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 경로: 서사 해석자를 위한 기록
*본문은 『침투 경로: 서사 해석자를 위한 기록』(팩션, 2022)에 수록되었음.
윤태균
1.
욕망은 물질 재현의 경로를 설정하고, 물질은 욕망의 방향을 설정한다.
1-1.
본 글에 등장하는 실재, 현실, 자연과 같은 구획들은 선험적이고 고정적인 영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통해 명명된, 존재와 생성의 장에 매겨진 행정구역이다.
2.
서사는 시간 지평에서 변화하며 한 데 나열되는 기호들의 연계이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인간의 시간 경험이 서사를 통해서 이해된다고 말한다.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은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없지만, 인간의 시간은 해석된 시간이며 이야기로 구성된 시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이 서술하는 시간적 기록들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과 현실적 지평으로 다시 쓰여진 이야기라 볼 수 있다.[1] 또한 리쾨르는 이야기하는 행위를 전적으로 현존재(Dasein)의 의식 활동으로 이해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딛고 서있는 세계의 시간을 세계 내 모든 행위자가 공유하는 내시간성(Innerzietigkeit)에 맞춰 통합한다는 것이다.[2] 이는 서사 구성 활동이 시간을 이해하는 데에 근본적인 조건임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 또한 경험한 사냥의 순간을 타인이 수긍할 수 있는 시각 언어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또한 우리는 문학의 구성 혹은 연극과 영화의 플롯(plot)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해되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기호 체계를 서사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리쾨르가 말하는 서사와 그 시간성은 주체의 주도적 구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현존재와 세계의 존재들(사물들과 타인들)을 주-객의 차원에서 분리한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접근은 인간의 서사 구성 동기를 파악하기에는 효과적이다. 서사는 경험한 세계에 대한 언어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별 서사의 특정한 발생 조건을 발굴하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서사가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서사 구성 행위가 오로지 의식의 실존적 투쟁이나 현존재의 삶과 죽음으로의 의지로 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은 현실의 여러 요인들에 의해 침범되고 변형되는 행위자이다. 특히 서사는 현실의 경험들에 관한 것이므로 서사를 설명할 때에는 의식이 속한 현실의 여러 층위들을 고려해야 한다. 즉 서사를 써 내려가는 의식은 초월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의 여러 조건에 의해 구성되는 가변체인 것이다.
4.
오늘날에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사회, 정치, 문화와 같은 장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는 의견은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정치와 사회 뿐만이 아닌 매체와 문화까지도 이미지-화폐의 작동 체계에 포섭되었으며 이 이데올로기의 물화는 국지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국적 자본주의는 구조들의 절대적이고 고정된 전제가 아니다. 다국적 자본주의란 상품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크가 이루는 이미지적 총화이며, 더불어 그것에 침투하는 물질적 요소들 즉 인간, 매체, 기후, 기술, 생태 등에 의해 구성되는 장이다. 서사와 이에 담지된 무의식이 단지 사회구조적 부재 원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내재면에서 관계하는 여러 물질적 객체들을 징후로서 드러내기에 해석은 봉합된, 동시에 서사의 파열된 틈에서 새어나오는 욕망의 구조를 물질적 사건의 장에서 파악해야 한다. 서사가 위치한 상황이 어떤 물질들의 중첩에 위치해 있는지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5.
이러한 재구조화는 “인간 의식의 심급(instance)”을 해석하고 비평할 때에 제시된다.[3] 이데올로기와 욕망, 생산의 과정이 서사의 내용을 주조할 때에 그 과정에서 개념들을 계열화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사에는 범주화된 시대의 의미들이 부여된다.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을 따라, 제머슨은 서사가 “통시적 유형”(synchronic version)의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4] 이 유형에서 역사는 사건의 연속을 통해 선형적으로 그려진다. 서사는 이러한 시대 안에서 구성되며 시대 또한 서사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처럼 제머슨은 인간의 서사 구성 행위가 심리주의로 설명되는 가능성을 영리하게 회피하며 서사를 역사적인 것으로 설명한다.[5]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 역사주의와 해석은 시대에 관한 설명을 환원의 위험으로 몰아간다. 역사를 ‘하나의’ 통일된 시대로 간주한다면, 시대는 단 하나의 내적 진리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제머슨이 알튀세르의 역사주의 비판, 들뢰즈와 가타리의 가족으로의 환원 비판을 언급하고 이를 일정 부분 수용하듯 그 또한 이러한 문제 제기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알튀세르의 비판과 같이, 환원주의적 해석의 기계적 인과론은 총체 내의 요소가 다른 요소들보다 특권화되어 다른 요소들을 설명할 수 있는 지배 약호로 작용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게 부분들은 지배 약호로서의 심급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지며 그 복합적 구조와 결합을 통해 총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제머슨은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에 의해 설명되는 ‘부재 원인’을 역사의 전제로 삼는다. 