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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피상성, 기호, 이미지 - [윤태균, 유아연, 조아란]

1.

 

윤태균: 현재 이미지들이 계열화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이미지를 표면적으로 배열된 형태에서 벗어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미지는 시각적 생성 과정과 표상 방식에서부터 모두 다른 맥락에 위치하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는 모두 노동과 자본이라는 현실에 밀착되어 있잖아요? 굳이 이미지의 특정 종류와 분야를 완벽하게 구분 지을 필요는 없지만, 시스템 안에서 이미지들이 어떠한 형태로 유통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아란: 그럼 이미지라는 단어 말고 기호라고 해도 통하는 의미인가요?

 

윤태균: 그 기호적 이미지가 맞습니다.

 

조아란: 좀 더 넓고 느슨한 의미의 이미지를 말하는 거군요, 단순히 가시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을 넘어서요.

 

윤태균: 네, 좀 더 포괄적인 의미였습니다. 가장 쉽게는 SNS 이미지나 뉴스 등의 이미지가 있겠고, 추상적인 이미지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중문화에서 유통되는 여성 ‘상’이라던가요. 표상적 방식을 통해 귀납적 결과물이 도출되는 이러한 것들이 제가 말하는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기호적이라고 느끼는 이미지에는 먹방 등 인터넷 방송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먹방은 음식 자체의 강렬한 이미지와 먹는 육체적 행위가 동시에 이미지로 호소 되니까요.

 

유아연: 하이퍼 리얼리즘이 역전된 상황에서, 그런 이미지들은 판타지적 맥락으로도 읽힙니다. 현실에서 누락된 것들로 서사를 건설하는 구조가 이미지 장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윤태균: 매트릭스와 하이퍼리얼, 시뮬라시옹에 대한 논의가 반세기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요? 디지털 이미지가 확산되고 그러한 논의들의 중점이 된 상황은, 바로 그것이 이미지를 떠받치고 있는 실재의 표피라 여겨진다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인 듯합니다.

 

유아연: 사실 기의와 기표가 전복된 상태는 현실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말씀하신 기호적 이미지 구축에 일조하고 있는 현상의 무게를 붙잡아 작품으로 번역하는 것은, 지금 작가들의 중요한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미지의 표피만 무조건적으로 인용하지 않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금세 휘발되어 버리는 단절을 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윤태균: 얼마 전에 미술 작가와 인플루언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작가와 이미지 유통자의 차이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인플루언서는 체계 위에서 단순히 이미지를 실어 나르는 이동 수단이라면, 작가는 징후로서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조아란: 인플루언서와 작가 모두가 이미지를 매개하는 행위를 통해 특정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유사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어떠한 것을 목표로 하는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이미지를 단순히 실어다 나름으로써 더 많은 양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제1의 목적으로 취하기보다는, 이미지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가시화되지 않은 지점들을 드러내면서 이미 주어진 것들, 특정 이미지로 고정된 것들의 경계를 탈구축/재구축해야 하니까요. 그래야만 작품으로서의 명분을 얻을 수 있겠지요. 심지어 ‘작품으로서의 명분’이라는 이미지도 아주 오래전에 그 경계가 크게 흐려진 바 있고 지금도 그 양태가 계속 달라지고 있지만요.

 

유아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최전선에서 싸우지는 못할지라도, 사회 일원으로서 다양한 정치적 작동 양태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작가 본인 또한 하나의 이미지로서 사회 내에서 자발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고요. 이미지는 항상 그렇듯,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권력체여서, 작가는 인터페이스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 가시적 솔리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모든 전달, 유통, 매개 작용들이 중간의 매개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는 하지만요. 우리가 자극을 느끼거나 전달하기 위해 피부라는 인터페이스가 존재하듯 말이죠.

 

