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

[번역] 철학을 재설계하기 - 레자 네가레스타니와 로빈 맥케이의 대담

원문: UFD034 https://www.urbanomic.com/document/reengineering-philosophy/

『지능과 정신(Intelligence and Spirit)』: https://www.urbanomic.com/book/intelligence-and-spirit/

 

 

철학을 재설계하기 (Reengineering Philosophy)


레자 네가레스타니, 로빈 맥케이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2018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신간 출간회에서 로빈 맥케이와 나눈 대화를 편집·확장한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신작 『지능과 정신(Intelligence and Spirit)』의 주요 주제들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탐구한다.

 


로빈 맥케이(Robin Mackay): 레자에게 『지능과 정신』의 몇 가지 주제와 원대한 구상을 논의해 달라고 청하기 전에, 편집자이자 독자로서 『지능과 정신』에 대해 느낀 제 소회를 전하며 이 책에 관한 짧고 다소 개인적인 서론을 열고자 합니다.

우선 개괄적인 윤곽을 말씀드리자면, 『지능과 정신』은 지능(intelligence)과 인공성(artificiality)이라는 개념에 대한 철저하고 치밀한 심문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철학적으로, 우리의 능력에 최소한 필적하는 인공 일반 지능(AGI)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지능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할 때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올바른 혹은 유일한 모델이 과연 인간인가? 그리고 인공지능, 나아가 인공 일반 지능이라는 더 광범위한 개념에 관한 다양한 연구 제안과 프로그램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우리가 '지능'으로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낼 수 있는가?" 이 책은 궁극적으로 철학 그 자체를 지능의 인공화(artificialization of intelligence)를 위한 프로그램, 혹은 인공화 자체를 지능으로 보는 프로그램으로 규정합니다.

이 책의 핵심 장들은 이러한 지능의 구축 가능성 조건을 결정하기 위해 '장난감 모델(toy model)'을 사용합니다. 센서를 갖춘 단순한 오토마톤(자동인형)이 우리가 지능으로 인식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무엇을 구비해야 할까요? 이것은 초월론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에 기반을 둔 일종의 칸트식 사고실험이지만, 헤겔의 두 가지 핵심적 통찰에 의해 결정적으로 굴절되어 있습니다. 첫째, 지능, 즉 정신(Geist)은 기능적으로만, 즉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라는 차원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지능은 개별 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 집단적 마음, 특히 공유된 언어를 함의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기능주의, 집단성, 언어가 강하게 강조됩니다. 하지만 이 개념들 중 어느 것도 완전히 상투적인 의미로 다뤄지지 않으며, 이들의 수렴을 통해 지능, 인공성, 그리고 철학적 실천 그 자체라는 서로 얽힌 개념들에 접근하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이 출현합니다.

오토마톤들의 공동체라는 이 구상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장난감 모델은 컴퓨터 과학, 인공 음성 연구, 상호작용 논리학 등에서 끌어온 개념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됩니다. 요컨대, 이 공동체 내부에서 인공 일반 지능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들을 가장 잘 충족할 수 있는 현재 이용 가능한 자원들을 선별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제기하는 심오하고 겉보기에 다소 산만한 철학적 질문들에 응답하면서, 기능적으로 규정되고 실험되며, 다양한 공급자로부터 가져온 부품들이 추가되고 교체되며 해킹된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문제 설정에서 돌아와, 마지막 장은 가장 장엄한 의미의 철학적 비전으로 복귀합니다. 즉, 초월론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주의적인 프로젝트로서의 철학 비전, 지능으로서의 우리가 무엇인지, 우리의 능력에 어떻게 부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투쟁의 형태로 언제나 존재해 온 인공지능 구축 프로그램으로서의 철학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지능은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는 경향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레자는 이를 플라톤의 '선(Good)' 개념의 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학의 사용 방식이 놀라운 점은 그것이 다른 수많은 분과 및 실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것이 마치 독립된 대상에 적용되는 관계를 맺는 '인공지능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한 외부적 관점을 구성하고, 우리의 자아 개념의 변화가 어떻게 집단적 행동 양식의 변용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지(지능은 그것이 행하는 바입니다) 이해하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가 이미 인공화를 위한, 즉 우리 자신을 인공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임이 분명해집니다. 특히 칸트와 헤겔, 그리고 독일 관념론 프로그램 전반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 인공지능을 위한 기능적 설계도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일종의 대중과학 양식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AI의 전망이나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 다루는 단순한 AI 관련 서적이 아닙니다. 대신 AI라는 문제틀을 지능에 관한 더 일반적인 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에 관한 날카로운 정치적·윤리적·실존적 질문들로 우리를 이끕니다. 즉, 우리 인간이 지능이라는 이름에 부합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질문, 우리 자신을 다른 지능적 프로세스들에 의해 침범당하도록 허용하는 과정에 관한 질문, 지능이 우리로부터 자라나도록 허용하는 것, 혹은 반대로 우리 자신을 AGI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이 책의 중요성 중 일부는 현재의 히스테리컬한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 공포, 희망이라는 모호하고 형태 없는 혼돈을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저는 모든 진정한 철학은 고통의 비명(cry of anguish)에서 시작한다는 들뢰즈의 제언을 언제나 좋아했습니다. 즉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비명을 질러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제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비명을 질러야 할 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사회성이 헤아릴 수 없는 다른 형태의 기계 속으로 조금씩 잠식되듯 흡수되는 현상, 불확실성과 증식하는 지구 종말/특이점 시나리오들, 성립 가능한 인간 행위성(agency) 개념의 명백한 침식, 기술에 대한 전면적 의존과 '진보로서의 기술'이라는 해방적 아이디어를 유지하는 데 겪는 만성적 어려움, 그리고 아마도 가장 절망적인 것은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인간 지능마저 고의적으로 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철학에 시간을 투자해 온 이들에게 있어, 철학의 자원들이 어떠한 종류의 철학적 판단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일련의 불가피한 과정들을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능과 정신』에서 비범한 점은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는 레자의 성실함과 진지함, 히스테리와 철학을 통해 즉각적인 안도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 모두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책 전반에 걸쳐 그는 이 불안한 질문들을 매우 집요하게 추적하여, 종종 그 질문들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로 변형시켜 놓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묻고자 하는 '거대한' 질문들로부터, 최근 연구 분야들에 대한 압도적으로 기술적인(technical) 상술로 이끌려 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지 않고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헤겔의 정신이든 비단조 논리학(nonmonotonic logic)이든, 여기서는 어떤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서사적 호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즉, 세심하게 기획된 탐색적 경로나 동일한 질문의 서로 다른 층위 및 스케일 사이의 줌(zoom)을 통해, 주변의 모호한 형태 없는 고통과 그것이 제기하는 거대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결정적이고 실행 가능한 공학적 질문들로 나아가는 일련의 시도들입니다. 이는 절박한 감정적 긴급성이 완화되고 온갖 예기치 못한 세부사항들이 출현하는 일종의 '슬로우 모션의 비명'이 됩니다. 이러한 접근법의 한 가지 결과는 이 책의 방법론을 그것이 달성하고자 설정한 과제와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방법론에 관한 책이기도 하며, 오늘날 어떻게 철학을 할 것인가(그리고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비명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건설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것인가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방식의 사고는 우리 대부분에게 익숙한 특정 유형의 철학이나 이론의 기대치로부터 결정적인 이탈을 보여줍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주변을 감싼 정치적·실존적·기술적 곤경의 맥락 속에서 일종의 진통제, 즉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철학적 아르니카(arnica: 치유용 연고)가 되어버린 존재론적 결합과 정치적 결합으로부터의 결정적 이탈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은 그것이 수학적이든, 객체지향적이든, 신유물론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첫째, "모든 것은 X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단일한 개념적 구획을 이처럼 과도하게 확장하는 것은 사고와 행동을 위한 명확하고 안정된 장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 통합된 비전의 테두리 안에서 전진하여 둘째, "우리가 Y를 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즉 사물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일어나는 어떤 거대한 전환이, 이제 궁극적으로 단순하고 급진적으로 전복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얽히고설키고 다층적인 상황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능과 정신』은 해방적 약속이 그 개념만큼이나 허약하고 과도하게 확장되어 있는 이러한 만화 같은 존재론들로부터 완전히 이탈합니다. 이 책에서는 어떠한 "모든 것은 ~이다"와 같은 문장도, 어떠한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표현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지능과 정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어떤 '우리'라는 안정성마저 박탈하는데, 왜냐하면 이 책은 지능을 하나의 잠재적 집합성, 즉 구체적인 프로젝트로서 아직 실현되어야 할 집단성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단락은 철학보다는 시스템 공학에서 물려받은 문제들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법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레자가 시스템 엔지니어로서의 이전 삶으로 돌아가, 엔지니어의 감수성과 책임감을 철학 안으로 가져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상황에서 어떠한 낙관이라도 가질 수 있으려면, 문제의 복잡성과 다층적 본성에 대한 헌신, 특히 지능의 문제를 모든 측면과 다층적 스케일에서 구획하기 위해서 지능이 단순하지도 균일하지도 않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서로 다른 지식의 모드들을 조립하고 분절화해야 한다는 인정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철학의 고전적 만족감을 제공할 거대한 구조물 대신, 이 책에서 나오는 것은 여러 분야의 새로운 진보에 비추어 나중에 교체될 수 있는 서로 맞물리는 기능 모듈들에 대한 잠정적 명세서들의 패치워크, 즉 레자가 일종의 '철학적 레고(philosophical Lego)' 혹은 '거대한 장난감 모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법과 함께 고되면서도 유희적인 장기적 노동, 즉 우리 자신을 지속적으로 개념화하고 변용시키는 노동이 시작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이 노동의 역사적 성취(이전 작업에서 정의된 '비인간의 노동[labour of the inhuman]')를 인식하고, 이 벡터를 앞으로 이어나가는 것을 구체적인 과제로 명시적으로 다루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레자는 심지어 지능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인공화해야 할 우리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지속적인 확장의 운동을 박탈당하고 인간의 틀이든 계산 장치든 상자 안에 갇혀버린 지능은 존재하기를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브랜덤적 실용주의(Brandomian pragmatism)의 궁극적인 추론입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지능의 본성을 올바르게 개념화하고 나면, 이 개념화는 즉시 우리에게 자기 변용이라는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며,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신이 사고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음을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개념화와 변용 사이의 이러한 엄격한 관계를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이 책이 우리에게 묻는 궁극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비명은 안도를 바라는 애원 이상인가, 우리는 그 결과들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건설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철학적 도전을 받아들일 용의나 능력이 아직 남아 있는가, 아니면 현대의 지식적 기여에 의해 개정되지 않은 채 방치된 역사적 아이디어들의 통속화된 입장을 취하면서, 우리의 인지적 니치(niche) 안에서 시들어가는 것에 만족하는가?