역사는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없으며 전체에 복속되는 특권적 부분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실재는 층위들 간의 관계로 형성되는 구조로서, 부재하는 원인이다. 비환원적인 총체로서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르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제머슨은 알튀세르의 구상이 층위들의 차이만을 강조한다 말한다. 알튀세르의 반헤겔적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제머슨은 루카치와 사르트르의 “매개”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에서 매개는 행위 주체가 역사를 총체화하는 방식이다.[6] 행위 주체는 타인과의 상호적 매개를 통해 역사를 인식적으로 총체화할 수 있고(서사), 이를 통해 주객의 결합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적 전통에 서 있는 사르트르는 역사 혹은 실재의 본질을 의식의 지향성과 동일한 것으로 둔다. 알튀세르가 사르트르를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 주체의 실천이 구조의 형성에 절대적인 조건이라면, 의식은 언제나 자신을 체계의 중심에 놓고 표현할 것이며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적 인간 의식에 종속된다는 것이다.[7] 영의 지적처럼, 사르트르는 역사와 인간 의식과 역사적 형식을 접합하는 데에 더 중점을 두었다. 반면 알튀세르는 요소들을 구조들의 불일치와 비연속성으로 설명한다.[8] 그러나 제머슨은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이 주요한 차이점을 건너뛴 채, 알튀세르와 사르트르의 설명을 하나의 전제 아래 합치시킨다. 이 전제는 서사가 항상 스스로를 역사화한다는 것이다. 역사 혹은 실재는 인간 의식의 행위인 서사를 통해서 접근 가능하고 서사 바깥의 재현되지 못한, 항상 초과하는 실재로 잔재한다. 영은 제머슨이 실재를 선험적인 것으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남겨둔다고 진단한다.[9] 그러나 제머슨의 실재 개념은 라캉의 실재계와도 같다. (그러나 이 실재가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 실재는 관계하는 모든 물질에 의해 침투되고, 또 침투하며 물질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 제머슨은 실재와 역사가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서사는 인간 의식의 심급이기에 제머슨의 해석론은 전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전통적 방법론에 따라 의식은 언어로 역사성을 복원시켜 자신을 실재의 어느 부분에 위치시킬 수 있다. 제머슨이 말하는 “항상 역사화하라!”는 서사의 중심적 기능을 설명하는 명제이기도 하다. 실재는 매개의 잠재성을 가지는 육체적 현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서사는 탈중심화된 의식이 불연속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둘러싼 실재를 언어라는 교차점을 통해 총체적 구조로 매개하는 방식인 것이다. 사실 제머슨의 이러한 시도는 루카치의 이론를 다시금 온전하게 부활시키려는 기획이었다. 루카치는 물질과 단절된 관념론적 사고,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주체들의 추상화는 각 요소들을 고립된 것처럼 보이도록 몰아세운다고 파악한다.[10]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매개의 개념을 통해 이 단절된 요소들을 같은 현실의 장으로 복귀시킨다. 인간적 본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요소들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이 관계는 유물론적 총화를 이룬다. 결국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은 어떤 표면적인 것을 파악할 때에 그것이 관계하는 구조적 요소를 밝혀낼 수 있는, 매개의 실천적 지향과도 같다. 앞서 논했던 제머슨의 입장과 비교해 보았을 때에, 제머슨은 루카치의 이론을 답습하는 듯 하다. 예컨대 루카치는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농민들』(1844-1855)을 이렇게 분석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개의 그룹들인 농민, 부르주아, 귀족은 끊임없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거친다. 이러한 서사는 루카치에 의해 리얼리티, 즉 현실의 모순을 충실히 재현한 ‘반영’으로 평가받는다. 루카치는 문학이라는 서사의 한 방식을 통해 당대의 ‘총체적’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를 읽어낸 방법은 매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루카치와 제머슨의 결정적인 차이 또한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루카치의 입장에서 발자크는 프롤레타리아트 주체의 변증법적 의지를 통해 현실을 형상화하지만, 제머슨의 입장에서 발자크는 그의 욕망으로 인해 현실을 서사로 물화한다. 쉽게 추측할 수 있듯, 이 욕망은 전적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욕망이다. 총체성의 구조를 정신분석학적 도식으로 상정한 제머슨은, 서사를 리비도 역학의 결과로 설명한다. 서사의 등장인물들과 그 행위들은 현실의 모순을 욕망의 알레고리로 드러내며 서사 내부의 이야기들에서도 리비도는 카텍시스(cathexis)의 경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운동한다. 이러한 설명은 저자의 서사 구성 행위 또한 자신의 욕망을 통한 총체화의 결과라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정치적 모순에 의해 구성되는 의식/무의식의 욕망을 서사의 재현적 구조로 추출 혹은 부호화(coding)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사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또한 현실의 모순을 이데올로기적 양식으로 봉합하며,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리비도를 유토피아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는 고정된 본질의 유토피아가 아닌 욕망이 정착하려는, 전적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변증법적 해결이다. 이처럼 서사에 공존하는 이데올로기적 봉합과 실재의 파열 지점을 파악하는 것은, 서사를 해석하기 위한 조건이자 해석이 향하는 지향점이다.
