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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text

『큐트 가속주의』 역자 서문

Translator’s Introduction by 윤태균

말랑하고 포근해 보이는 이 책은 실로 강한 산성(acid)이다. 귀여움은 “모든 견고한 것을 녹여내리는” 생화학적 인자이다. 그러나 이 녹아내림은 귀여운 슬라임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남성적 가속주의는 성인 신체의 상실과 절단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를 통한 쾌락)을 추동하지만 귀여움은 디지타마(デジタマ)처럼 신체를 알로 되돌려 가상적 신체로 다시 태어나도록 한다. 보수적인 육체의 감각을 초월한 욕망은 새로운 (귀여운) 기관을 수태한다. 이 새로운 기관은 어떠한 인준된 권위나 신체의 스키마를 충족하려는 목적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귀여움은 상대의 마음을 동하여 어떤 신체적 규범을 재확인하게 하는, 그런 보수적 정동의 진부한 사건이 아니다 귀여움은 바늘처럼 뾰족하고 드릴처럼 강력한 상호적 폭력의 무언가이다. 

귀여움은 노심이다. 주위의 것을 피폭시키고 녹여 코리움(corium)으로 뒤섞는다. 에이미와 마야는 귀여움의 노심에 온갖 진지하고 남성적인 텍스트와 이미지를 집어넣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1980)에 대한 전방위적 패러디를 표방하며, 그 내밀한 안쪽에는 마르크스, 니체, 바타유, 닉 랜드, 마크 피셔의 텍스트까지 풍부한 원전이 단단한 형태를 벗어 던진 채 독해의 잠재성만을 빛낸다. 이 융용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일종의 화학 실험이다. 단단하고 칙칙한 하부구조는 점차 부식되어 끈적하고 말캉한 무언가로 변한다. 푸딩같은 하부구조 위에 선 모든 현실은 부드럽게 무너져 내려 저급한 층위로 추락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속주의는 무엇인가? 음침한 종말론자의 컬트로 전락한 비주류 문학 분과인가, 힙스터 사이에서 하입(hype)된 패배주의적 문화인가, 급진적 정치철학의 탈주적 이면인가? 차라리 가속주의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이 가속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보다 그 의도를 더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속주의의 중요성은 그 마초적 폭력성에 있지 않고 강도(intensity)에 대한 도착 증세로 촉발되는 비인간적 페시미즘에 있다. 그리고 가속주의의 가장 큰 실천성은 그것이 (정치적) 무의식의 경향에 따라 폐쇄적 현실을 파열하고, 제약되었던 급진적 상상을 니체적으로 가속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텔레오플렉시(teleoplexy)를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불가역적 운명이 아니라 불가분한 해체와 즉각적인 재구성으로 총체화되는 미래라는 추상의 끌개(attractor). 어떤 경사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선이 각기 다른 버전으로 고정된다. 

모두 자신만의 가속주의를 가진다. 오늘날의 많은 귀요미들과 마찬가지로 에이미와 마야는 귀여움의 경사로를 선택했을 뿐이다. 여기서 귀여움은 퀴어의 격정적 실천으로도 나타난다. 대디 어드민(Daddy Admin)의 가부장적 꼰대짓은 귀여움에게 먹혀 소화될 운명에 처해진다. 성(sex)과 젠더의 구획을 교란하고 뒤섞음으로써 새로운 인간종이 탄생한다. 본문에서 언급하듯, 소셜 미디어와 웹 네트워크의 부흥은 귀여움의 팬데믹을 야기했다. 귀여움은 강한 전염성은 이분법의 극단에 놓인 항을 하나의 (가상적) 육체로 주조하여 실로 퀴어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남성/여성, 인간/동물, 엄마/아빠, 실재/가상, 현실/역현실, 아저씨/소녀…

역자로서 번역의 어려움에 관해서도 언급하겠다. 이 책은 근 수년간의 인터넷 문화가 가속한 풍부한 기호계를 연성의 재료로 삼는다. 영미권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은어와 속어, 출처가 어렴풋하게만 암시되는 여러 기호들. 엄숙한 철학 텍스트에 대한 경박한 패러디… 단어와 문장, 본문과 각주는 즉각적 프롬프팅으로 축적된다. 이는 형식화의 결과가 아니라, 쌓기와 늘어놓기. 코딩과 디코딩의 즉각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고민되었던 지점은, 정돈된 형식이 글에 잠재한 무수한 날카로움을 뭉툭하게 깎아내릴 수 있겠다는 우려였다. 그리하여 해제하여 깔끔하게 늘어놓기보다는 그 산성을 그대로 옮겨오고자 했다. 이는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귀여운) 기관 혹은 장치를 절단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큐트 가속주의
CUTE ACCELERATIONISM
에이미 아일랜드, 마야 B. 크로닉 지음
윤태균 옮김
초판 1쇄 발행. 2025년 11월 14일
펴낸이. 신상아
발행. 폼레스 트윈즈
편집 및 디자인. 폼레스 트윈즈
제작. 인타임
ISBN 979-11-995457-0-0 (90110)
값 3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