윤태균: 그래서 작가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제 글에서도 다수 인용한 프레드릭 제머슨(Fredric Jameson)의 <정치적 무의식>을 다시금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 비평서인 이 책은 발자크 소설과 같은 것들을 주로 분석해서,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서사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프레드릭 제머슨은 헤겔주의자여서 실재를 언어화 이전의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라캉의 실재처럼 말이죠. 그는 이를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려 부재 원인이라고도 하는데, 부재 원인은 말 그대로 부재하는 원인이어서, 오직 서사로만 인식할 수 있는 거죠. 언어와 징후, 증상으로서 실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물론 강한 상관주의를 내포하는 입장이라 저는 이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일부 받아들여 진단하자면, 작가들이 생산하는 것들은 시공간을 언어로 계열화한다는 점에서 모두 다 서사일 것입니다. 이렇게 작가는 무의식을 계속 탐색하는데요,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무의식에 침투하는 계급이나 경제 체제 같은 것일 테지요. 미술 작가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그런 해석은 충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라는 부재 원인이 서사의 총합은 또 아닌거죠. 드러날 수 없는 서사로도 욕망과 증상들이 복잡하게 꼬여 있어 그 자체에 다가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단 하나의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고, 현상에는 매번 새로운 관측 행위를 통해 다가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신유물론자들을 재인용하자면, 법칙이 오히려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평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 예술은 항상 돌연변이이자, 특수한 것이잖아요.

 

유아연: 저는 그런 상황이 요즘의 밈(meme)이 발생하는 현상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에 기생하지만, 발화 어조가 욕망으로 뒤덮여 결국에는 굴절되어 버리는 것들 말이죠. 전면적으로 밈의 어조를 취하는 작품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의도는 분명해요. 증상을 어떻게든 포착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이는 병리적이거든요. 밈들은 사실 실재의 껍데기적 증후일 뿐이어서, 이를 직접 인용하거나 그 특유의 어조를 묘사하는 것이 단순히 ‘셀럽’이 되기 위한 맥락 절단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 주셨던 작가의 역할과 인플루언서의 역할이 계속 혼동된 상태로 이어지는 게 어찌 보면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이 조성한 결과이지 않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매너리즘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항상 고민이 됩니다.

 

 윤태균: 오히려 전통적인 예술가상이 하나의 신화처럼 되어버려서, 신화 자체가 재빠르게 디지털 매체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지금의 새로운 이미지 신화로 거듭난 것 같기도 하고요.

 

 

 

윤태균: 이에 관해서 NFT도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용가치와 화폐가치가 완전히 분리되고 투기의 수단이 되었잖아요? 사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언론과 관련 기업들이 ‘작가들이 새로운 수단으로 돈을 벌 수 있다’, ‘민주주의적으로 나눠 가질 수 있다’는 문구 등을 통해 NFT의 긍정적 역할들을 많이 강조하는데, 이러한 긍정적 평가가 정말 기업의 이윤, 수익 창출 의도와 무관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유아연: 그런 기사들이 현상의 자연화를 가속하는 것 같아요. 고립된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언어 체계 자체를 붕괴해버리는 것이죠. 실제로 NFT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의 이미지가 주로 거래되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신진작가들에게는 거의 기회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기존 권력 구조의 답습밖에 할 수 없죠. 기회만은 평등하지만, 현실의 위계가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그런 시장인 것 같아요. 암묵적 동의조차 암묵적이지 않게 되었달까요. 그렇다면, NFT 시장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미술의 역할은 자본 유통 과정을 가시화하는 것일 텐데요. 빅데이터 시장에서 이 같은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 공간에는 구조를 다루는 단어가 애초부터 있지 않아 이해할 수조차 없어요. 이러한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작가는 그저 시각 노동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시장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작가를 영입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죠.

 

윤태균: 그럼에도 NFT는 일종의 실험적 지점에서 시도해볼 의의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유아연: NFT는 그야말로 ‘물질 이미지’ 잖아요? 과연 물질 화폐를 주조하는 것만으로 이 추상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할지는 고민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개그로서 소비되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사용 가치를 지니도록 용도 변경을 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것 같아요.

 

윤태균: 저는 이 스펙터클(화폐)로서의 이미지가 그 사용가치와 분리되어 남게 된 것 자체로도 물질적인 역할을 크게 담당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것들이 탄생하는 과정이 엄청나게 치밀한 다국적 자본주의의 과정을 거처 생산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 물질이 전통적인 가치와 결별 되어 화폐라는 가치로 균질화되어 버렸죠. 이러한 균질화는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거든요. 다국적 자본주의라는 폭력적인 균질화죠. 이번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흥행을 보면서도 이미지 자체가 유행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이 시네마적 재미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어쨌거나 넷플릭스의 콘텐츠 알고리즘에 의해 제작되었으니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실 그들이 생각하는 재미와 미적인 가치는 이데올로기가 주조한 ‘법칙적인' 규범의 일부일 테입니다.

