라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질베르 시몽동, 황수영 역,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그린비, 2017

- 윤태균, 「우리는 디지털 양의 꿈을 꾸는가?: 펜데믹과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웹 전시」, 크리틱칼, 2020, 링크: http://www.critic-al.org/?p=5959

- 피에르 테브나즈, 김동규 역,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 돈 아이디, 김성동 역, 『기술철학: 돈 아이디의 기술과 실천』, 철학과현실사, 1998

 


[1] 키오스크(KIOSK)는 공공장소에 설치된 터치스크린 방식의 정보전달 시스템을 의미한다.

[2] 사진, 그래픽, 프로그램 인터페이스 등의 이미지, 그리고 미디어가 형성하는 사용자 간의 관계들과 표상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차곡차곡 응축되어 스펙타클로 기능한다.

[3] 전단지, 팜플렛 등과 같이 보존 기간이 짧은 인쇄물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