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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포스트모더니즘의 잔해들┃조형성과 텍스트

윤태균

 

Venice Biennale 2019 Spanish pavilion, 출처:shutterstock

 

 

1.
조형성(formativeness)과 텍스트(text)는 발생론적 측면에서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다.

 

2.
조형성과 텍스트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거의 미학적 도식들 중 단계적 논의를 위해 살펴볼 만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질료(matter)와 형상(form) 개념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실체(substance)는 책상이라는 개념적 형태, 즉 형상과 나무라는 질료로 구성된다. 이때 형상은 유비적 본질로서 질료가 최종적으로 환원되고자 하는 지점이다. 환원의 교착 지점이 되는 형상은, 질료를 통제하는 본질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적 대상성은 감각적 표상에서도 그것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가? 대상이 가지는 형상은, 적어도 감각론의 측면에서는 선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표상에서는 경험적 직관만이 촉발될 뿐이다. ‘가능한 것’으로서의 형상은 이 가능성이 실재화됨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이 실재화의 과정은 자가당착에 봉착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의 비판처럼, ‘가능한 것’으로서의 형상은 ‘실재화된 것’으로서의 대상에서 귀납적으로 도출해낸 일종의 가상적 원본이기 때문이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형상 개념이 조작된 초월적 환영이라면 차분하게 정리된 위계를 갖는 형상-질료의 개념 도식은 붕괴된다. 대상의 구성은 일자(the one)적 원리로 몇 가지 차원의 단계를 투과하여 우리의 감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차원에서 공존하는 수 개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조화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조형성과 텍스트의 관계 또한 위와 같은 논증을 거칠 수 있다. 텍스트는 조형성의 정제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조형성의 현재적 요소들 가운데서 피어난다는 것이다. 조형성 또한 텍스트의 힘에 의해 미세하게 흩어지며 구체화된다. 이러한 개체화 과정에서 여러 미세한 요소들의 힘이 충돌하고 조화하며 일시적 표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작가(혹은 작가가 설정한 또 다른 요인들)이다. 이렇게 대상의 과정에서 형이상학이 제거되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실재적 경험의 차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3.
전통적 조각과 회화에서의 조형성은 물질적이다. 양감, 부피, 질감, 구조, 장식, 원근법 등의 물리적 조형 요소들은 고정된 시공간에서 우리의 시각 앞에 마주하는 오브제로 앉혀져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등장한 비물질적 요소들은 작품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들로 부상한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은 미술의 주체와 대상들을 여러 개념들로 제시했는데 작품, 개념, 과정, 상황, 정보가 바로 그것들이다. 모더니즘적 발전론에서 지속되어오던 여러 예술 장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제학제휴적 (cross-disciplinary) 전략을 실천하듯, 반-미학 (여기서의 미학은 기존의 전통적 미학이다)의 기조에서 새로운 형식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퍼포먼스와 대지미술, 그리고 개념미술은 자신이 전유하는 관계들과 시공간의 경계를 확장시켜 나갔고 비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요소들인 상황, 관계, 운동, 등이 그들의 조형 형식에 포함되었다.