 

유아연: K-Culture가 재미있는 지점이 바로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2022년 9월에 영국 Victoria&Albert Museum에서 “Hallyu! The Korean Wave” 전시가 열린다고 하던데요. 사실 그 공간에서 한국 문화 전시가 열리는 것도 말씀 주신 지점에서 문화의 정치적 흐름을 다루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해외에서 타자화로 인해 소비된 문화를 역수입한 그 구조를 전시하는 것이죠. 하지만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이미지들에 잠식당한 상태에서 과연 그 내부적 움직임들을 재설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윤태균: 넷플릭스, K-Pop, NFTs, 미술 시장, 주식 시장의 호황이 강력한 시스템적 증상이라는 맥락으로 함께 묶이는 것 같아요. 증상이 강력하다 보니, 웬만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딱히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문제 되지 않음’ 자체가 되게 강력한 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상들 이면에는 엄청난 착취가 있거든요

 

유아연: 맞아요.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것이 항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잖아요. 그래서 인플루언서의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지 고민하게 되네요. 항상 권력의 약자임에도 동시에 기득권인, 특정 위치에만 놓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사회적인 중첩을 무시한 채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방대한 콘텐츠들의 압박감을 개인으로서 이겨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고민이 들기도 하고요.

 

윤태균: 그것이 사회적 무의식이기에 상징적 언어로 인지하고 꺼내 놓지 않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유아연: 사회적 무의식은 모든 사회나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언젠가는 혁명이 일어났잖아요? 근데 지금은, 과거의 혁명들과는 다르게, 그 대상의 부피가 전 지구를 덮어버려 개인이 이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여요.

 

조아란: 역전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상황이 단일하고 명백하게 주어져 있어야 논의될 수 있는 것인데, 이분법이 무너졌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중첩된 상황이잖아요? ‘역전이 가능한가?’, ‘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쳐 두고서도, 애초에 역전의 가능 조건 자체가 무화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체제의 역전이라는 이념 자체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것이 되어버렸죠.
 아까 태균 씨가 “오징어 게임”을 예시로 들면서 그것의 재미 요소가 이데올로기가 주조한 ‘법칙적인’ 규범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희 셋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문명인이라면 중고등학교 때 마르크스주의와 이데올로기에 관해 배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성으로 제작된 법칙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작된 또 다른 많은 법칙들, 다양한 사회/경제체제들을 교육받았고 계몽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과다하게 계몽된 나머지, 이성이 쌓아 올린 체제를 비난하거나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오징어 게임” 애청자들은 드라마가 평면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체제를 구경하고서도 정작 그것을 현실적으로 타개할 뾰족한 수는 딱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드라마가 실어 나르는 메시지이자 재미 요소입니다.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 흥행은 냉소주의적 태도가 모든 곳에 깔려 있음을 방증하는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에 대해 또 다른 냉소를 낳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ㅎㅎ). 기만을 기만할 수 있는 저 자신이 대견하기라도 한 것처럼요.

 

윤태균: 사실 그건 기만도 아니고, 그게 맞는 거죠. 마크 피셔(Mark Fisher) 또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말을 인용했잖아요? 제머슨이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의 논리’ 논문에서도 말했듯, 다국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모든 생활의 영역들을 다 포섭해버려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혁명을 하려면 현실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것 같아요. 모든 언어를 폐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조아란: 요즘 느끼고 있는 거지만, 자본은 자연이에요. 사람 목숨이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는 주식시장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부러지지 않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통장 월급을 받는 고전적인 노동으로는 청년들이 수도권의 집마저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돈을 가지고 돈을 버는 정글에 지금 당장 진입해야만 한다는 위기감이 사회 전반적으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윤태균: 어떤 분들은 ‘세계를 다 폭파해야 한다’라는 마초적인 발언들을 하는데, 사실 본인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며 발언한 것 같아요.

 

조아란: 심장이 뜨거워져서 터져 나오는 환상 속의 말들이네요. 저도 많이 합니다(^.^).

 

윤태균: 20세기까지만 해도 이데올로기나 시스템이라는 게 미술사도 그렇고 내파와 외파를 반복했잖아요. 갈 데까지 가서 특이점이 도달해 다다이즘이 나오고, 다시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네오 아방가르드가 생기는 등의. 각 시기와 양식이 뚜렷한 인과를 가지지는 않지만, 통시적으로 놓고 보자면 외파와 내파를 반복하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내파와 외파 마저도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어요. 현실의 위반은 곧 죽음이죠. 위반적이었던 거리의 그래피티들은 이제 허가된 곳으로 옮겨지고 뱅크시의 작품은 자본의 교환 가치 뻥튀기 게임으로 기능하죠. 스스로가 그것을 즐기기도 하고요. 소극적인 반항들은 아이의 투정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은 곧 법과 제도와 동화되어버려요.