실재하는 지능의 결함에 대한 고통과 좌절에서 태어난 이 슬로 모션의 비명은, 결국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졌을지 모를 진부한 철학적 위안과 손쉬운 수사들을 배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최소한이지만 견고한 형태의 철학적 낙관주의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 미묘한 낙관주의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 저술가이자 기술 컨설턴트인 벤카테시 라오(Venkatesh Rao)의 최근 트윗을 인용할 수 있겠습니다. "시스템 공학이란 도덕적 위기를 구조적 기회로 전환하는 예술이다."

『지능과 정신』은 우리의 시간 개념을 수정하여, 우리 개별의 수명을 훨씬 초과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엄연히 행위자로 참여하고 있는 역사적 수열 속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 책은 자신의 두개골 뚜껑을 열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기에 레고를 꺼내어 모델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엔지니어의 유쾌한 실용주의를 가지고 지능의 문제를 검토합니다.



로빈 맥케이: 레자, 제 오독에 대해 해명할 말이 없다면...

 

레자 네가레스타니: 아뇨, 이제는 당신이 저보다 『지능과 정신』에 대해 더 박식하다고 확신합니다!

 

로빈 맥케이: ...그렇다면 이 책이 설정된 기본 용어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음철학(Philosophy of mind)은 철학 내에서 공인된 전문 분야이며, 지식이나 이성의 이론을 제안하는 다양한 철학적 프로젝트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지능철학(philosophy of intelligence)'으로 이해하시는 더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철학적으로 이해되는 지능은 마음보다 상위의 위계를 갖는 영역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지능적 행동들이 있고, 그 다음에 마음(세계를 구조화하거나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구조의 기관 내지 차원, 혹은 제반 능력들의 집합)이 있으며, 그 다음에 지능이 있습니다. 지능은 마음의 능력들을 사용하여 세계(이해 가능한 모든 영역)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협상하면서, 마음의 능력들을 가지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지능철학은 초월론적 전환의 맥락에서 마음을 구조의 기관으로 전제합니다. 그러나 지능철학이 도달하는 지점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책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마음을 가진 상태(mindedness)의 패러다임을 안정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제반 능력과 초월론적 구조의 목록을 불변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문제에 일관되게 답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지능철학은 마음의 개념 자체를 재협상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지속되는 프로젝트로서의 마음 개념을 가지고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을 탐구합니다. 이런 한에서 지능은, 자신이 그 일부인 실재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실재를 공학적으로 구축해내는 것입니다. 지능은 구체적인 운동이 되어,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졸업해 나갑니다. 마음이 무엇이고 실재가 무엇이며 그 둘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안주하는 초월론적으로 수동적인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형태의 직관들이 제시되고 주어진 능력 목록이 재협상되며 마음과 그 상관적 실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론적·실천적 인지의 한계가 개정되는 초월론적 능동성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물론 마음철학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줄기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에게서 명시적으로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데카르트, 흄, 칸트, 헤겔 등으로 이어지며 다양한 변용을 겪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독일 관념론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책이 독일 관념론의 명제들을 반드시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으면서도 거기서 특정 자원들을 하이재킹(강탈)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사 내에서 독일 관념론은 행위철학, 지식철학, 마음철학의 교차점에 구축된 비판적 프로젝트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 독일 관념론은 마음, 지식, 행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포괄적인 시스템으로 정교화될 수 있는지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 시스템 내부에서 이러한 상호연결들이 서로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 방법론적으로 조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진화할 수 있도록 수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이 독일 관념론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식, 행위, 마음 사이의 다양한 상호연결을 정교하게 밝히려고 노력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지능철학은 이러한 연결고리들을 고정되거나 영구적인 것으로 여기기보다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즉 철학의 영구적인 질문들인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그 거대한 질문들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모든 인식론적·방법론적 복잡성과 함께)를 주로 다루는 시스템을 위한 다른 진화의 과정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왜 우리는 마음철학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지능철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당신의 질문을 대해봅시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각 레벨에 상응하는 방법론을 가진, 이른바 철학적 '시스템'의 위계가 존재합니다. 처음에는 지능적 행동의 영역, 즉 문제 해결, 과제 지향적 주의 시스템 등에 위치합니다. 오늘날 인지과학뿐만 아니라 컴퓨터 과학은 우리가 우리에게만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특정 종류의 알고리즘에 의해 포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패턴 인식 프로세스라는 특정 프로세스들의 '인공적 실현'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닉 자보(Nick Szabo)의 주장을 가져오자면, 진짜 경쟁은 마음의 질적인 그림과 마음을 가진 상태의 모든 측면이 알고리즘 대 알고리즘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견해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지능과 정신』에 제시된 논증은 지능을 이러한 지능적 행동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위계의 가장 아래 수준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음철학이 있습니다. 마음철학은 초월론적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비판철학이 전비판기 철학으로부터 어떻게 출현했는가라는 차원에서 도입됩니다. 전비판기 철학은 자연이나 가상적 실재가 우리에게 구조를 제공하는 철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고자질하는 사람의 심장처럼 스스로의 비밀을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철학에서 초월론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환됩니다. 이전의 패러다임, 즉 전비판기 패러다임에서 마음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백지였고 세계는 데이터였습니다. 초월론적 전환을 통해 마음은 구조화하는 요인이나 데이터가 되고, 세계는 백지가 됩니다.