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포스트-미디엄(post-medium) 상황, 바타유의 비정형(formless)과도 상통한다.)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res)의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19세기 구역(Musée d’ 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Section ⅩⅨéme Siècle)》와 하랄트 제만의 전시 《당신의 머릿속에 거하라: 태도가 형식이 될 때(Live in your head: When Attitudes become form)》와 같은 선구적인 예술가들에게서 등장한 새로운 형식 요소들은 어느새 지금의 예술들을 제작하고 설명할 수 있는 손쉬운 개념적 도구들이 되었다. 이러한 유동적인 요소들은 작품의 표상을 드러내는 영역, 즉 조형성의 부분으로 작동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위의 사례들을 포함한 새로운 예술형식들이 상징적(symbolic) 언어로서의 ‘텍스트’를 발화하고자 한 것이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하나인 세 개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는 언어의 기호체계와 재현이라는 텍스트적 담론을 작품의 주된 요소로 사용하였으며, 다니엘 뷔랭(Daniel Buren)의 줄무늬 회화는 미술관 밖의 공공장소들에 부착됨으로써 미술관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구체적 텍스트성을 내포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뒤샹의 《샘(Fontaine)》이 있을 것이다. 위의 몇 가지 예시들에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는 구체적인 맥락(context)과도 상통한다. 텍스트는 작품의 재료나 조형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지향성이다.) 텍스트는 조형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변증법적 구성과 몽타주에 의해 발생한다. 텍스트의 영역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작품의 새로운 구조적 조형성들, 예를 들어 과정과 행위 또한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 그룹의 출판물과 퍼포먼스들, 그리고 그것을 배포하고 행위하는 과정 자체가 오브제라는 전통적 형태에서 해체된 새로운 (또한 총체적이지 않은) 조형성이다. 조형성이 작품의 물질적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 비물질과 비정형으로 확장된 것이다. 플럭서스(Fluxus)와 아트 앤드 랭귀지(Art and Language)의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형성이 전적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모델을 따르자면, 내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이다. 예술에서 현재적 시간, 즉 언제든 즉각적으로 직관되어질 수 있는 분화된 현재가 아니라, 그 현재가 내포하는 잠재성이다. 조형성은 텍스트를 내재하며 스스로의 주름에서 텍스트를 분화한다. 내재성(immanance)의 평면에서, 텍스트는 명징한 언어로 해석되려 고정되어 기다리지 않고 조형성의 기호들(이때의 기호는 언어적 기호가 아닌 감성에 수여되는 모든 현상들이다.)의 조직 사이로 미끄러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텍스트는 내재적인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있다. 텍스트는 명확하게 해석되는 정의가 것이 아니라, 조형성을 비롯하여 작품을 둘러싼 모든 맥락들 (서문, 시의성, 정치성, 상황 등)에서 도출되는 의미형성 그 자체이다. 텍스트는 감성의 대상이 되는 (칸트적) 질료 뿐만 아니라 설정된 현상이 포괄하는 현상적 질료들, 조형성의 미분적 차이들 속에서 공명하는 이념인 것이다. 