6.
제머슨은 초과하는 실재와 구분되는 언어의 영역을 서사의 영토로 설정했다. 그렇다면 서사화 될 수 있는 시간적 사건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서사는 시간의 개념적 축에 따라, 통시적 시간을 공시적으로 계열화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흄(David Hume)의 설명처럼 흐릿하고 손상된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11] 과거는 현재가 지속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의지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능동적인 기억 작용을 거치기 전의 순수기억이다. 거칠게 등치하자면 무의식과도 같다. 이 순수기억은 의식이 능동적으로 계열화해둔, 미리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가능성들을 잠재한다. 체화된 기억들은 순수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순수기억 혹은 순수과거는 능동적인 기억 작용을 가능케 하는 근간이 된다. 이 능동적 기억 작용은 잠재성의 영역인 순수과거를, 언어적 계열화를 통해 현재에서 현실화한다. 들뢰즈의 과거 또한 단순히 과거가 봉쇄된 기억의 저장고가 아니라, 지속적인 재영토화를 거치는 비규정적 생성을 잠재하며 결국 미래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상상을 잠재하는 실재의 서사화와 유사하다. 그러나 들뢰즈는 과거를 순수하게 잠재적인 영역으로 탈근거화하지만[12] 미래라는 시간적 표상은 과거와 현재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규정한다. 과거의 현행적 계열화 즉 서사는 의식/무의식의 지속적인 자기 역사화로 이해되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상관관계는 종말을 예견하는 묵시록의 내용을 취하지는 않는다. 비록 제머슨에게 미래가 과거를 규정하는 역사의 부분이지만, 미래는 이미 현재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에서 드러나는 미래 또한 탈중심화된 의식/무의식이 실재에 반응하는 또다른 현행적 계열화이기에 현재와 관계한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규정하지만, 동시에 과거와 현재에 반응하여 생성된 기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의 순환적 연계는 실재를 어떠한 미규정의 잠재성으로 둔다. 그러나 잠재성의 상태는 카오스가 아니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실재는 카오스모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카오스는 ‘무한 속도’로 진행되는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이다.[13] 카오스의 무한속도로 인해,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무한한 가능성과 우연적 결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지속되는 속도가 느려질 때의 순간을 포착하여 실재의 규칙과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사유행위이다. 카오스를 절단하여 어떠한 ‘내재면’(plane of immanence)을 펼쳐 보이는 형식, 즉 철학과 예술이라는 서사적 형식이 이에 해당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분과가 본래 카오스의 무한한 가변성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필수적 장치, 즉 카오이드(chaoid)라 말한다. 한편 이 보호 장치가 과도하게 견고해질 때에, 사유는 카오스와 전혀 관계하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사의 원천적 봉합은 현실이라는 카오스적 실재를 이데올로기라는 피상적 언표 행위를 통해 빈틈없이 감싸는 것이다. 이렇게 폐쇄되어버린 평면에서는 카오스와의 대결이 아닌, 또다른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예술의 경우, 들뢰즈는 ‘클리셰’(cliché)를 예시로 든다.[14] 이 때 클리셰를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본래 대결 구도에 있던 카오스와 결탁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의 본성이 바로 ‘구성된 카오스’인 카오이드라 말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생명 질서를 직관으로 포착했다면, 들뢰즈는 예술이 카오스의 발생 논리 포착에 사용하는 것은 지각과 정서, 즉 감각이라 말한다.[15] 말하자면, 예술은 미학적 형상이라는 유한함에 카오스적 비규정성을 담지하여 ‘정서’(affect)로서의 발생을 포착한다는 것이다.[16] 한편, 들뢰즈의 카오스는 온갖 ‘차이나는 것들’의 발생이 반복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들뢰즈는 니체(Fridrich Wilhelm Nietzsche)의 영원회귀를 자신의 일의적 존재론으로 해석한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설명하듯, ‘되풀이되는 생성’은 동일성의 반복이지만 그 반복에서 차이가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되는 차이들은 결국 “감각될 수밖에 없는 차이들의 카오스”이다.[17] 이러한 카오스를 긍정적으로 본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지성과 직관을 상호 시혜적인 것으로 교차했듯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카오스모스’(chaosmos)를 도입한 것이다. 결국 차이와 반복의 카오스는 무한한 것으로, 우리는 잠재성의 가능케 하는 카오스모스에서 무한한 카오스적 실재를 감각한다. 카오스모스는 카오스 외부의 것을 통해 주조되는 것이 아닌 카오스 그 자체의 규정 가능성에 의해 가능하다. 베르그송이 직관의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지성이라 상정했듯, 카오스모스는 카오스를 의도적으로 절단한 면이다. 따라서 카오스모스라는 특이성의 내재면은 지속으로서의 카오스 그 자체가 아니기에, 그 위상학적 구조에는 계열화된 의미들이 복잡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때, 우리는 이미 계열화되어 있는 코드를 미끄러지며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과정을 통한다.[18] 실재 또한 마찬가지로 무규정성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오직 언표들의 배치와 리비도적 계열화에 의해 언어로 규정된다. 즉 카오스로서의 실재가 언어 또는 언표 이전의 지속적인 현실이라면 서사는 언어와 언표로 카오스의 단면을 계열화한 카오스모스이다. 실재가 지속적인 잠재의 카오스모스라면, 서사는 계열화를 통해 현행성을 취한 펼쳐진 인간의 시간이다. 또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또한 분리되지 않으며 내재성을 가진다. 서사는 카오스를 절단하여 개념들로 재조직하는 아이온적 시간의 카오스모스(Chaosmos)인 것이다.[19]
이에 따라 우리는 내재면의 개념에서 총체성으로의 통행로를 찾을 수 있다. 들뢰즈는 형이상학적으로 상정된 초월적 총체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소들의 접속을 통해 가능태로 존재하는 내재면에서 계열체들의 관계로 생성되는 일시적 총체를 찾을 수 있다. 관계들과 횡단성의 회집체로서, 내재적 총체성은 우리가 어떤 지평으로 서사를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들뢰즈는 총체성 개념의 위상에 반발하는 것 자체로 다시금 총체성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이다.[20]
6-1.