따라서 마음철학은 본질적으로 구조의 가능 조건들을 광범위하게 다루는 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구조는 가장 넓은 의미의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과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세계의 이해 가능성뿐만 아니라, 세계 속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생각, 실천, 가치의 이해 가능성입니다. 여기서 일부에게 논란의 여지로 다가올 수 있는 점은, 구조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마음을 가진 상태의 이 패러다임이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정식화된 학습 알고리즘의 단순한 축적만으로는 인식적·객관적 기준, 체계적인 평가 및 개정의 모드 같은 것을 산출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연적 혹은 양적 프로세스들이 어떻게 질적으로 통합되느냐이지, 우리가 단지 그러한 프로세스들의 집합체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지능철학은 이해 가능한 것의 문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마음철학을 한 단계 더 추진하여, 이해 가능한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즉 이해 가능한 것을 구체적인 노동으로 전환하여, 마음과 세계에 대한 총체화되고 완성된 아이디어들의 역사적 환상을 해체하고, 경계를 재작업하며 실재를 풍요롭게 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입니다.

 

로빈 맥케이: 이 책에서 당신의 철학사 재전유는 인공지능이라는 철저히 현대적인 질문과 얽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AI 연구가 초월론적 전환이나 독일 관념론, 혹은 플라톤으로 돌아감으로써 실제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나요? 다양한 AI 프로젝트들이 수세기 전의,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르는 철학적 마음 개념으로 돌아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인가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이 질문에 답하려면 AI의 원래 포부(마음의 인공적 실현)가 어떻게 이후 하드 AI(특정 과제 전용 알고리즘)로 변질되었으며, 그 초기 포부의 포기에 대한 응답으로 어떻게 AGI 연구가 제안되었는지에 대해 약간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AI는 20세기 초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하나의 분야로 명확해졌습니다. 앨런 튜링이 '어린이 AI' 아이디어를 도입한 미발표 에세이 「지능형 기계(Intelligent Machinery)」를 읽어보면, 그 자신의 고전적인 처치-튜링 계산 패러다임 내에서도 그는 이미 특정 알고리즘(과제 지향적이고 문제 해결적인 알고리즘, 혹은 지능적 행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상태의 패러다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AI를 하나의 철학적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 저는 궁극적으로 AI가 철학적 분야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초기 포부 이후에 철학이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상이나 일반적 주제가 있을 때, 이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이용 가능한 방법론과 모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후 수십 년 동안 제안된 마음의 모델들은 모두 인간 수준의 AI,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혹은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지능이라는 AGI의 아이디어인 AI의 이 초기 아이디어를 충족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른바 '협소한 AI(narrow AI)'와 AGI 사이에 분기점이 형성되었습니다. 협소한 AI는 미로 찾기나 심지어 인간에게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과제 지향적이고 단순한 문제 해결 알고리즘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AGI가 인간 경험의 정립된 초월론적 구조에 맞춰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단지 인간의 경험적 편향 관점에서 바라본 디자인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AI가 데카르트, 흄, 칸트 사이의 철학적 논쟁 영역에 도달하기는커녕, 아직 전비판기 중세적 오만의 왕국을 벗어나지도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AGI는 마음을 가진 상태로서의 인공지능이라는 초기 아이디어의 후손이며, 에이전트나 다중 에이전트 시스템이 유아, 어린이 등 다양한 발달 단계를 거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에이전트는 당장의 세계를 탐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새로운 사실들'에 도달함으로써 다르고 훨씬 더 광범위한 세계를 설정할 수 있게 됩니다. 볼츠만이 기체론 강의에서 언급했듯, 이 과제는 자신들의 고착화된 편향과 진화론적으로 부여된 방법들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관찰자 및 에이전트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요구합니다. 이해 가능한 실재의 범주가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과 AGI 모두를 정의하는 과제입니다. 인간이나 AGI가 무엇인지에 대한 벤치마크로서 인간 경험의 기존 구조와 사실들에 안주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재구상하는 데 얼마나 참담하게 실패했는지를 증명할 뿐입니다. AGI에 대한 보수적인 아이디어와 테스트들은 편협한 인간 개념의 순응주의적 짝패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소여성(givenness)과 편협함의 사례들을 극복하기 위한 과제에서 AGI와 인간은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컴퓨터 과학이나 AI 연구가 왜 이 오래된(이른바 오래되었다고 하는) 철학들로 돌아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마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이미 철학적인 질문이며, 데카르트 체계에서 신체 개념이 모호하듯 마음 개념도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 정립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질문이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데카르트부터 시작하여 그가 마음과 신체 사이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우리가 더 정제된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 해주는 더 낫고 일관된 방향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일련의 질문들을 다루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에 이르러 그것은 더욱 정제되는데, 칸트에게 '마음'은 더 이상 단일한 사물이 아니라 시스템, 즉 다층적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각 층위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제약, 서로 다른 종류의 규칙을 다룹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합된 사물이 아니며, 그냥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층위들이 서로 다른 모델, 방법, 설명적 어휘에 의해 접근되어야 하는 기능적 위계입니다. 이러한 다층적 그림은 마음을 납작해진 사물이나 구조로 다루는 고전적 AI 연구 형태보다, AGI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및 이론 컴퓨터 과학의 계산 개념에 훨씬 더 잘 부합합니다. "마스터 키만 찾아내면 마법처럼 마음의 능력을 해제할 수 있다"는 식의 마스터 키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은 수많은 문들이 있는 영역이며, 각 문은 서로 다른 열쇠를 요구합니다.

 

로빈 맥케이: 하지만 그것이 '마음을 가진 상태(mindedness)'라는 개념을 정당화해 주나요? 일련의 지능적 행동들을 알고리즘적으로 재현하는 것과 더불어 조합에 들어가는 일종의 영적 첨가물이나 특별한 마법적 재료가 되지 않고서, 그것을 상정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일한 전문 알고리즘은 일상적인 자연어 맥락이든 과학 이론 구성 영역이든 개념화(conceptualisation)의 작업을 실제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실 AI 연구자가 마음을 가진 상태나 지능적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혹은 그녀는 암묵적으로라도 인간의 마음,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추론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수행하지만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개념적 활동들과의 유사성(analogy) 속에서 그 지능적 행동의 기능을 모델링하고 있습니다.

마음철학이나 인지과학 전반은 이러한 개념적 활동들을 명시화함으로써, 우리가 세계 안에서 지능의 어떤 지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사실은 전체론적(holistic)인 인간의 개념적 행동과의 유사성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물론 이러한 개념적 행동을 인공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론적 문제는 여전히 열린 질문입니다. 이것을 통계적으로, 계산적으로 포착할 수 있을까요? 제 대답은 '예'이지만, 그것은 마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실제로는 매우 다르고 다양한 프로세스와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되는 일련의 복잡한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과 결합된, 서로 다른 수준의 통계적 설명과 서로 다른 계산 모델을 요구합니다.

