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월간미술』 500호 특집 기획 「월간미술 500호, 미래를 기억하기 위한 열 가지 질문」에 기고되었음.
‘젊음’과 ‘작가’, 그 덫에 관하여
윤태균(큐레이터, 연구자)
이른바 비엔날레 미술과 세계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술을 지탱하는 비계는 물질에서 담론으로 변화했다. 이제 미술은 자신의 정당성을 언어적 기예에 의탁하는 데 익숙하다. 예술가는 고도의 기술적 숙련도를 요하는 전통적 장인이기보다 언어로 자기 자신을 확증해야 하는, 비물질 노동자이다. 물론 이러한 탈물질화는 비단 미술계만의 일이 아니다. 포스트포드주의(Post-Fordism)와 신자유주의는 예술의 전유물이었던 창조성과 혁신을 주요 산업 전반에 가장 중요한 경제적 동력으로 이식했다. 파스칼 길렌(Pascal Gielen)의 설명을 빌리자면,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전환은 “물질노동에서 비물질노동, 그리고 물질적 재화 생산에서 비물질적 재화 생산으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어진다.[1] 바꾸어 말하면, 신자유주의적 노동과 산업의 작동 방식은 이미 미술계에서 성공적으로 시범되었다. 이전의 포드주의와 달리,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현장에서는 “유연성, 언어, 소통, 정서적 관계 같은 요소들”이 중요한 미덕이다. 미술계의 노동윤리이기도 했던 젊고 역동적인 인력, 유연한 노동시간, 단기 계약 혹은 계약의 부재, 프로젝트 단위의 이합집산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데 있어 최적의 원리로 채택된 것이다.[2] 오늘날 대부분의 비물질 산업이 노동자 개인에게 요구하는 창의성, 혁신, 유동성 등은 이와 같은 현상을 확증한다. 기업이나 지자체가 유사한 지원사업을 운영하며 문화산업과 이미지 향상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기업과 지자체의 대외적 이미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실제로 젊은 창의성은 생산의 증대를 책임진다. “포스트포드주의에서는 말이 곧 살이 되었다.”[3] 무엇이 먼저이든 간에,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화와 미술계의 작동 방식은 서로를 참조하고 강화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젊음’과 ‘작가’라는 담론은 오늘날 미술계를 여전히 ‘활발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일 것이다. 미술계라는 비물질-담론 경제 기계는 젊은 작가의 열정과 민감한 유행 포착 능력, 그리고 그 넘치는 인력을 자신의 유지보수를 위해 거리낌 없이 추출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공고되는 ‘신진 작가 지원’, ‘청년 예술 지원’ 등의 표어가 공고되는 이유는 미술계와 자본이 미술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투자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미술계는 그들 없이는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물질화된 미술은 매번 새로움을 원한다. 전시 홍보 게시글에 달리는 해시태그와 같이, 무수히 생산되는 전시와 그에 수반되는 글에는 항상 적절한 새로움이 요구된다. 미술계에서 담론은 마치 상품처럼 유통되는데, 빠르게 유동하고 변화하는 비물질 재화의 특성상 담론 또한 잽싸게 유행을 갈아탄다. 당연히 어떤 담론이 유행하는지는 지리적 맥락, 미술시장, 비평가들의 해석,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한 해석 등 복합적인 담론 네트워크의 상호얽힘이 결정한다. 그리고 젊은 작가는 미술이 다루려는 동시대의 시급한 의제들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제안한다. 이렇게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담론은 도록과 보도자료에 ‘흥미로운 관점’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저명한 비엔날레들에서 지난 20년간 제기해왔던 사회정치적 주제들, 그리고 그 담론경제의 확산으로 재편된 동시대 미술계의 생태는 정말로 실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예술적 ‘대안’을 제시하는가?