사유-물질은 이항 관계 끝의 고정된 항이 아니다. 물질은 관계 이전에 선재하는 것이 아닌, 항상 서로와 접촉하여 분화하고 합류하는, 그리고 침투하는 흐름으로서 사건이다. 항상 유동하는 사건으로서의 물질은 상관주의를 벗어난 물체적 흐름의 접합이자 주름이다.
7.
인간의 시간으로서, 서사는 정신적 실재를 언어로 역사화하는 과정에 의해 작성된다. 그러나 이 역사는 하나의 법칙이 아니다. 역사는 매번 새롭게 기술된다. 무작위적인 물질의 관계들 사이에서, 역사화는 법칙을 통해서가 아닌 항상 관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의식/무의식에 체화된 구조와 경제, 사회와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권화된 최종심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테크놀로지, 생태, 기후, 예술과 능동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인 수행적 관계로 결정된다. 이러한 구조들은 서로에게 속하며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입힌다. 이러한 요소들의 복잡한 관계들, 그리고 그와 함께 뒤얽힌 인간의 의식/무의식이 서사로 반영될 때에 서사는 이 카오스적 관계들을 내재면으로 절단하여 역사화한다. 이 관계들이 매개라는 언어적 설명으로 계열화되는 것이다. 서사가 현실의 요소들을 매개하는 방식이 바로 역사화의 핵심이다. 앞서 언급했듯, 탈주체화된 의식/무의식 또한 어느 장에서는 능동적이지만 동시에 수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식/무의식 그리고 그와 매개된 요소들은 각자의 힘으로 서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뒤얽히는 물질적 요소들의 다공적 관계로 인해 규정된다. 즉 서사 쓰기의 행위자로서 정신과 사유는 매개를 기술한다.
7-1
물질과 사건은 비규정적으로 존재하거나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일찍이 시도한 “자연변증법”(Die Dialektik der natur)과 같이 법칙으로서 변증법적이기 보다는, 무작위적인 물질적 관계들로 작동한다.
8.
적어도 이 지점에서, 나는 리쾨르와 같이 서사를 인간의 실재 인식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서사를 단순히 독립된 주체의 인식론적 권위에 가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언어의 수행으로서의 서사를 해석하는 지평을 제시하기 위해, 이론적 틈새에서 언어-물질, 서사-실재의 탈이분법적 전회를 고려해야 한다.
8-1.
실재는 매개되는 총체로 파악되지만, 이 총체는 선험적인 토대이기보다는 매개를 가능케 하는 내재면이자 부재 원인이다. ‘현상’은 분명한 경계를 가지는 객체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직 요소 간의 관계성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이 관게는 고정된 관계항과 관계항 사이의 것이 아닌, ‘관계항 없는 관계’이다. 현상의 단위로서의 ‘소’는 분리될 수 없는 물질들 간의 수행이 구성하는 영역적(regional)총체인 것이다. 나는 어떤 예술작품들은 그것이 보여주는 서사와 그것의 매체, 제도적 위치가 사회-정치적 ‘현실’이 수행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역능과 얽혀있는 상태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해석학이 수행해야 하는 것은 현상의 요소들이 생성하는 관계와 이 관계에 정박한 물질적 행위체들를 밝히고 건져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서사에 보다 면밀한 해석과 분석의 방법론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것이 물질의 직접적 재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적대를 카텍시스로 드러냄과 동시에 이를 서사 형식 안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봉합하기 때문이다.