 

로빈 맥케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개념적 행동이 '전체론적(holistic)'이라는 것인가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우리가 개념적 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의 추론과 판단의 내용(content)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이 사실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X에 대해 내리는 모든 판단이 비-X에 대한 판단들과 추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푸르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색깔이 있다"는 또 다른 판단뿐만 아니라, "이것은 빨간색이 아니다", "이것은 흰색이 아니다", "이것은 검은색이 아니다", "이것은 금속 원소의 내재적 속성이 아니다"를 의미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전체론적인 네트워크, 즉 개념화와 추론의 웹(web) 안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웹은 특정한 과제 지향적 알고리즘의 작업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항상 이 웹에 관여되어 있습니다. 비판적 과제는 우리가 X라고 말할 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전제나 규준을 가지며 어떤 결과나 함의를 갖는지 명시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X라고 주장하려면 두 가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푸르다"라는 판단의 원초적 예시에서처럼, 추론적 연결의 웹 안에서 X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X를 주장함으로써 도출되는 것은 무엇이며, X의 주장에 이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념적 행동과의 유사성 속에서 말한다는 아이디어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계에서 인식하는 모든 행동이 우리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추론 패러다임과의 유사성 속에서 인식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추론하는 방식이 우리 경험의 특정한 초월론적 구조(신경학적 다변성, 언어, 문화 등)에 얽매여 있다면, 이는 우리가 우주 속으로 우리의 이미지를 무한히 투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충분히 조사되어야 할 회의론적 질문입니다. 그리고 예, 나는 이 회의론적 질문이 현재의 AGI 연구에서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AI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을 정립하고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비판철학의 작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로빈 맥케이: 칸트의 비판적 작업이 제시한 모델에서, 우리는 전비판기 형이상학의 상대적 단순함으로부터 칸트 학자들 중 가장 열렬한 이들조차 다소 번잡한 모델이라 인정할 만한 것으로 이동하는 첫 번째 예시를 갖게 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관된 경험이 주어진다면,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는가? 그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모델을 개발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대체한 형이상학보다 훨씬 덜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음을 시스템으로, 즉 일종의 역공학(reverse-engineering)을 시도하는 시스템으로 다룬 첫 번째 인물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가 자칫 빠지기 쉬운 마음 상태에 대한 단순화되거나 과도하게 확장된 개념을 피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나는 이미 당신이 이 책에서 철학자의 옷을 입은 엔지니어임을 마침내 드러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만...

 

레자 네가레스타니: 기본적으로 저는 공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에 대한 공학의 이러한 관련성은 나에게 매우 늦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매우 순진한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후기 작업을 통해 나에게 왔는데, 그는 책 전체에 걸쳐 숨겨진 인물입니다. 카르납은 논리실증주의자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고, 그의 1928년 저서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논리실증주의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나 1934년에 이르러 카르납은 비엔나 학파의 원래 명제들과 실증주의 비전을 근본적으로 배반했습니다. 그는 삶의 끝자락까지 계속해서 정제해 나간 근본적으로 다른 비전으로 이동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카르납의 주요 아이디어, 그를 괴롭힌 것(당신이 '존재론적 만화'라고 부른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거대한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질문으로서의 철학이 그가 표현했듯 언제나 "교양인의 아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능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대학원생들뿐만 아니라 인간 일반을 열광시키는 거대한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의 우산 아래서 우리는 솔깃한 대답들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이것만 할 수 있다면 모든 질문에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거대한 아이디어들은 실천적인 장엄한 환상을 낳습니다. 하지만 카르납은 대신 자신이 '개념 공학(conceptual engineering)'이라 부르는 것을 생각합니다. 카르납의 '개념 공학'은 이러한 최상위 상위 개념들이 모두 모호한 개념들, 즉 그가 피해명항(explicandum)이라 부르는 것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에게 서로 다른 맥락에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사실 이러한 개념들의 통합된 외관 아래에서 수많은 통합 불가능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호한 개념들을 해명항(explicatum)이라 불리는 더 정제된 개념들로 바꾸는 '해명(explication)'이라 부르는 공학적 과정의 이상을 제안합니다.

 

로빈 맥케이: 그럼에도 카르납은 실재하는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단순한 문제로 취급하여 '유사문제(pseudo-problems)'를 해소해 버리는 프로그램과는 다르지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빈 학파 시절의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적 입장에서 출발했지만,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 이후,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적 끈과의 마지막 연결을 끊어버린 열병을 겪은 후, 카르납은 자신의 초기 논리실증주의적 승인과 비트겐슈타인적 영향 모두에 반기를 듭니다. 왜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두 사상가 모두에게 언어의 문제는 구조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약 구조 차원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한다면, 전비판기 철학의 특징인 세계에 대한 즉각적 지식이라는 전비판기 철학의 특징인 유사문제라는 골칫거리를 팔고 다니게 됩니다. 사실 카르납의 초기 입장인 논리실증주의조차 셀러스가 범주적 소여의 신화(myth of the categorial given)라고 비판한 소박한 경험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왜 후기 카르납은 반(反)비트겐슈타인주의의 표상이 되었을까요? 답은 그들이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의 한계는 세계와 존재의 한계입니다. 괴델 세미나에 참석한 후의 카르납에게 언어는 메타 언어와 메타 논리의 바다, 즉 가능성의 구속되지 않은 바다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보기 위해 언어 외부로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대해 새로운 메타 논리적 입장을 취해야 하며, 더 확장된 새로운 언어에 거주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겉으로는 반(反)칸트주의자처럼 보이지만, 특히 언어의 그림 이론에서 언어가 직관적인 것에 종속된다는 칸트의 핵심 명제를 승인합니다. 카르납은 언어의 비전을 이 칸트적 형이상학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카르납에게 언어는 세계에 관한 것도, 언어 외적인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달리 말하는 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높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카르납은 대상 구성의 시스템이라는 이론의 차원에서 자신들의 고전적 문제들을 재발명함으로써 마음이나 언어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이원성으로부터 탈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빈 맥케이: 이는 책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는 내용이기도 한데, 여기서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정신의 현존재(Dasein of Geist)으로 칭송받기도 합니다! 자연어를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앞지를 수 있는 인공 언어, 즉 인공 일반 언어의 영역을 예견하고 계십니다.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언어, 즉 기존의 자연어 범주를 넘어선 언어는 구조의 차원이며, 구조는 세계 구축(worldbuilding)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구조를 확장함으로써만 우리의 표상을 확장할 수 있으며, 세계 표상을 위한 우리의 자원은 세계 구축의 자원, 즉 구조의 가능성을 가지고 놀고 그것을 다변화하며 풍요롭게 하는 데 힘입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러한 자유로운 유희가 어떻게 우리의 원초적 경험들과 다시 연결되어 『아우프바우(Aufbau)』 방식의 소박한 관념론이나 논리주의의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규약 문장(protocol sentences)'의 문제이자, 여기서 상술할 시간이 없는 참된 물리학적 과학 언어의 가능성 문제입니다. 본질적으로 성숙한 카르납은 푸앵카레처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특정한 습관화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멈출 수 있는가?" "어떻게 새로운 경험-구성적 언어나 패러다임을 구축함으로써 우리의 습관화된 경험 사실들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경험을 새로운 객관적 방식에 습관화시킬 수 있는가?" 이것이 계몽주의 질문의 부활입니다. 카르납은 계몽주의 패러다임이 타락하여 '존재하는 것의 질서(order of is)'에 순응하는 레시피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계몽주의의 참된 포부는 '존재하는 것의 질서'에서 '있어야 하는 것 혹은 있을 수 있는 것의 질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관용의 원칙과 형식적 인공 언어들을 다변화한다는 아이디어는 (현상적 질서 속에) '존재하는 사실'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사실'로 이동하는 사례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카르납을 실증주의적이거나 급진적인 규약주의자, 즉 규칙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규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는 규약주의자가 아니며, 요소적 경험이 (더 넓은 언어적-논리적 영역의) 언어적 문장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개정한다는 점에서 그는 단순한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닙니다. 어쨌든 후기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에 반대합니다. 그의 입장은 헤겔의 '정신의 현존재으로서의 언어' 비전, 푸앵카레의 '새로운 구조가 리만 기하학가 관찰자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듯 새로운 경험을 만든다'는 아이디어, 그리고 헬름홀츠의 '지각 및 감각 처리에 대한 강조' 사이에 위치하며, 이러한 견해들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한 통찰에서 도출된 결론을 다른 통찰로 과도하게 확장하지 않습니다.