 

유아연: 맞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에 이르러 현실의 극적인 타파를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현상 자체를 가시화한다면, 그 일말의 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빠르고 간편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진 한국 사회에서, 위반을 (속된 말로) “먹히게” 하려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스토리라인을 제시하는 방식이 가장 유효해 보입니다. 유튜브 영화 요약 콘텐츠처럼요. 역사적 시간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통적 프로파간다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와 실패한 사례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한국만의 특성은 아니리라 생각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반을 꿈꾸기 위해선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방법론을 모색해야만 하죠. 어쩌면 문제를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이미지 담론들만이 유통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로도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지금 미술시장에는 익숙해서 눈에 편한 디지털 이미지들이 정해진 리비도를 자극하며 매우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데요. 부여된 자유에서 탈출이 불가능하게끔 목줄을 채우며 말이죠.

 

윤태균: 그것 또한 화폐화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러한 구조는 비평과 전시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정치화의 지점을 스스로 직접 거부하는 작품들이 넘쳐납니다. 역사를 거부한 채 동시대의 판단 기준들이 자신을 비평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예술조차 예술계 내부의 화폐 시스템 안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형식을 양식으로 참조하는 작업들은 주제의 환원주의적 지점을 거부하지만, 결국 그들의 감각적 형식 즉 스펙터클은 균질화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예술이 거대 기업이나 기존의 국제적인 금융 네트워크에 편입된다기보다는 예술계조차 다국적 자본주의와 화폐의 논리를 자신의 작동 구조로 삼는다는 것이죠. 위계와 병합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확산이 문제입니다. 효율성과 스펙터클, 그리고 왜곡된 욕망의 직접적 분출이 비판점을 은폐하고 있어요. 이러한 상황은 ‘동시대'와 ‘시의성'이라는 키워드에 엄청난 비평적 함의를 부여하는 세태와도 연관되는 듯합니다. 진보의 폭풍이죠. 오늘날의 시간은 정지되었지만, 사람들은 역사를 끊임없이 갱신하려 합니다.

 

유아연: 말씀하신 포스트모더니즘 형식을 양식으로 참조하는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나요?

 

윤태균: 절충주의적 성격이 강한 작업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디지털 매체의 시각성과 현재 소외 계층들의 텍스트 등 다양한 카테고리들의 강력한 알레고리로 위치된 것들이죠.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유효성을 의심받는 시점에서, 과거 네오 아방가르드의 형식을 양식화해 현재의 담론을 덮어씌워 그저 적용만 하는 작업은 상당히 절충주의적이거든요. 오늘날 예술의 형식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조형과 텍스트의 관계는 이미 클리셰화 된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의 형식 A와 그것이 지시하는 텍스트 B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에, A는 B로의 하이퍼링크가 되려 합니다. 그 중간 과정은 마치 ‘로딩'창처럼 무의미하고 필수적으로 지나가야 할 경로인 것이죠. 그러나 예술이 그러한 ‘링크'로서 기능해야 할까요? 예술은 감각과 사유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로의 직행을 원한다면 A에 대해 미술사적 클리셰를 반복하지 말고,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나 게릴라 걸즈(Guerrilla Girls)처럼 A와 B의 경로를 축소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A와 B 사이에는 수많은 사유의 경로가 마련되어야 해요. 예술이 혁명의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은, 절대 그것이 혁명적 메시지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가 아니라 예술이 자신의 고유한 감각 언어로 사유의 흐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태균: 은 물론 물리적 기계 장치를 자기 신체에 이식하고 수태시킨 사이보그의 형태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공상 과학적인 이미지 말고도, 지금의 우리도 이미 감각체계와 생각 회로 자체가 변화된 포스트 휴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감각부터 이야기한다면, 아까 이미지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는데, 지금 우리들의 하이퍼-링크는 대체로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로 연결되잖아요. 하지만 인간이 태초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란 말이죠.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도 말하듯,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로고스(Logos)가, 구텐베르크 시기에는 문자가, 그 이후인 지금은 인스타그램에서 통용되는 정방형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물건보다는 사건이나 형상이나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말이죠. 익명의 사고 현장을 생각한다면, 뉴스에서 배포한 이미지부터 떠오르고요. 그런 이미지적 사고 이면엔 사실 테크놀로지가 작동하는 방식인 알고리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 자체가 물질적으로 다층적이거든요. 기계나 테크놀로지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본, 계급 등의 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사고 회로 또한 그런 물질에 의해 변화된 것이죠. 그래서 포스트 휴먼 (담론)이 단지 중립적이고 긍정적 형태의 변화와 가능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물질과 상호침투하는 권력이 우리의 감각에 침투한 징후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유아연: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데이터 자본이 된 현 상황에서, 인간-데이터라는 자본들을 흡수하며 덩치를 부풀린 페이스북은 우리를 재학습 시켜 노동의 형태를 변형해왔습니다. 페이스북의 자식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지금 그들은 주요 노동 인력으로 역할하고 있고요. 이에 따라, 모든 것이 이용자에 의한 서비스업에 초점이 맞춰지며, 노동이 여성화되었습니다. 즉, 본격적으로 포스트 휴먼화가 진행된 것이죠. 시스템이 전통적 산업사회에서 추구되던 자발적 노동 주체보다는, 서비스업, 케어 노동자들을 더욱 중요한 자본 생산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에 따라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균 씨 말대로 우리는 사이보그 사회 한 가운데 와있어요. 이는 코로나 시대에 도래해서 식문화에서부터 모빌리티와 결합한 형태로도 발현되고 있고요. 그 배후에는 필요에 맞춰 준비된 포스트 휴먼들이 있었던 것이죠.