갬블과 하난, 네일이 2019년의 논문에서 논하듯, 사유 바깥에서는 언제나 물러나고 유보되는 사물의 결정은 언제나 물질을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실패한다. 즉 라캉의 경우에서처럼 언어에 포착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결핍의 상태이기에 언제나 재현을 초과하는 한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과 비평이 의도하는 것은 언어화되지 않은 것이 언어화되는 지점-봉합과 파열로서의 서사-의 포착이다. 위의 논문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는 라캉과 그에 대한 버틀러의 해석이 의식과 물질 간에 양자가 분리불가능한 경계선을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또한 라캉과 버틀러의 이론이 물질이 언제나 인간 담론에 사로잡혀 설명하고, 물질적 실재에 언어적 경계를 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라캉과 버틀러의 기획이 오히려 물질을 상처 입히고 규정하는 언어의 실재적 조건들을 역설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언어의 실재적 조건들이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적극적인 작용들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사회, 정치, 매체, 기계, 기술, 생태 등의 구획들 말이다. 이 언어적 구획들은 물질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관계하는지를 징후로써 보여준다.
8-2.
사회, 정치, 도시는 인간 의식의 자폐적인 전유물이 아니라 언제나 상호 매개되고 침투되는 ‘자연’이다. 마찬가지로 물질 또한 항상 인간 언어 바깥의 영역에 거하지는 않는다. 사회, 정치, 도시, 매체, 경제, 기계, 기술, 생태 등은 총체적 세계에서 수행적으로 관계한다. 즉 서사가 가지는 다공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상호 매개되는 물질들-사회, 정치, 매체, 기계, 기술, 생태 등-이 어떻게 서로에게 상호-감응하며 (무)의식의 언어적 서사로 매개되는지 그 수행적 과정을 발굴하고자 함이다. 물질 간의 관계 형성은 우발적이다. 우발적이라는 것은 언어적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사 서술과 그 해석은 물질들이 서로에게, 또 인간과 사유에 어떻게 역동적으로 침투하는지 그 효과와 징후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또한 이 구성체들의 얽힘은 대칭적이지 않다. 물질 간의 상호-작용은 각 물질을 규정하지만 물질들은 또 다른 물질들과 동시에 관계한다. 따라서 각 존재의 의미존재는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진다. 현상은 수행과 횡단 그 자체이기에 해석은 본질적 의미가 아닌 매개와 상호-작용의 효과 또는 징후만을 서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결정되어 있지 않은 물질이다. 우리가 사회, 정치, 매체, 기계, 기술, 생태라고 이름 붙인 영역들은 한데 뒤얽힌 물질을 의미적으로, 언어적으로 절단하여 구획해 놓은 것이다. 물질의 장에서 이들은 분리되지 않지만, 우리는 이들 중간에 경계를 긋고, 구획하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인식의 받침대에 끌어올린다. 사실 비평과 해석의 역할도 이와 동일하다. 비평의 사유는 실재를 절단하고 관계와 개념으로 구획한다.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이 회집체들이 결코 인간-물질로 이분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영향이 아닌 상호-작용이며 상호-매개이기에 어떤 역사가 인간의 것인지, 물질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떤 유의미한 행위가 될 수 없다. 이 수정된 해석학은 서사가 인간을 포함한 여타의 수행적 물질들과 그 과정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규정되는 언어의 경유지점이라 볼 것이다. 즉 서사는 현실이 언어로 주름잡히는 내재면이며, 동시에 주름으로 나타나는 언어에서 현실을 추적할 수 있는 내재면이다. 언어는 물질의 반영이 아니며 물질 또한 언어에 종속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수정된 해석론의 강조되는 명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해석이 절충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형이 가지는 알레고리의 분석과 그 몽타주 경로를 엄밀하게 독해해야한다. 여러 객체들이 조형과 텍스트 그리고 무의식에 침투한 경로와 그 객체들의 역사까지도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해석을 위한 비평 텍스트는 대상을 알레고리화 하는 것이지 상징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조형성의 지표(index)이지 상징(symbol)이 아니다. 만약 택스트가 상징이 되려면, 그것이 이용하는 상징 체계가 문화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
외부 물질의 수행적 관계로 규정되는 인간 의식은 언제나 과정이지만, 결국 존재한다. 인간의 인식과 실재는 서로의 수행성에 의해 규정된다. 인식은 실재에 의해 침투되고, 실재는 인간의 측정에 의해 변형된다. 예시로, 이중슬릿 실험에서 측정과 얽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실험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물질의 입자는 동시에 파동이며 물질이 수행할 때에 측정 장치를 포함한 측정 행위가 관찰 대상과 관계함으로써, 실험의 진행에 개입한다는 것이다.[21]