 

로빈 맥케이: 따라서 카르납에게 있어 '거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공학적 문제로 정제하는 것은 그 질문들을 '유사 문제(pseudo-problems)'로 치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은 엔지니어에게 금속 빔의 강도 개념이 서로 다른 스케일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듯, 서로 다른 스케일과 맥락에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거시적 탄성의 수준에서, 금속의 결정학적 구조 수준에서, 나노미터 스케일 수준에서 강도의 개념은 서로 상이하며 서로 동일한 차원으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엔지니어는 항상 제기되고 있는 질문의 정확한 맥락과 스케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칸트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겠지만) 단일한 사물, 우리가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되고 균일한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사실 우리는 각자의 제약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스케일에서 그 개념을 정제하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메커니즘과 기능에 대한 각 설명과 묘사가 자신만의 스케일을 찾도록 하는 것, 그것이 후기 퍼트넘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에 각각 팽배해 있던 탐욕스러운 환원주의적 접근과 반(反)환원주의적 접근 모두에 맞서 추천한 레시피였습니다.

 

로빈 맥케이: 이러한 다층적 관점은 지능의 '평면적 그림(flat picture)'을 뒤로하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복잡한 과제에 대한 더 미묘한 관점을 취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는 더 심리학적인 반사작용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습니다. 즉 이러한 접근법을 제안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개념들의 '거대함'이야말로 매혹적이고 활력을 주며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 철학적 흥을 깨는 자로 여겨질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레자 네가레스타니: 맞습니다. 여기서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이 있습니다. 카르납에 관한 최근 에세이에서 앙드레 카루스(André Carus)는 자신이 '표류자(drifters)'와 '엔지니어(engineers)'라 부르는 것 사이를 구분합니다. 개념들을 서로 다른 스케일에서 항상 정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려할 때, "마음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올바르게 도달할 가능성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요? 이 스케일 혹은 저 스케일에서의 생명 개념이 일상적 의미에서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게 되는 한없는 파편화를 향해 표류하지 않으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정말 물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결코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으며 사실 근본적인 질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닥없는 파편화에 불과하여, 전체로서의 보편적 개념이라는 이상이 조각조각 산산조각 나는 것일까요? 이것이 표류자의 패러다임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며 아무도 없는 곳으로 표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단순한 표류자가 아닙니다. 엔지니어는 다층적인 스케일과 맥락에서의 이러한 지역적 가지들뿐만 아니라 언제나 전체적인 보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류의 패러다임은 보편적이거나 전역적인 개념들을 우회하고 정제하는 방법론적 방식으로만 채택됩니다. 과학사에서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중력 개념인데, 이는 뉴턴 이후 지역적 이론적 틀에 따라 변화하고 완전히 파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여기서 단지 더 많은 파편화 속으로 표류해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들을 어느 시점에 다시 통합할 수 있게 해주는 전역적인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을 봅니다. 우리가 중력 개념을 가지고 하는 모든 작업은 특수한 사례로서 뉴턴 이론이 설정한 엄격함에 응답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뉴턴 이론의 확장이지만, 뉴턴 이론이 확립한 제약 조건들에 대한 응답으로 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된 보편적·전역적 개념은 이 두 이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만 추출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비유는 전역적 개념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기계어(machine code) 아이디어일 것입니다. 기계어는 통합적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로 작업할 때 우리는 항상 인터페이스와 앱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기계어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제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기계어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면, 이러한 인터페이스와 파편화들을 어떻게 재설계하고, 다시 풀로 붙이고, 정제하며, 더 많은 파편화와 재통합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카르납이 계몽주의의 아주 참된 이상으로 공학의 이상과 연관시키는 정제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공학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사실 가장 중요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과학을 '존재하는 것의 질서', 그러니까 “무엇이 그러한가?” 에 관한 담론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론적 이해 가능성의 영역에 있습니다. 반면 이성의 문제는, 일찍이 흄에게서 보듯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공학의 질문은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의 질서'와 '있을 수 있는 것의 질문', 즉 가능성의 공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바로 엔지니어의 비전이며, 이는 실재의 번잡함, 실재의 제약들, 그리고 구속되지 않은 가능성의 바다 사이의 일종의 균형과 함께 다가옵니다. 그리고 철학사에서, 특히 카르납에게 그것은 인간 자율성의 표현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질서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든 간에, 우리는 가능성의 편에 도박을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범주만이 우리를 현상 유지, 즉 확립된 현실성에 얽매인 실재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능하고 반사실적인 새로운 세계들을 구상할 수 있는 한에서만, 우리는 현재의 실제 세계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바와 대조하여 있을 수 있는 것을 구상하고 실현할 수 있는 한에서만, 우리에게 자율성이 부여됩니다.

물론 카르납의 공학적 이상은 통상 과학적 계몽주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많은 주해자들(예를 들어 카루스, 하슬랑거, 노바에스)이 주장했듯, 이러한 포부들은 사회적 변혁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실제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포부들과 화해될 수 있습니다.

 

로빈 맥케이: 표류자/엔지니어의 구분과 함께, 당신이 책 극초반에 구분한 디오니소스적 철학하기 모드와 아폴론적 철학하기 모드라는 또 다른 구분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서론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바 중 하나는 이 책 안에 두 모드의 매혹적이면서도 때로는 울화통이 터지는 혼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당신은 여러 지점에서 카르납적 철학적 흥깨는 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계시지만...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확실히 그렇고, 저는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로빈 맥케이: ...동시에 당신이 디오니소스적 모드라고 부르는 거대한 철학적 상승과 엄청난 창조적 포부의 운동도 존재합니다. 그 두 모드와 관련해 당신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보시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모든 철학자는 불행히도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철학사의 맥락 속에서 작업합니다. 나는 철학이란 단순한 본성이나 단순한 과거를 갖기보다 역사를 갖는 것이라는 브랜덤의 생각에 정말 동의합니다. 철학은 운동, 즉 역사적 운동이며, 개념화와 변용들의 실정적 연쇄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사와 관여한다는 것,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음, 그렇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적 모험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헤겔이라는 허수아비가 좋은 예일 텐데, 그는 "철학이란 자기 시대에 파악된 사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슬로건을 매우 이단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헤겔에 대해 쓸 때, 나는 그의 신학적 비전이나 목적론적 비전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이단적으로 헤겔의 비판적 측면 중 일부를 추출하여, 그를 경전으로 보는 교조에 충실하지 않은 채 나의 현대적 맥락 속에서 그것들을 변이시키고 재공학화할 뿐입니다. 철학은 선조들을 재판하는 기관이지, 전통과 교조에 의해 방해받는 매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조들, 즉 이전의 재판관들을 재판하려면, 비록 과거를 인식하는 것이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될지라도 그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우리에게 사전에 정립되거나 부여된 것으로서의 경험의 모든 발현에 대한 반란이자, 철학적 사유의 의미로서 아직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든 다른 무엇의 경험이든 간에, 경험의 시간성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유의 시간 뿐입니다.

 

로빈 맥케이: 헤겔 질문을 다시 집어보자면, 헤겔을 다시 가져오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물어야겠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의 작업에 기반을 두면서 헤겔 사상의 다른, 어쩌면 반박 가능한 모든 요소들로부터 명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오, 레자가 그냥 헤겔주의자, 신학자가 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로빈 맥케이: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알고 있습니다.

 

로빈 맥케이: 푸코의 말을 변용하자면, 헤겔은 영화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와 같습니다. 그를 죽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항상 침실 옷장에 숨어 당신에게 튀어나오려고 기다리고 있지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하지만 핵심은 철학의 과제가 동시대적 순간에 따라 사유를 재발명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방식으로 돌아가자면, 철학은 디오니소스적 모험주의와 전면적 탐험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철학은 또한 깊은 철학사 속을 뒤돌아보고, 그것을 헤겔의 교조뿐만 아니라 칸트, 데카르트, 흄 등과 비교할 수 있도록 이 모험을 멈추는 것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철학의 아폴론적 측면, 즉 전통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적 방식은 하나의 방법이며, 당연히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에게 철학자란 디오니소스적 접근과 아폴론적 접근 사이의 위대한 헤지펀드 매니저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 패러다임들 중 하나가 실제로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철학사를 지능의 펼쳐짐으로 보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거나 전통에 대한 절대적 반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이러한 전술들 자체는 철학사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충분히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철학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왜곡하는 양극성 반응일 뿐입니다.