 

윤태균: 요즘 그런 현상이 미술계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요즘엔 포스트 휴먼론에 경도되어 있으면서 창작/연구를 지속하시는 분들이 계속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저는 이를 테크노-가속주의의 일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매우 비약해서 말하자면, 가속주의는 지금의 시공간 중 어떤 부분을 가속하여 현실의 붕괴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극복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잖아요? 생물학적 성, 고정된 젠더를 타파하기 위해서 특정한 기술들의 가속과 SF적 이미지로서의 포스트 휴먼을 내세운 것이 예시가 될 수 있고요.

 

조아란: 가속주의는 처음에 픽션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잖아요? 물론 그것의 이전 버전은 이탈리아 미래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그 모태는 더 오래전부터 있었겠지만요. 실질적인 효용이 있다기보다는 이 답 없는 현대사회에서 돌출된 지점이라도 잡자는 것 아니었을까요?

 

윤태균: 낙관론이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 같은데, 혹여 자칫하면 기만적인 허상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유토피아랑 낙관론은 다른 것이지만, 어쨌든 기계는 절대 중립적일 수 없잖아요? 생산 과정부터 작동하는 방식까지 하나하나 권력 한가운데 있고요.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와 테크놀로지를 가진 사람이 권력자이죠. 페이스북이 그러하듯이. 그러한 점에서 테크놀로지를 가속하는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

 