리쾨르의 말처럼 서사는 인간의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한 바, 서사는 또한 인간에 침투한 물질의 역사화이기도 하다. 역사란 인간이 포함된 물질적 실재에서, 그 인간이 물질적 독해와 (재)기술의 특정 수행들로서 독해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역진적 독해를 따라, 신유물론은 운동하며 뒤얽히는 물질들에 관하여 새로운 역사적 존재론을 가능케 하며, 심화되는 물질적 뒤얽힘을 명료하게 드러낸다.”[22]
이와 같은 수행적 접근을 통해, 존재론과 인식론은 상호-함축되어 서로를 규정해나간다. 존재인식론(ontoepistemologic)에서, 관찰자(인식하는 자) 또한 관찰하는 것을 구성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다이애나 쿨과 사만다 프로스트는『신유물론 』(2010)의 서문에서 알튀세르의 우발적 서술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 서술들에서 신유물론적 독해를 읽어내는 쿨과 프로스트처럼, 알튀세르를 경유한 제머슨의 이론 또한 또다른 해석 지평으로 향한다.[23] 이 서문은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실존을 가진다”는 알튀세르의 아래와 같은 주장에 주목한다.[24]
“ 장치와 그 실행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실존은 포석 혹은 총기류의 물질적 실존과 같은 경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물질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최종 심급에는 물리적 실체가 떠받치고 있다.”[25]
계속해서 알튀세르를 따르자면, 동시에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물리적 실체에 기입한다. 이데올로기와 권력과 같은 관념들은 물질에 의해 주조되고 물질들에 기입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떤 선후 관계를 상정하기 보다, 물질과 관념 (혹은 인식)이 뒤얽힌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주체)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은 물리적 실체와 이데올로기, 권력과 욕망, 힘에 의해 구성되는 다종의 구성체이다. 이 다종의 구성체를 그리고 이 기입되고 침투된 실체들은 부재 원인으로서의 ‘실재’라는 장에서 구체적으로 매개되어 있고 쉽게 변형되며 침투된다. 다시 언급하자면, 우리가 물질이라고 인식하는 그 실체는 이 다의다종의 구성체를 임의적으로 절단한 물질화한 물질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유 행위로서의 서사는 사건의 단면을 드러내고 인식과 실재 사이의 관계, 그리고 구조와 구조 사이(경제-사회, 경제-기술, 사회-정신 등)를 구체적 언어로 절단하고 매개한다.
8-3.
각 요소들은 모두 실재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고르게 접속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의 요소들은 복합적인 수동과 능동의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비평할 때 그 현상이 짚어내는 실재적 사건의 접합되는 관계들에 대해 말한다.
8-4.
그렇다면 인간의 노동과 자본, 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적인 유물론을 경유하는 것은 적합한 관측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 주체와 언어에 침투한 수많은 실재적 물질의 요소들을 고려하기에,
9.
제머슨은 구조와 객체들의 자율성 그리고 약호 전환을 말하면서도, 최종 심급인 토대 즉 생산수단과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매개한다. 제머슨의 주장은 요소들의 비대칭적 매개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총체적 역사주의를 위해 국지적 매개의 가능성을 ‘자본주의’라는 자연으로 환원한다. 바라드가 재현(해석 지평)과 재현되는 것(실재)의 주-객 분리를 비판하듯, 제머슨이 제시하는 구조로서의 해석 지평 또한 타파될 수 없는 상관주의에 지배당한다. 서사 해석의 과정에서, 언어적 해석과 해석 대상은 같은 내재적 현실에 거한다. (제머슨은 실재에 대한 재현의 문제를, 실재를 항상 초과하는 부재원인으로 둠으로써 이 문제를 회피한다.) 제머슨이 사유 행위를 구조화하여 해석을 위한 지평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의 실천을 그렇지 않다.
물질 간의 관계가 어떤 구획된 객체의 규정을 생성한다면 이 객체들의 상호작용과 역학적 작동들의 회집을 구조라 말할 수 있다. 반복하여 말하듯이, 사회경제적 세계를 포함한 육체적 현실은 물질적 세계와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를 규정한다. 이를 위해 물질들의 상호 침투와 얽힘의 결과 그리고 그 효과를 서술하는 것이 언어적 측정을 위한 해석의 방법일 것이다. 물질과 물질, 의도와 행위, 원인과 결과는 분리될 수 없는 실재이며 우리는 이것을 적절히 매개하고 마주하기 위해, 인식에 적합한 언어적 명명을 위해 비평과 해석을 한다.
서사는 실재의 재현적 반영이 아니고, 실재 또한 재현되길 기다리는 고정된 세계가 아니다. 해석 행위로서의 서사가 징후로서 드러내는 실재는 해석 주체와 해석 대상이 서로에게 가지는 모든 내부 작용들의 총체이다.
10.
해석학은 서사를 단순히 행위를 의도의 결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의 장에 있는 모든 객체가 뒤얽히고 서로에게 침투한다는 점, 그리고 서사가 이러한 사건들과 독립되어 오직 재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내부에서 함께 얽혀 작용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사는 의도에 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언어로 규정하고 또 그것을 물질화하는 내부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임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헤겔과 루카치, 그리고 제머슨을 경유하여 들뢰즈와 신유물론까지를 가로지르는 해석학은 서사가 가지는 인간적, 물질적 욕망의 경로를 따라 그것이 위치한 실재의 역사적 지점을 짚어내야 할 것이다.