 

보통 대륙철학자들은 아폴론적 철학자들을 단지 철학자 지망생에 불과한 학자들로 생각하는 반면, 아폴론적 철학자들은 대륙철학자들, 즉 디오니소스적 모험가들이 단지 신선함이라는 어떤 외관을 찾으려 애쓰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들이 사실 병리적인 현상이자 매우 최근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은 브랜딩에 불과하며, 철학은 결코 브랜드를 사들여서는 안 됩니다. 카르납이 있던 20세기 초를 돌아보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구별은 결코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분을 촉발했던 철학자인 카시러도, 심리주의에 반발했던 프레게조차도 그 구분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 아담 버그(Adam Berg)가 말했듯, 그것은 람보르기니와 페라리 같은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것들은 단지 브랜드일 뿐입니다. 철학자들은 결코 브랜드를 사들여서는 안 됩니다. 명품 브랜드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몰고 다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자동차 생산에 들어간 모든 혁신과 세부 작업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를 틀 안에 가둡니다. 죄송합니다, 이 비유를 너무 오래 썼네요.

 

로빈 맥케이: 하지만 우리가 헤겔에서 플라톤으로 어떻게 넘어가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또 다른 악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지능과 정신』에서 지능철학과 그 실용주의적 결과들로 묶인 내용과, 닉 랜드(Nick Land)의 초기 글들부터 나타나는 핵심적 수사 사이에는 어떤 결정적인 지점까지 명확한 평행선이 존재한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랜드의 작업에서는 칸트 철학을 인공지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보는 수사, 즉 초월론적 역공학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미 존재합니다. 랜드에게 칸트적 비판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해체 및 인공화 프로세스들의 철학적 다이어그램이며, 이러한 탐색적 지능의 해방과 그것을 주체, 국민 국가 등으로 다시 고삐를 죄려는 시도 사이의 불안하고 불안정한 타협입니다. 랜드가 '지능의 편에 서는 것', 미래로부터 작용하는 해체와 인공화의 이 비판적 프로세스의 편에 서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으로부터 지능을 조립해 내는 이 프로세스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템플렉시티적(templexical)' 프로세스들에 의해 조종되거나 심지어 그것과 동의어입니다. 그리고 논쟁의 여지없이, 여기서 우리가 이 지능의 프로세스에 의해 흡수되고 활용되도록 촉진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서 절망적으로 반동할 것인가에 대한 규범적 선택이 제안됩니다.

여기에 헤겔을 다시 가져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시나리오는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를 활용하는 미래의 지능은 정확히 언어, 사회성, 규범들에 대항하여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작용하는 지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지능의 저항 요인이 아니라 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레자 네가레스타니: 헤겔을 도입한 데는 수많은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이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칸트가 초월론적 전환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는 보수적인 사상가라는 점입니다. 칸트에게 '행위자(agent)'라는 아이디어는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헤겔이 말했듯 '편협(parochial)'하기까지 합니다. 이성적 행위자성의 구성에 있어서 편협할 뿐만 아니라, 이 이성적 행위자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세계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는 실재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협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편협합니다.

 

헤겔에게 이성적 자아나 행위자의 풍요로움은 실재의 풍요로움과 손을 잡고 나아가며, 그것이 바로 헤겔의 오디세이입니다. 반면 칸트에게는 일종의 초월론적 수동성이 존재합니다. 이 질문은 일찍이 『순수이성비판』의 초월론적 감성론에서 제기되는데, 거기서 직관을 조직화하는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의 형식들은 이미 정립되어 있으며,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얻는 것은 왜곡된 실재에 대한 왜곡된 렌즈를 제공하는 일종의 불모의 현상론(phenomenalism)뿐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어느 정도까지만 정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악순환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당신이 실재(Real)라 부를 만한 것에 더 깊이 접근하기 위해 사용하고 정제하는 현상적 실재가, 단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처럼 세계에 투사된 특정한 행위자적 편향들의 투사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무한함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무한히 왜곡되고 추악한 그림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한때 열렬한 칸트주의자였지만, 이 시점에서 이성적 회의주의의 독소가 내 피부 밑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전비판기 철학을 부활시키지 않고서는 초월론적 전환을 되돌릴 길을 찾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감각 프로세스, 논리학, 언어 등에 대해 스콜라적 유희나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칸트적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질문에 답하자면, 헤겔은 일종의 회의주의를 채택합니다. 나는 그가 회의주의적 사상가라고 생각하지만, 수동적인 피론주의적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회의주의의 오르가논(기관), 즉 이성의 질서 내부에서 탐구의 노동(skeptikos)을 재활성화하고, 칸트에게는 단지 거기에 존재하며 행위자와 관련해 결코 의문시되지 않는 경험-구성적 범주들의 '소여성(givenness)'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헤겔의 프로젝트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제가 헤겔을 도입한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이유들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는 역사(history)의 문제입니다. 지능은 본질적으로 자기-개념화하는 행위자이기에 스스로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개념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용시키기 때문에 역사를 갖는 자기-개념화하는 행위자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고 병리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아 개념이나 당신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방식은 실제의 당신과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헤겔에게 있어 정신(Geist)의 역사, 즉 개념화와 변용 사이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무엇으로 파악하는가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변용시켜야 하는가의 근거가 되며,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변용시키는가는 다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근거가 됩니다.

이것들이 내가 헤겔을 칸트 프로젝트의 교정책으로서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즉 칸트가 상상할 수 없었던 무언가로서 도입한 이유들입니다. 칸트에게 철학의 아이디어는 세계에 대한 수동적 이해라 할 수 있는 반면, 헤겔에게 그것은 세계에 대한 수동적 이해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실재에 개입하고 그것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헤겔은 플라톤처럼 구제불능의 프로메테우스주의자이자 골수 관념론자이지만, 소박한 관념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계의 실재를 풍요롭게 하려면 행위자적 이해의 광범위한 구조에 대해 회의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의 외관을 뚫고 들어가, 오성의 범주들과 세계의 직관된 항목들 사이의 단정해 보이는 연결을 깨뜨려야 합니다. 일반적 오성의 능력이 아니라 비판의 오르가논으로서의 헤겔의 이성 아이디어야말로, 수호되어야 할 초월론적 전환의 기본 제스처를 뒤집지 않으면서 칸트에 대한 비판을 개시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로빈 맥케이: 랜드의 영향에 관한 질문을 피하는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만, 나는 계속 밀어붙이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동시적 충실함과 배반(닉 랜드는 지양[aufheben]되었나요?!)이 나에게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의 '가속주의' 브랜드와 더불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구출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지능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지능의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지능의 편에 선다는 것은 사유의 결과가 심리학적 혹은 의견에 기반한 전제들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이해를 가지고, 사유의 편 혹은 넓게는 인지(cognitions)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랜드와의 차이점이 부각될 수 있는데, 지능은 언제나 최소한 세 가지 형태의 이해 가능성, 즉 이론적, 실천적, 가치론적 가능성에 얽매여 있으며, 일종의 소여의 신화(이론적, 실천적, 가치론적 부여물)로 퇴보하지 않고서는 이들 사이의 차이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각각은 고유한 탐구의 규범을 요구합니다. 지능이 세계에 대한 사실을 아무리 많이 축적한다 해도, 사실-가치 구별 없이는 기능할 수 없으며, 이는 자기-개념화의 감각(자아나 세계 모두 미리 정립된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 세계와 관련하여 개정 가능한 자신의 위치)을 요구합니다. 지능의 표식으로서의 자기-개념화는 전적으로 행위자성(개념화가 존재하는 자아와, 확장 가능한 세계의 개념에 따라 자아를 변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가치론적 간극)에 관한 것입니다. 닉 랜드는 이성적 행위자성을 어떤 물리 법칙에 의해 해명되어 사라질 수 있는 관점적 현상적 자아(제거주의자들과 매우 유사하게)로 오해하지만, 마음을 가진 자아는 비-관점적(a-perspectival)입니다. 자아는 단지 사유화되지 않은 공간(정신[geist])에 힘입어서만 행위자가 되며, 이 공간은 자아로 하여금 다중-관점적(가상적으로 집단적 관점을 채택하는)이 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비-관점적이 될 수 있게 해주어, 개념의 힘을 개별 경험 주체든 특정한 역사적 행위자나 재판관이든 그 어떤 특정 행위자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 사유의 개정 가능한 존재로 보게 해줍니다.