 

3-2.
조형성과 텍스트는 완전히 이분二分되지 않는 영역이다. 힘(force)과 정동(affect)의 평면에서 그것들은 서로 엉키며 드러난다. 이 둘의 영역은 대리보충(supplement)적으로 작동한다. 앞서 말했듯, 조형성의 성취는 곧 텍스트의 성취이기도 하다.

 

4.
‘동시대’의 예술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텍스트의 전면적인 확장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완전한 전복의 국면을 맞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문화에 반동적인 대응실천에서 기인한다. 또한 전통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며, 어떠한 것에 대한 기원을 비판하고, 사회와 정치의 결합관계를 조사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적 반동은 급격한 외파(explosion)를 초래했다. 할 포스터(Hal Foster)가 제시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전략과 같이, 예술작품은 “유일한, 상징적인, 비전 제시적” 등의 모더니즘적 작품으로 다뤄지기보다는, “이미 기술된, 알레고리적인, 우발적인”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용어에 의해 하나의 ‘텍스트’로 취급된다. [1] 이러한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는 다름 아닌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재기술하는 것이다. 즉 모더니즘의 체계와 기호들을 상이한 맥락들에 새로이 개방하는 것이다. 이 과정들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전략과 문화논리들은 다원성이라는 새롭게 부상한 가치체계 하에서 정리되는 듯하지만 그것들은 수많은 적대와 갈등을 내포한다. 그거나 이제 세계가 어떠한 거대서사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다원성이라는 모호한 어휘로 뭉뚱그리기에는 무한한 사태들이 충돌하고 깨지며 매번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어니스트 만델(Ernest Mandel)이나 (Fredric Jameson)제임슨과 같은 비평가들이 상기한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등의 상대적으로 거대한 서사를 생략할 수도 없는 따름이다. 하나의 지도로 이 모든 사태들을 기록할 수 없는 최근 몇 년간의 시간들에서, 이 사태들의 에너지는 순식간에 어떠한 내파(implosion)의 지점까지 도달한 듯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몇몇 사건들에서 시작될 징후를 보였듯이,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것의 귀결인 동시대의 내파 또한 강력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5.
주지하듯 1960년도 이후의 서구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신표현주의까지 – 생략하겠지만 이것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으로 설명될 수 있다. 뷔르거(Peter Buger)은 위와 같은 전후 네오-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업에서 급진성만을 인정했는데, 그에 따르면 큐비즘과 다다, 초현실주의까지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모더니즘적 예술의 자율성을 거부하고 예술을 삶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했지만 네오-아방가르드 작가들은 그렇지 않다. 미니멀리즘, 팝아트, 누보 레알리즘 등의 작가들은 후기자본주의의 상품시장에 또 다른 상품 기호만을 제공했을 뿐, 예술의 자율성이나 삶에서의 실천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적 위상으로서 예술작품의 위치는 차치하더라도, 현대 이후 어떤 예술작품들의 텍스트는 조형과 미술관을 넘어 삶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전략은 이러한 측면에서 도드라지는데, 예술이 비경계적 혹은 탈경계적 조형성과 텍스트로 ‘가능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발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 없는’ 예술의 요소들은 조형되는 질료들-물감과 대리석에서 쓰레기와 비물질로-과 텍스트-미술관 안에서의 감상에서 미술관 바깥에의 삶으로-의 범주를 지우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제학제휴적 경향에 의해 예술은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종말을 고하게 된다.

 

6.
그러나 미술관(예술이 제도적으로 ‘전시’되는, 경계 지어진 모든 공간)은 여전히 우뚝 서서 남아있으며 이곳에는 전통적 예술작품의 교조를 따르는 것들뿐만이 아닌 이미 예술로서 면직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미술관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매몰차게 떠난 현대 예술을 다시 매혹하고 있다. 작가와 비평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미술관에 다시금 종속시키려 하는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is)는 미술관의 당위를 외부의 물리적 경계가 설정한 공간적 특수성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외부와 전혀 다른 미술관의 시간 전개 속도는 마찬가지로 또다른 전시 방식, 감각 방식을 가능케 한다. 즉 미술관은 "이미 존재하는 시각적 차이"가 아닌 "수집된 것과 수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새로운 차이"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미술관 안의 공간을 다름을 인식할 수 있는 장소로 설정한다. 미술관 안 예술의 존재가 그 여집합과의 차이로 당위를 갖는다면, 그 "모호한" 차이의 지점들을 통해 변증법적 세계의 리얼리즘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이 '새로움'을 들뢰즈적 차이에서 발생한 강도로 설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차이를 가능케 하는 미술관 안의 단독자가 가지는 역량(puissance)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6-1.
이미 포스트모던을 거쳐 미술관 밖을 벗어난 텍스트는 다시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내가 밖’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통 미학의 영역이다. 미술관 밖의 것은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며 심지어는 초월적인 개념까지도 지시한다.) 조형성은 텍스트에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텍스트는 작품의 조형성에서의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외부로 절단된 텍스트를 조형성에 기호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이 취하는 것이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의 형식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페스티쉬(pastiche)는 역사적인 것들이 가지는 대략의 요소들을 서슴없이 복기해낸다. 