10-2. 따라서 비평가는 척후병이다.
예술에서 서사의 발생에 관하여
11.
조형성(formativeness)과 텍스트(text)는 발생론적 측면에서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다.
12.
텍스트는 조형성의 정제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조형성의 현재적 요소들 가운데서 피어난다는 것이다. 조형성 또한 텍스트의 힘에 의해 미세하게 흩어지며 구체화된다. 이러한 개체화 과정에서 여러 미세한 요소들의 힘이 충돌하고 조화하며 일시적 표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작가(혹은 작가가 설정한 또 다른 요인들)이다. 이렇게 대상의 과정에서 형이상학이 제거되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실재적 경험의 차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13.
전통적 조각과 회화에서의 조형성은 물질적이다. 양감, 부피, 질감, 구조, 장식, 원근법 등의 물리적 조형 요소들은 고정된 시공간에서 우리의 시각 앞에 마주하는 오브제로 앉혀져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등장한 비물질적 요소들은 작품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들로 부상한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은 미술의 주체와 대상들을 여러 개념들로 제시했는데 작품, 개념, 과정, 상황, 정보가 바로 그것들이다. 모더니즘적 발전론에서 지속되어오던 여러 예술 장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제학제휴적 (cross-disciplinary) 전략을 실천하듯, 반-미학 (여기서의 미학은 기존의 전통적 미학이다)의 기조에서 새로운 형식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퍼포먼스와 대지미술, 그리고 개념미술은 자신이 전유하는 관계들과 시공간의 경계를 확장시켜 나갔고 비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요소들인 상황, 관계, 운동, 등이 그들의 조형 형식에 포함되었다.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포스트-미디엄(post-medium) 상황, 바타유의 비정형(formless)과도 상통한다.)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res)의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19세기 구역(Musée d’ 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Section ⅩⅨéme Siècle)》와 하랄트 제만의 전시 《당신의 머릿속에 거하라: 태도가 형식이 될 때(Live in your head: When Attitudes become form)》와 같은 선구적인 예술가들에게서 등장한 새로운 형식 요소들은 어느새 지금의 예술들을 제작하고 설명할 수 있는 손쉬운 개념적 도구들이 되었다. 이러한 유동적인 요소들은 작품의 표상을 드러내는 영역, 즉 조형성의 부분으로 작동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위의 사례들을 포함한 새로운 예술형식들이 상징적(symbolic) 언어로서의 ‘텍스트’를 발화하고자 한 것이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하나인 세 개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는 언어의 기호체계와 재현이라는 텍스트적 담론을 작품의 주된 요소로 사용하였으며, 다니엘 뷔랭(Daniel Buren)의 줄무늬 회화는 미술관 밖의 공공장소들에 부착됨으로써 미술관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구체적 텍스트성을 내포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뒤샹의 《샘(Fontaine)》이 있을 것이다. 위의 몇 가지 예시들에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는 구체적인 맥락(context)과도 상통한다. 텍스트는 작품의 재료나 조형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지향성이다.) 텍스트는 조형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변증법적 구성과 몽타주에 의해 발생한다. 텍스트의 영역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작품의 새로운 구조적 조형성들, 예를 들어 과정과 행위 또한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 그룹의 출판물과 퍼포먼스들, 그리고 그것을 배포하고 행위하는 과정 자체가 오브제라는 전통적 형태에서 해체된 새로운 (또한 총체적이지 않은) 조형성이다. 조형성이 작품의 물질적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 비물질과 비정형으로 확장된 것이다. 작품들은 명백하게 고유한 전략과 이를 위한 조형을 가진다. 비평이란 수많은 독해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다. 작품이 형성하는 알레고리를 분석, 추척하여 그 전략을 언어로 추출해내고 그것이 담지하는 주체-침투된 주체-를 읽어내야함. 마찬가지로 예술의 즐거움은 이 경로를 탐색하는 독해 과정에 있다. 조형성의 부분(단순히 시각적 이미지 등)만을 채택하여 자신의 해석으로 삼기도 하며, 조형성의 성좌 구성을 파악하여 그것을 자신 독해로 삼을 수도 있다. 플럭서스(Fluxus)와 아트 앤 랭귀지(Art and Language)의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형성이 전적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모델을 따르자면, 내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이다. 예술에서 현재적 시간, 즉 언제든 즉각적으로 직관되어질 수 있는 분화된 현재가 아니라, 그 현재가 내포하는 잠재성이다. 조형성이란 알레고리적 의미화를 가능케 하는 작품의 장치들이다. 조형성은 텍스트를 내재하며 스스로의 주름에서 텍스트를 분화한다. 내재성(immanance)의 평면에서, 텍스트는 명징한 언어로 해석되려 고정되어 기다리지 않고 조형성의 기호들(이때의 기호는 언어적 기호가 아닌 감성에 수여되는 모든 현상들이다.)의 조직 사이로 미끄러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텍스트는 내재적인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있다. 텍스트는 명확하게 해석되는 정의가 것이 아니라, 조형성을 비롯하여 작품을 둘러싼 모든 맥락들 (서문, 시의성, 정치성, 상황 등)에서 도출되는 의미형성 그 자체이다. 텍스트는 감성의 대상이 되는 (칸트적) 질료 뿐만 아니라 설정된 현상이 포괄하는 현상적 질료들, 조형성의 미분적 차이들 속에서 공명하는 이념인 것이다.