지능의 개념을 이성적 행위자성으로부터 분리할 때, 우리는 자연을 지능으로, 심지어 지능적 디자인으로 합리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 내 말은, 랜드가 지능으로서의 자본주의가 비-행위자적이며 지능의 복잡화를 향한 자연적 목적론적 추동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왜 문제를 일으키는 일부 무슬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신반동주의적 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이 문제가 될까요?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인 행위자들이 있든 없든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가속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행위자들의 기여에 전적으로 기반을 둔 신반동주의적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조차 있을까요? 왜 우리는 지능을 적대적 경쟁이나 "전쟁은 신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정의해야 하나요? 가속이 실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행위자 기반 사회(신반동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도 필요하지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다면 행위자들이 자본을 그 궁극적 목적을 향해 가속시킬 것입니다. 이것들은 순전한 모순입니다.

 

로빈 맥케이: 이제 『지능과 정신』을 읽으며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던졌던 다소 연관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철학적 흥깨는 자에게 완강히 저항하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부분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이클로노피디아(Cyclonopedia)』는 정신분석, 신화, 픽션, 무의식과 관여하는 열광적인 철학적 전통에 분명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지능이 사회적 규범을 지속적으로 개정하고 업데이트하기 위해 작동할지라도 지능이 집단성에 얽매여 있고, 따라서 언어 및 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을 숙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무의식(unconscious)은 어떻게 되었나요? 사회적 프로그램과 집단적 규범에 항상 비스듬히 작용하는 '마음을 가진 상태'의 그 부분, 언어 밑에서 작동하며 다른 곳으로부터 우리를 프로그램하는 그것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 안에서 무의식은 어디에 있나요? 아니면 지능에 대한 이 집단적 개념, 본질적으로 사유화되지 않은 마음 개념 자체가 무의식인가요?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처음부터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함의하기 때문인가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내가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책에 500페이지를 더 추가해야 했을 것입니다...! 내가 반대하는 거대한 상위 개념들로 돌아가자면, 무의식이라는 질문 자체도 정신분석 전통에서조차 매우 모호합니다. 그것은 과도하게 거대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빈 맥케이: 그것이 피해명항(explicandum)이군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정확히 그렇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무의식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신경과학이 주의 시스템이나 전역 작업 공간 아래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계산 프로세스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할까요? 당신이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극장의 아이디어이고, 무의식은 무대 뒤로 운반되어 당신이 결코 보지 못하는 모든 줄거리와 소품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가 무의식으로 의미하는 바일까요? 아니면 더 음험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에서 무의식은 니체나 마르크스에게서처럼 의식이라는 건물 전체를 하이재킹한 것으로 의심되는 일종의 실재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의식의 아이디어는 물론 거대한 것이며, 저의 책은 전반적으로 의식에 서로 다른 등급이 존재하므로 그것들에 대해 단일한 무의식 개념을 상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 의미의 '무의식'에 대해 나는 '예'라고 답할 것이며, 그 질문은 사유의 계산적 인프라라는 차원에서 책 안에서 이미 사실상 답변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을 의식에 맞서 작용하는 일종의 실재로 보는 후기 프로이트 이론처럼 이해하고, 히스테리처럼 우리 행동과 신념의 불일치 속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직접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면, 의식의 자원을 끌어들이지 않고 어떻게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후자가 전자에 포함된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면 진단의 악순환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우리의 의식적 일관성의 기준을 잠재적으로 지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일관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알려질 수는 없지만 생각될 수는 있는 것으로서의 누메논(noumenon: 물자체)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서의 현상(phenomenon)이라는 칸트의 생각과 같지 않은가요? 그러나 칸트는 '마치 ~인 것처럼'하는 판단과 구성적 판단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격률에 반하여, 누메논을 사유를 실제로 규정하는 사유의 가설로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너무나 비일관적입니다. 만약 Y가 X를 포섭했다면 우리는 Y에 대해 어떻게 X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질적 포섭(real subsumption) 명제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이상학적 총체성의 예시를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자본주의는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 실제 일관되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형식적 사회적 실천들까지 하이재킹했다는 식입니다.

다른 점도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와 프로이트 자신의 차이라는 차원에서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페렌치에게, 그리고 오토 랑크(Otto Rank)에게도 무의식은 접근 불가능한 실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재라고 말한다면 칸트의 누메논과 같아지지만, 그것이 현상을 하이재킹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며,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왜 정신분석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그러나 페렌치에게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의, 자기의식의 의무입니다...

 

(크고 강렬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로빈 맥케이: 우리가 닉 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들이 들었군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인식론 경찰이네요!

 

...그래서 페렌치에게 무의식의 아이디어는 누메논이나 부여된 실재, 혹은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유의 의무는 언제나 자신의 제약들을 표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식의 실재를 하나의 상정(postulate)이자 가설로 상정하는 자기의식의 의무입니다. 여기서 무의식의 아이디어는 지능이나 의식, 혹은 책이 이야기하는 인식론적 요구 사항들의 아이디어에 대한 모순이나 대립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야심을 공유하지 않는 실재나 자연과의 대면 속에 서 있는 사유가 이미 인식론적 도구들로 무장하여 자신의 제약들을 부각시키는 사유의 성숙이 됩니다. 의식이 성숙해질 때, 성숙도를 더 높이기 위해 의식은 자신이 사실상 외부의 원인적 요인들의 영향 하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은 결코 통째로(형이상학적 총체성으로) 취급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의식을 옹호하든 무의식을 실재 요인으로 인정하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침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놓는 모든 주장이 자의적으로 정당화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로빈 맥케이: 이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장난감 모델에서 당신은 원초적 감각 능력을 가진 오토마톤으로 시작하여, 그것에 공간에서 스스로 방향을 잡는 능력, 동료 오토마톤들과 소통하는 능력, 시간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을 부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또한 노력이자 추동(nisus/striving)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능을 자신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추동의 차원에서 정의합니다. 따라서 당신에게 이것은 선(Good)을 향한 추동입니다. 마지막 장에서 정교화하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말입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지능을 조립해 내는 추동을 제공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욕망하는 기계입니다. 그리고 AI에 대해 글을 쓰는 어떤 이들은, 예컨대 에이전트들에게 섹슈얼리티(sexuality)이나 이와 유사한 '비이성적 욕구'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지능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지능이 지능적이기 위해 꿈을 꿀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면 지능적이기 때문에 꿈을 꾸게 될까요? 달리 말해, 선이나 자기 연마에 대한 갈증이 충분히 완전한 의미의 지능을 정의하고 가져오기에 충분한 추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나는 그 질문의 틀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유사 문제(pseudo-problem)입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 AI의 과제가 아닙니다. 칸트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비-자의적이거나 비판적인 가능 조건들의 목록을 결정하는 것이 AI의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러나 물론 실재적인 AI를 창조한다는 것은 우리 프로젝트를 밑받침하는 이론적인 일련의 추상적 문제들로부터 구체적인 것을 향해 이동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오, 음, 섹슈얼리티가 필요해, 감정이 필요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질문들은 우리 과학과 인간 자기의식의 성숙과 연동되어 병행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AGI가 저 밖에 존재하여 우리가 그러한 식의 진술을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치론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압축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AGI의 병리적 현상은 인간 마음의 병리, 즉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병리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이 우리 인간에게조차 여전히 너무나 모호할 때, 이 상대적으로 젊은 연구 프로그램에게 감정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들을 포함시킬 것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 무지의 관점에서 AGI를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계산적이고 통계적인 프로세스들에 의해 실현된다는 이유만으로 AGI가 그러한 개념들을 가질 수 없다고 도대체 누가 말했나요? 나는 단지 우리가 감정과 섹슈얼리티 같은 개념의 빈곤을 기계에 투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철 좀 드세요! 감정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기계가 어떻게 감정을 보여주길 기대하나요? 이것은 반동적 휴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계를 향한 모호한 요구의 형태로 우리 자신의 무지를 투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감정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지러운 개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희망이나 바람 같은 인지적 혹은 경험적 정신적 에피소드(인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슬픔의 느낌, 아늑하다는 경험(경험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만약 후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암묵적인 추론적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종의 즉각적이고 사적인 지식, 한 에피소드에 대한 비-추론적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일까요? 만약 후자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소여의 신화라는 위협을 좌절시킬 수 있을까요? 일찍이 스토아학파 시절부터 감정은 암묵적일지라도 신념-내용(belief-contents)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감정이 무엇인지 실제로 알기 위해서는 추론과 내용의 정당화 영역으로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분명 진화론적 관점에서 감정은 유용한 휴리스틱 도구였으며, 우리의 일상적 추론 감각을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조건지어 왔습니다. 감정적 장치의 사용을 통해 많은 발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설명해주지 않으며, 발견의 감정적 방식들이 인식론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도 않습니다. 감정이나 정동(affects)을 사용하여 그 인식론적 권리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i)에 불과합니다. 과학적 이성적 방법의 성숙과 연동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러한 감정적 발견 방식들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 그 자체만으로는 객관적 영역에 관한 인식론적 주장과 관련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도구들과 그 각각의 발견들의 내용을 구별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진화에 의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바꾸기 위해서도 개념적 추론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감정과 정동적 탐색 방식을 고안하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넘어, 감정의 내용이 구별되고 정당화되거나 수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감정들이 제시될 수 있는 개념적 합리성의 영역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스토아학파의 기초 레슨입니다.