 

7.
수많은 설치 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퍼포먼스와 관계미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조형 형식들은 동시대의 미술에서 참조의 대상이 된다. 이들 아방가르드들은 지난 한 세기동안 미술관에 완벽하게 융화되어 현대미술과 동어가 되었다. 이러한 조형 형식들이 가지는 특징은 크라우스가 지적한 바, “시각적인 것”이 “텍스트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크라우스는 시각적 매체를 지지체로 삼는 미술에 자율성을 두며 텍스트로서의 미술이 매체적 예술의 역할을 중단하고 “텍스트 해석학”만을 시도한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기획이 예술을 산업적 이벤트의 장의 역할을 하도록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작업은, 조형성을 잃고 텍스트만을 전달하려는 예술을 어떠한 조그만 범주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닌 예술에 최소한의 정당성, 즉 ‘시각적 매체에의 탐구’라는 역할을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요지에 따르면 포스트-미디움의 예술은 단지 메시지 (텍스트)를 전달하기 위한 일회적 상황을 조성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해석의 대상, 또는 발화의 주제가 되는 텍스트가 어떠한 근거로 작품에 수여되냐는 것이다.

 

7-2.
예술의 종말 이후, 역설적이게도 어떠한 것이 예술임을 인정받는 것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 조지 디키(George dickie)의 말처럼, 이때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은 예술계(Art Circle)에 의해서이다. 예술계는 그 요소들-작가, 대중, 비평가, 큐레이터, 기획자, 기자 등-의 총합이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시’인데, 전시는 어떠한 사물이 예술계로 들어와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게 한다. 전시를 지탱하는 전시공간은 지극히 제도적이다. 한 세기 동안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작품들 그리고 그 이후의 전시까지를 응축해오며, 현대미술 혹은 동시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은 모호하면서도 단단한 이미지적 개념이 되었다. 일련의 사물들은 전시장으로 설정된 특수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예술작품의 지위를 갖는다. 무려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으로 혹은 예술의 세계와 생활세계로, 무언가를 분류해내는 이 견고한 미술관의 벽은, 지난 세기동안 여러 사람들이 많은 시도로 그것을 부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벽들 즉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는 대부분의 수많은 작품들은, 이제는 현대미술이라는 제도적 범주로 손쉽게 분류되는,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의 형식을 취한 것들이다.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주, 퍼포먼스…한때는 미술관의 벽을 넘으려 했던 것들이, 이제는 미술관 안에서 안전하게 관조된다. 예컨대 미술관에 진입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범속하지 아니한 경험적 자세’는 미술관이 그 바깥과 분리되는 기제들 중 한가지가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것들이 가졌던 반동적인 전위성이, 실패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성공했더라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미술사의 적립으로 그 전위성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그들의 작업을 예술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서, 또는 예술계에서의 복무를 통한 생계 유지를 위해 전시장으로 반입한다. 이 때 남는 것은 오직 그들의 조형 형식뿐이다. 개념미술이 가졌던 네오-아방가르드의 전위성은 네오-네오-아방가르드로의 기제가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이미 미술계에 완벽하게 융화되었고,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뒤샹, 다다, 초현실주의)가 전통적 전시공간 밖으로 벗어나려 했던 것과 대비되게, 오히려 전시공간에 철저히 속박되려 한다.
역사적 변증법과 칸트적 자기비판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절된 과거의 것들을 부분적으로 복기한다. 동시대의 몇몇 작가들도 이러한 방식을 취하는데, 그들은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 아방가르드에서 그것의 전위성을 절단한 후 조형 형식만을 자신의 작업에 도입한다. 그리고 제작된 이 작품들은 그것들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놓여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가졌을 공격성과 파괴 능력을 상실한다. 크라우스가 말하듯 예술은 차용과 반복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독창성을 해체했다. 비단 아상블라주뿐만이 아닌 회화와 조각, 더 나아가 음악과 문학 등 전반적인 문화 영역에 이러한 현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형식들을 통해 형식주의적 독창성 혹은 작가의 영웅주의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무력화된다. 이제 아방가르드의 형식이 가졌던 전위성은 탈각되고 포스트모던적 의미가 자의적으로 투입될 따름이다. 앞으로 예술이 새로울 수 있는 지점은 주제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주제가 될 수 있어도 항상 실천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제 작품이 가지는 정치성은 미술관 안에 나열되는 미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맥락은 미술관의 벽에 가로막혀 그 파괴적인 힘을 잃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들은 분명히 주류라는 제도적 범주가 걸러낸 찌꺼기들을 혼합하고 주조하여, 이제 그들을 주류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찌꺼기들은 정제되지 않고 얼기설기 엮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잔해들일 뿐이다. 한때는 반동이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제는 그 효력를 잃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겨둔 지침인 '지향없는 차용'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떠한 지향 없이 잔해들을 긁모으는 행위는 쉽사리 길을 잃는다. 미술관 안에서 응시를 받아내기를 대기하는 미적인 상품으로써의 예술은, 그 안에 갇힌 채 자신에게 새로운 주제와 정치성이 부여되길 기다린다. 앞서 말했듯이 그 주제는 기만적이다. 