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는 미술계에서 말해지는 ‘흥미로운 관점들’이 “정확히 신자유주의적 거짓 대안들의 인지적 복제물이며, 부정적 미결정성을 과보상하고 진정한 원인이 결여된 합병증에 대해 치료적 효과를 흉내 내면서도 실제 문제는 손대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장치”라 단언한다.[4] 어떤 밈의 냉소와 같이, (주류) 미술계의 사람들은 실제 “돌봄(care)”에 참여하기보다 “돌봄에 관한 전시(exhibitions about care)”만을 보기 위해 줄을 설 것이다.[5] 대부분의 예술가들 또한 미술의 이러한 무기력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은 미술의 가련함을 위로하기 위해 예술의 잠재적 가능성을 애써 축소하거나 세속적 도피를 인정하고 순응한다. 그리고 다른 몇몇은 정말로 지금의 미술이 자신이 다루는 의제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그러나 네가레스타니의 말처럼 미술의 태도는 “그것의 본질적 금융적 목적, 즉 '이론'과 '~에 관함(aboutness)'(예컨대 ‘이 예술은 이러저러한 것에 관한 것이다’라는 설명)이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세탁되는 비판적 정당화를 통한 가치의 비축”에 불과하다. 이처럼 비물질화된 미술의 습관적인 담론적 이주는 그것이 발붙인 물적 세계와 멀어지며 순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말놀이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물질적 아이디어는 “새로운 전 지구적 경쟁 논리 안에서 상품화”된다.[6] 신진·젊은 작가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혁신, 그러니까 담론 네트워크가 인준하는 적절한 새로움을 무수히 제공한다. 그리고 젊은 작가에게 요구되는 정석적인 커리어빌딩과 상호경쟁은 미술의 실재적 효과에 관한 자기 성찰에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기성 제도와 산업의 담론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영합하는 움직임은 흔히 ‘주류’라고 불린다. 이는 자신의 작업이 무엇에 관한 작업인지, 그리고 어떤 담론을 효과적이고 매끄럽게 미술계 내에 유통시킬 수 있는지를 포착하는 능력과 실행이기도 하다. 오늘날 작가라는 행위성을 규정할 때 가장 크게 작동하는 조건이 바로 이 능력일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요구되는 전문성은 스스로를 (예술)노동자로 정체화할 수 있게 하는 미술계 네트워크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트워크 내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네트워크에 적응해야 한다. 오늘날 작가가 다루는 주제와 담론은 다름 아닌 미술계 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오히려, 작품이 의미 있다고 자칭하는 모순들을 풍부히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환가치의 차원에서 작품의 순환에 참여하는 기능이다.”[7] 젊은 작가는 이러한 담론 네트워크에서 인정받으면서도 적절한 관점을 등재해야 한다.
한편, 흔히 비주류는 주류의 바깥, 그러니까 제도와 시장의 논리가 아직 닿지 않은 자율적 영역으로 상상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글에서 비주류란 주류가 자신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타자화하는 자리이며, 그 타자화가 제도 바깥이 아니라 제도 내부의 언어를 통해 조율된다고 적은 바 있다.[8] 자가증강하는 미술계 기계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요구하는데, 이제 비주류라 불리는 영역이 바로 그 조달처다. 그래서 거부의 몸짓조차 네트워크에는 판독 가능한 하나의 좌표로 등록된다. 제도에 대한 반대라는 태도마저 손쉽게 회수되는 상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작가에게 비주류는 고정된 상태라기보다 통과해야 할 시기로 여겨진다. 지원사업은 이 시간에 재정을 투입해 다음 순번을 미리 확보한다. 젊은 작가는 비주류라는 대기실에서 부지런히 새로움을 생산한다. 신생공간 이후 새로이 생겨나는 무수한 ‘민간 전시 공간’들과 그곳에서 상연되는 단발적인 전시들은 비주류라는 상표를 가능케 하는 물적 인프라이다. (물론 그러한 공간 또한 자기착취로 운영된다.)