유아연: 기존 매체의 고착된 형식들은 과연 그 범주를 이탈해 작동할 수 있을까요? 이전 대화에서 물질로서 묶이지 않는 대서사적 ‘이미지’를 주로 다뤘다면, 이번에는 가 어떻게 정치적 이미지의 단서나 기호로서 작동하는지 이야기 나눠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황 이후 관계 미술의 몰락과 함께 신지평을 열었던 좀비 포멀리즘은 평면과 입체의 인식론에 대해 재정의하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죽음을 알렸었죠. 기념비적 성격을 향수하는 조각들 또한 그의 연장선으로 미술계 내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이러한 조각들은 좀비 포멀리즘의 의제에 기생하는 형태로 그 수명을 연장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시공을 보여주기란 역부족처럼 보여요. 언젠가는 너무 투명해 더 이상 굴절이 일어나지 않을 콘텐츠를 미술로서 직면해야만 하는 날이 올 텐데요,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매체의 완벽한 탈출만이 유효할 텐데, 이는 과연 어떠한 형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네요. 탈감각 미술은 과연 구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군요. 가능하다면, 작가 개인이 다수로서 투명화되어 이미지의 아우라를 붕괴하고, 동시에 그 이미지의 유통 위치를 가시화하는 것이죠. 이는 재매개의 예술적 전유로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사운드 작업 또한 이러한 시도에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시각과 청각은 분명히 고려 대상의 범위가 다르니까요. 구성적 사운드와 해체적 사운드는 다른 맥락으로 인용되겠지만 그래도 감각의 타자성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사운드 매체를 끌고 오는 것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성적 사운드, 즉 음악의 구성적 질서를 주로 인용하는 작가로는 오민을 예로 들 수 있을 텐데요. 오민의 작업은 음악의 기호성을 부각하며 관객을 작가가 설정한 대로 시간을 감각하게끔 유도합니다. 이렇게 정형화된 타임라인의 전복으로 기존 매체의 해체와 재조합을 시도하죠. 저는 시각에서 소외된 기호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포스트-오민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윤태균: 사운드는 스스로 시각적 도상을 만들 수 없으니 가장 기호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이 미술관에 들어온다면, 단순히 배경 음악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뒷받침해주는 장치로밖에 쓰이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오히려 음악가들이 미술관으로 사운드를 갖고 올 때, 오히려 그 사운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더욱 잘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부속품의 역할이 비단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운드에 텍스트성을 가지려면 기호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아연: 아 제가 음악의 타자성을 강조했던 큰 이유는, 감각의 계급화가 생각보다 극명히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각기관은 감각하는 주체가 감각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기관인데요. 이 때문에 시각을 주 감각으로 사용하는 주체는 감독자 위치에 서 있게 됩니다. 스마트폰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요즘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죠. 반면, 시각기관이 차단된 채 청각기관으로만 감각한다면, 주체의 지위는 역전됩니다. 관찰 대상이 되어버리죠. 관찰하는 타자가 없더라도, 스테레오 사운드처럼 주변을 에워싼 자극물들은 주체를 관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체는 살아남기 위해 타 감각으로 집중을 전이할 수 없습니다. 즉, 더 이상 자극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시각 매체를 사용했을 때는, 소외 상황을 인용할 때조차도 불가피하게 위선적 상태를 포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정체성에 맞닿아 있는지와 별개로, 타인을 ‘관찰’하는 위치에서 행위 한다는 점에서 죄책감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는 것처럼요. 이에 따라, 사운드는 시각 매체가 굳힌 감상 방식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운드가 가진 기호성이 또 다른 위계질서를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관객을 대하는 청각 매체의 태도로 이전과는 다른 시간성을 전시장에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조아란: 사운드가 기호적일 수 있다는 점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해 새롭네요. 시각 매체들로만 구성된 전시장, 시각 매체와 청각 매체가 함께 있는 전시장은 많이 보았습니다만, 청각 매체가 주가 되고 시각 매체가 거기에 붙는 형태로 구성된 전시장은 겪어본 적이 거의 없네요. 아연 씨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감각체계에서 시각과 청각의 자극 전달이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시각 매체들이 주가 되는 전시장 안에서 사운드가 이미지에 붙어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호적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운드가 시각 매체 감상 방식으로 굳어진 감각체계를 비집고 들어와 특이적인 감각의 배치를 반강제적으로 만들어낸다거나, 또 다른 시간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윤태균: 1990년대 초반부터 있었던 혼성모방 (pastiche)이라는 것이 미술 내에서 점점 불어나고, 미술관에서 진행되던 것들이 다른 공간에서도 가능해지고 미술에 고정적으로 부여되었던 역할들이 붕괴하면서 점점 더 미술이 키치화되어가는 것 같아요. 외부로 나갔던 예술이 미술관에 다시 들어와 다원 미술이 되었을 때는 어떠한 유효점을 가지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유효점들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지 않고 다원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상이한 층위의 영역들을 묶어 중화시키는 습관들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요. 문화 허브를 표방한 기관들은 공원으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타이틀로 묶어내는 순간 그 연결성이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문화의 여러 요소를 방대하게 수집만 해서 너무 처참히 중화되어버리는 특이점을 목도하기도 하고요. 조형과 텍스트가 서로의 교환 가치로 치부되고, 그러한 관계들은 미술계 내에서 거대한 스펙터클이 되는 것이죠.

 

유아연: 대중문화는 순수 미술의 구조를 재생산하며 확장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말씀 주셨듯, 미술이 다층적 문화 허브로 역할 하고자 강경한 목소리를 대부분 포기하였잖아요. 그저 대중문화의 어법을 답습할 뿐이죠. 미감은 나올 대로 나왔고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사상 전파는 다시 디지털 정방형 이미지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술이 이미지 너머의 많은 담론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태균: 그래서 형식주의가 부활한 것 같기도 해요. 미술사를 내파와 외파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수많은 개념 미술들, 크라우스가 부정적으로 광포한 절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시도들이 점점 외파에 치닫다가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미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들이 멜랑콜리로 향해버리게 된 와중에, 미술의 방향성이 다시 내파인 형식주의로 돌아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술 외부의 사회 정치적 담론을 미술로 다루려는 시도는 유효하지만, 그런 방식과 전략 자체가 미묘하게 대상을 키치화하고 그것의 역사성을 절단하는 동일한 이미지만 가져오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 또한 있습니다.