 

8.
아방가르드로서의 개념미술이 가졌던 ‘텍스트성’을 차용하는 경우, 개념미술 작품의 조형성과 긴밀하게 결합되었던 텍스트가, 어떤 경향들에서는 작품의 매체적 조형성이 아닌 작품 외부의 어느 동떨어진 맥락에서 조직된다. 전시 서문들, 빼곡한 문자들로 가해지는 비평문들 없이 존속되기 불가능한 작업들은 다름 아닌 외부의 텍스트를 대상에 포섭하려는 시도이다. 텍스트가 발화되는 지점은 조형성에서 그것의 외부로 옮겨갔으며, 이제 텍스트는 본격적으로 작품의 총체에 투입된다. 그리고 이미 텍스트의 발화와 해석이 보다 강조되어 조형성이 축소된 경향들에 외부의 텍스트가 침투하며, 텍스트와 조형성은 서로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텍스트는 전시 서문과 비평문이라는, 문자로 가시화된 형식을 통해 현장에 잠입한다. 작품들은 전시공간 안에서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을 준다. 어쩌면 어떤 작품을 구체적 정동으로 경험하지 않고 그것을 해제하는 글을 읽는 것이 그것이 발화를 발견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형성의 틈에서 발화되는 텍스트는 ‘잠재적인 것’이지만, 외부에서 투입되는 텍스트는 ‘가능한 것’이다. 잠재적인 것과 가능한 것이 실재화되는 데에는 질적인 차이가 수반된다. 

 

9.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언어적 가변성은 동시대에 반복되는 작업들에서 가변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내적인 필연성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안전한 미술관 안에서 새로운 아우라와 함께 존속한다. 학문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전시 서문들은, 조형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수여된 텍스트’들을 포함하는 작업들이 전시공간에 단단히 박히기 위한 장치이다.

 

10.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말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완전히 끝에 다다른 듯하다. [2] 그러나 어떠한 고착 상태에 놓인 동시대는 여전히 무너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난간을 붙잡고 있다. 우리는 뒤섞이며 넓어지는, 정체된 저수지에 있을까, 여러 지류들이 한데 엉켜 흐르는 거대한 흐름에서 떠내려가고 있을까.

 


[1] 할 포스터 외, 윤호병 역, 『반미학』, 현대미학사, 1993
[2] 테리 이글턴, 김준환 역,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실천문학사, 2000

 

참고문헌
– 할 포스터 편, 윤호병 역,『반미학』, 현대미학사, 1993
–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 전승보 편, 송미숙 외, 『큐레이팅을 말하다』, 미메시스, 2019
– 오병남, 『미학강의』,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3
– 정연심, 『현대공간과 설치미술』, 에이엔씨, 2014
– E. Krauss, Rosalind .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 Postmodernist Repetition, October, Vol 18. Autumn 1981」, pp.47-66

- 테리 이글턴, 김준환 역,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실천문학사, 2000

 

*본문은 문화비평웹진 『크리틱칼』에 게재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