 

로빈 맥케이: 지능적이기 위해 에이전트는 이러한 추동(nisus/striving), 즉 스스로의 더 나은 버전이 되려는 추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우리의 지능이 매우 다른 맹목적인 추동들로부터 발달했다는 사실입니다.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자연적 프로세스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것이 그것들에 의해 구성되거나 조종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이론, 개념, 추론을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그 맹목적인 프로세스들을 봅니다.

 

로빈 맥케이: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지능에 대한 유전적(genetic) 관점이 아닌 기능적(functional)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군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예, 그리고 이것은 다시 프로이트의 무의식 아이디어로 돌아옵니다. 아이디어는 이렇습니다. 무의식이 프로이트적 무의식이든, 랜드적 의미의 누메논적 실재든,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우선 우리는 그러한 실재의 지표들, 이러한 원인적 요인들에 의해 행동이 실제로 설명될 수 있는지 여부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설명될 수 있다면 어떤 과학적 방법에 따라서 설명되는지, 어떤 견고한 방법에 의해서인지는 규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유 연상이나 자유로운 해석학적 주석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악마가 이 마녀를 사로잡았고 그녀가 이러한 증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태우고 악마도 함께 태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증상과 원인의 자유 연상에 관한 한, 우리는 순전한 오컬티즘(occultism)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로빈 맥케이: 이제 『지능과 정신』에 대한 조망적인 관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책이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적 체념과 마법 같은 혁명적 해방 아이디어 모두에 반대하며, 해방의 과제를 우리의 개별 수명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 중 누구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철학자로서 당신은 지능이 그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실재하는 인간 지능의 결함들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나요?

 

레자 네가레스타니: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불가피하게 모호한 대답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한 개별 주체인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별 주체는 질문 자체의 다면적 측면에 참으로 충실한 사람이라기보다 사이코패스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만, 즉 나 스스로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철학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정도 범위 내에서 나는 나에게 이 질문이 극도로 중요해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론적·실천적 인지로서 우리의 인지의 증진, 지능이 철두철미하게 집단적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지능의 증진이 진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비하되고 있는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도달했을까요? 이것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지능은 스스로를 위해 세계와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문제는 우리가 거쳐온 시나리오와 정확히 마찬가지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자율성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식하고 기념하지만, 그 기념이 부모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미래의 지능(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이든 간에)에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일반적 패러다임입니다. 우리가 단지 특정한 형태의 지능, 말하자면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일반 지능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능의 선사(先史) 시대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할까요? 그것은 스스로 지능적이라고 간주하는 임의의 에이전트라면 품어야 할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근본이자 우주의 중심,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완성된 총체성으로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보수적 휴머니즘 모두 이 질문을 방법론적으로 다루기를 꺼려한다고 봅니다. 만약 인간이 이 고정된 X라면 그 비전에 안주합시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초자연적인 공상일 뿐이므로(보수적 휴머니즘). 혹은 인간이 이 정립된 X이고 우리가 그 좁은 범주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지각을 가진 라바 램프, 지능을 가진 감자, 혹은 구속되지 않은 지능들, 어쩌면 절대적 우연성의 등록부로서의 신과 같은 온갖 환상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포스트휴머니스트적 공상의 비행). 이것들은 둘 다 인간이라는 고정된 개념에 기생하고 있으며, 전비판기이자 과학 이전의 인류관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실천적 체념을 승인하는 것처럼 들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여가 존재합니다. 전직 엔지니어로서의 나에게 있어, 나는 사실 이러한 초-혁명적인 포부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실천적으로 겸손하고 싶으며, 심지어 지루할 정도로 그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철학자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education)의 아이디어입니다. 교육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지능철학 및 마음철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고등교육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양육에서부터 발달 심리학 등에 이르는 교육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의 기초로서 이 교육이라는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취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미래적 예측도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혁명적 패러다임에, 우리가 성취한 것에 과도하게 고양되지만, 이틀 뒤, 혹은 20년 뒤에 우리가 악화되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육은 나에게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기여입니다. 그리고 지금 교육이라는 아이디어는 서구 국가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근본적으로 병리적입니다. 이른바 혁명가라 불리는 이들은 왜 지능의 역사 및 구체적인 정치적 변혁과 깊이, 근본적으로 얽혀 있는 교육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나요?

이제 교육이 시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단지 서구만의 병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교육은 오늘날 모든 곳에서 시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교육의 시장화보다 훨씬 더 음험한 무언가를 봅니다. 나는 책에서 이 점을 조금 이야기하지만 교육과 직접적으로 연관 지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교육이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양극화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좌파에서 우리는 교육이 과학적 사실의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만을 가진 채,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의 미덕에 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 없이 주체성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순전히 심리학적일지라도 서로 다른 개인적 선호와 선택이 사실로 취급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유사한 무언가가 됩니다. 반면 우파에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병리 현상을 봅니다. 즉 상호주체성의 최소화와 사실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흄에게서, 그리고 사실 플라톤에서부터 사실-가치 구별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서로 뭉뚱그릴 수 없습니다. 항상 서로에 대해 그것들을 삼각측량해야 하며, 그것이 이해 가능성의 노동입니다. 과학적 사실 없이 상호주체성만을 가질 수는 없으며, 단순한 과학적 사실의 축적만으로 사회적 가치, 정치적 가치, 정치적 패러다임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둘 다 병리적입니다.

나에게 이 모든 것은 단지 첫 걸음일 뿐이며, 나는 실제로 교육 시스템이 무엇일지 그 세부 사항을 다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육 시스템이란 자기가 무엇인지, 세계의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완전히 결정하지 못한 지능의 '좋은 삶(good life)'을 결정할 수 있는 교육입니다. 즉 세계 속 자신의 위치와 관련하여 탐구 방법을 개발하는 과정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지능, 자신이 거주하는 우주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연마하는 지능을 위한 교육 시스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