 

유아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미디어는 사실 혼성 모방 어조를 취하고 있잖아요. 과연 전체 담론을 훼손시키지 않고 활성화하는 것이 가능한지 고민이 됩니다.

 

윤태균: 자신이 사용하려고 하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작품의 피상적 스펙터클로 넣어 놓거나, 전시 서문에 넣거나 하는 방식으로 유효한 담론을 끌어내기는 어렵겠죠.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외부의 텍스트들을 발화하는 사람이잖아요. 어떤 작가들에게는 SNS나 대중문화 요소들이 단순한 이미지적 차용에 불과한 게 아니라 작품의 토대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자신이 차용한 혼성모방의 이미지들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말하려는 것의 이차적 재현밖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조아란: 그렇네요..

 

윤태균: 미메시스(모방)는 지금도 이차적이고 하등한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텍스트를 조형 언어로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은 번역이 아니라 열화이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단순 미메시스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의 서사를 역사에 포개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개인의 욕망을 작품 내에서 상호 접합 시켜 직접 차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매개점들을 드러내야 역사화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죠. 더군다나 그림과 조각들은 보통 미술관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날에 개인적 욕망들, 타자적 욕망들은 사실 디지털 이미지로서 유통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상호 접합 지점을 다루지 않는 자폐적인 조각/그림들은 결국엔 제도적 미술관이라는 갇힌 공간 내에서 빠르게 휘발되어 버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아연: 그래서 더욱 자본시장 내에서 유통은 활발히 되지만 그 구조 자체를 진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윤태균: 보이는 구성 등은 둘째 치더라도 역사적 효과가 사라진다면, 작품은 단순 인테리어, 굿즈가 되어버리는 것이잖아요? 작업하는 자와 비평하는 자 모두가 고민해봐야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글을 이미지로 변환한 상태 말고도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현대 회화에서는 그 조형감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호소적으로 제시하고 있거든요. 이를 다시 문장과 언어로 번역해서 한 번 더 읽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이드라인 정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요.

 

유아연: 물론 시각적 쾌를 민감하게 자극하는 작업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만, 이미지 서사와 그가 구축되는 프로세스를 일대일 대응시키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하여 공명하기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 틈 사이로 관람자를 어떻게 이끌지도 풀어내야 할 숙제이고요. 핀터레스트와 유튜브를 보는 것과는 다른 몰입감을 제공해야 할 터이죠.

 

허브 

 

윤태균: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가 쓴 “알레고리적 충동: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향하여”(1980)는 후기 미니멀리즘이 등장한 시기에 출간된 오래된 글이지만 참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과거 미술은 상징적이었다면 지금은 알레고리적으로 변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관객이 작품을 보고 수많은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웬스가 말한 알레고리는 벤야민의 개념에서 따왔는데, 상징은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뭔가를 일대일로 지시하는 도상이라면, 알레고리는 수많은 상황과 자신이 지시하는 것에서 뻗어 나가 파편화된 지점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수많은 해석에 열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만든 조형 언어들을 상징이 아닌 알레고리로 삼고자 한다면, 수많은 매개지점을 자기 작품에 포장해서 독자적인 조형으로 녹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잘 발현된 작품들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관련 매개 지점들을 쉽게 읽어낼 수 있게 합니다. 어떤 상황과 텍스트가 관련되어 있고 작가와 본인의 상황이 어떻게 역사 위에서 중첩되는지 말이죠.

 

유아연: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네요. 알레고리적인 지점들을 나열하다 보면, 1부터 10까지의 설계된 경로를 그대로 읊게 되잖아요. 너무 쉬운 퍼즐이 되어버리면 그저 외부로의 하이퍼링크에 그치게 되고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상용되었던 이미지의 상징성을 혼용하거나 붕괴해버리는 방법 등이 있을 것 같아요.

 

윤태균: 그래서 어떤 작가는 그런 것에 대한 보조 장치로 단어나 글을 넣기도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영상하시는 분들 말이죠.