포스트포드주의 노동은 노동자의 능력 일부가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자원으로 삼는다. 정서, 성격, 취향, 관계 맺는 방식까지 노동에 동원된다. (미술계 내 큐레이터들, 작가들의 친밀한 관계가 예술(상품)의 생산에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동원되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렇게 노동과 삶의 경계가 지워지면, 노동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의 사업체처럼 운영하게 된다. 푸코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자기 자신의 기업가(entrepreneur de soi-même)”라 부른 것은 이 사태를 앞질러 짚은 셈이다.[9] 미술계에서 이 기업가는 작가 혹은 독립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비물질화가 진행될수록 가치는 자신이 매달릴 닻을 잃는다. 물질적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도대체 무엇이 그 작업의 가치를 보증하는가? 흥미롭게도 대상이 비워 둔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작가의 인격이다. 저작성이 작품 혹은 집단적 흐름이 아니라 작가 개인에게 귀속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노트, 작가의 말, 작가 인터뷰 콘텐츠, 인스타그램 피드 등은 작업 주위를 맴도는 부속물이 아니라 가치가 응결되는 표면이다. 그래서 비물질화된 미술에서 저자는 소멸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해진다. 한편, 이 개인화는 집단의 가능성을 잠식한다. 각각의 작가는 같은 기금, 같은 전시 자리, 같은 지면을 놓고 다투는 개별 사업자로 행위한다. 공동의 노동 조건을 함께 협상할 집합적 주체는 좀처럼 성립하지 못한다. 모두가 자기 이름을 건 단독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젊은 인력의 과잉은 이 경쟁을 과열시킨다. 대체 가능한 인력이 넘쳐날수록 개인은 더 쉽게 갈아 끼워진다. 그 대체 가능성이 다시 각자를 더 깊은 자기착취로 밀어 넣는다. 예술 노동이 즐거워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와 자율적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욕구는 앞선 갈등을 개인적인 문제로 봉합한다. 작가로 활동하기 위한 욕구, 말하자면 자아실현과 성취욕은 신자유주의의 우버화(Uberization)된 노동자들에게 권장되는 건강한 욕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기만과 자기착취를 벗어나기 위해, 더 나아가 미술이 가졌던 오래된 이상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미술 생태와 포스트포드주의적 예술 노동 환경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생산이다. 열정으로 포장된 노동은 미술계의 유지보수를 위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순환하기만 하는 폐쇄적 회로를 멈추기 위해서는 에너지 입력을 중단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Do nothing)’라는 명제는 우리가 감지한 시급함과, 우리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전제를 부정한다.”[10] […] “세계 정세에 대한 가장 적절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가장 부정적인 반응은 절망이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이 표출해야 할 분위기가 바로 절망이라는 것은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과 가장 상반되기 때문이다.”[11]
또한 네가레스타니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에 대해 사고하고 행위하기 위해, 상상력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할 때 가속하고 감속하기 위해, 우리는 그 덫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우리가 인지적·실천적으로 미술계라는 국지적 적소에 적응하는 한, 집단적 향상과 결과성을 겨냥하는 예술의 정의를 발전시킬 희망은 그리 크지 않다. 배를 침몰시키고 떠나라.”[12]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 혹은 탈출하기란 포기가 아니다. 생산이 아닌 탕진과 낭비를 겨냥하는 것이다. 탈출은 저항보다 어렵다. 그러므로 넘쳐나는 젊음과 열정을 어디로 흘려보낼 것인가를 기획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미술은 이 잉여를 상징 자본으로 축적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반대일 것이다. 바타유가 말한 소진, 곧 되돌려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탕진이다. 젊은 아이디어와 열정은 포트폴리오나 CV에 적립되는 대신 아낌없이 탕진될 수 있다.
[1] 파스칼 길렌,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서창현 역, 서울: 갈무리, 2026, 28.
[2] Ibid., 24.
[3] Ibid., 110.
[4] Reza Negarestani, The Human Centipede: A View From the Art World, 2013/2024.
https://tripleampersand.org/the-human-centipede-a-view-from-the-art-world/
[6] 파스칼 길렌(2026), 110.
[7] Negarestani(2013/2024).
[8] 윤태균, 「'독립', '작가', '비주류'라는 개인주의적 동일성의 재생산」, 세마 코랄, 2026.
[9]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trans. Graham Burchell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8), 226.
[10] Monsieur Dupont, Nihilist Communism: A Critique of Optimism in the Far Left (Berkeley: Ardent Press, 2009), 108.
[11] Dupont(2009), 99.
[12] Negarestani(201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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