 

 

 

유아연: 문자가 전면에 들어가는 작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윤태균: 문자의 기호를 전복시키거나 지우기 위한 시도들, 예를 들어 로버트 라우센버그 (Robert Rauschenberg)가 신문을 작품에 콜라주한 그런 작업들을 제외하고, 동시대의 맥락에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기념비적으로 띄우려는 작업들은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바바라 크루거는 표제를 전면에 배치해 놓고 강렬한 빨간색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마주하거든요. 미술관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미술관이 가지는 경험적 차이의 벽을 파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복잡한 조형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단어를 괜히 한 번 더 조형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들 또한 종종 있죠.

 

유아연: 보통 그렇게 텍스트를 조형에 ‘부착’했을 때는, 양측 모두 역할이 붕괴하는 것 같아요. 이는 단어를 독립적인 재료가 아닌 기생적 위치에 두고 전개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오브제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제작자가 사용하는 재료의 경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작업은 당연히 모호해질 수밖에 없죠. 단어나 오브제는 조형적 영토성을 배반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시도하는 매체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오브제, 단어의 사회적 역할로 인해 금세 재영토화가 일어나서 관람자에게 새로운 조직화를 지속시키기 또한 어려울 것 같고요. 그래서 더욱이 주 매체에 대한 고찰은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체의 이미지만 선두하고 그 활동 범위가 응고된다면, 내부의 레이어들은 읽기 어렵거든요. 저 또한 매체가 벌어지는 해프닝에만 주목하진 않았나 돌아보게 되네요. 다공성을 강조하며 음악, 퍼포먼스 등을 난발하는 경우는 이런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윤태균: 퍼포먼스와 다매체 이야기가 나오니, 영상 작업물로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퍼포먼스는 지속 가능성 이슈로 아카이빙 영상으로 대체되어 전시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때 스크린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아요. 퍼포먼스의 괴기스러운 상황을 외상적 기억이라고 상정한다면, 스크린은 그런 외상을 시각으로 매개하면서 동시에 보호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라캉이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로서의 “스크린”을 정의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보통 퍼포먼스 작업을 스크린을 통해 볼 때는 감정적 동요 없이 제삼자로서 관람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조아란: 네. 그래서 영상은 보다가 중간에 보는 행위를 중단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이와 달리 날 것의 퍼포먼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노려보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지점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퍼포머의 괴기한 행위 자체보다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의 상황이 더 괴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 때문에 퍼포먼스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어려워지고요. 퍼포머의 비일상적인 운동과 그곳에 쏠리는 많은 시선에 의해 전시장 내부에 마치 블랙홀과도 같은 거대한 중력체가 생겨버린 듯한 현상이 발생하니까요. 설령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피한다고 해도 완전히 전환되어버린 공기의 흐름 때문에 퍼포머의 운동이 어떻게든 피부로 전달되고요.

 

유아연: 퍼포먼스가 그래서 되게 강제적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해요. 관람객이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역할이 있으니까요. 알레고리적으로 관객과 매개하기보다는 되게 도상학적으로 작업 전반이 흘러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점에서 퍼포먼스 아카이브, 도큐멘트가 어디까지 작업의 일부로 용인될 수 있는지, 혹은 다른 플랫폼을 취했을 때 누락되는 맥락들은 무엇이 있는지 탐구해봐야 할 것 같아요.

 

윤태균: 퍼포먼스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관계 미학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퍼포먼스 기획하시는 분들은 관객들과의 접촉과 통제, 경계 허뭄 등을 되게 좋아하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파시즘적이죠. 상황 내에서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니까요. 관객들은 앞에서 박수 쳐야 하는 상황을 강제적으로 마주하는 것이죠.

 

유아연: 그래서 제가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 작가를 좋아합니다. 작업에서 통제의 파시즘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작업 내부의 강제성이 전시장 외부 경험으로 자연스레 확장되거든요. 인지되지 않았던 정치적 폭력성을 화이트 큐브라는 무중력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언어화시킵니다.

 

윤태균: 오히려 그런 폭로로 위계를 전복시키는 작업들이 유효한 것 같아요. 그게 바로 그 작가의 조형 언어겠죠. 아까 말씀하신 거랑 연장되는 것 같은데, 그런 작업은 정말 짜인 구조들 내에서 작가와 기획자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잖아요. 사실 미술관 내에서 완벽히 그러한 목소리가 실현되려면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적대나 틈의 것들이 드러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물론 그 사람은 정치철학자여서 민주주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대라고 이야기했지만요. 퍼포먼스 도중에도 무대를 침범해서 그 사이를 완전히 헤집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사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관계성의 의의일 테이지만, 사회의 관습을 미술이 이기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