14.
조형성과 텍스트는 완전히 이분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며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조형성의 성취는 곧 텍스트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성취가 조형성의 충족은 아니다.
16.
기호적 위상으로서 예술작품의 위치는 차치하더라도, 현대 이후 어떤 예술작품들의 텍스트는 조형과 제도적 미술관을 넘어 관습적이지 않은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전략은 이러한 측면에서 도드라지는데, 예술이 비경계적 혹은 탈경계적 조형성과 텍스트로 ‘가능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발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 없는’ 예술의 요소들은 조형되는 질료들-물감과 대리석에서 쓰레기와 비물질로-과 텍스트-미술관 안에서의 감상에서 미술관 바깥에의 삶으로-의 범주를 지우게 된다. 예술은 스스로에게 종말을 고하게 된다.
17.
그러나 미술관(예술이 제도적으로 ‘전시’되는, 경계 지어진 모든 공간)은 여전히 우뚝 서서 남아있으며 이곳에는 전통적 예술작품의 교조를 따르는 것들뿐만이 아닌 이미 예술로서 면직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미술관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매몰차게 떠난 현대 예술을 다시 매혹하고 있다. 작가와 비평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미술관에 다시금 종속시키려 하는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is)는 미술관의 당위를 외부의 물리적 경계가 설정한 공간적 특수성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외부와 전혀 다른 미술관의 시간 전개 속도는 마찬가지로 또다른 전시 방식, 감각 방식을 가능케 한다. 즉 미술관은 "이미 존재하는 시각적 차이"가 아닌 "수집된 것과 수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새로운 차이"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미술관 안의 공간을 다름을 인식할 수 있는 장소로 설정한다. 미술관 안 예술의 존재가 그 여집합과의 차이로 당위를 갖는다면, 그 "모호한" 차이의 지점들을 통해 변증법적 세계의 리얼리즘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이 '새로움'을 들뢰즈적 차이에서 발생한 강도로 설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차이를 가능케 하는 미술관 안의 단독자가 가지는 역량(puissance)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18.
이미 미술관 밖을 벗어난 텍스트는 다시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내가 밖’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통 미학의 영역이다. 미술관 밖의 것은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포함한다.) 조형성은 텍스트에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텍스트는 작품의 조형성에서의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외부로 절단된 텍스트를 조형성에 기호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이 취하는 것이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의 형식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페스티쉬(pastiche)는 역사적인 것들이 가지는 대략의 요소들을 서슴없이 복기해낸다.
19.
수많은 설치 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퍼포먼스와 관계미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조형 형식들은 동시대의 미술에서 참조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지난 한 세기동안 미술관에 완벽하게 융화되어 현대미술과 동어가 되었다. 이러한 조형 형식들이 가지는 특징은 크라우스가 지적한 바, “시각적인 것”이 “텍스트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크라우스는 시각적 매체를 지지체로 삼는 미술에 자율성을 두며 텍스트로서의 미술이 매체적 예술의 역할을 중단하고 “텍스트 해석학”만을 시도한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기획이 예술을 산업적 이벤트의 장의 역할을 하도록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작업은, 조형성을 잃고 텍스트만을 전달하려는 예술을 어떠한 조그만 범주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닌 예술에 최소한의 정당성, 즉 ‘시각적 매체에의 탐구’라는 역할을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요지에 따르면 포스트-미디움의 예술은 단지 메시지 (텍스트)를 전달하기 위한 일회적 상황을 조성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해석의 대상, 또는 발화의 주제가 되는 텍스트가 어떠한 근거로 작품에 수여되냐는 것이다.
20.
예술의 종말 이후, 역설적이게도 어떠한 것이 예술임을 인정받는 것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 조지 디키(George dickie)의 말처럼, 이때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은 예술계(Art Circle)에 의해서이다. 예술계는 그 요소들-작가, 대중, 비평가, 큐레이터, 기획자, 기자 등-의 총합이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시’인데, 전시는 어떠한 사물이 예술계로 들어와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게 한다. 전시를 지탱하는 전시공간은 지극히 제도적이다. 한 세기 동안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작품들 그리고 그 이후의 전시까지를 응축해오며, 현대미술 혹은 동시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은 모호하면서도 단단한 이미지적 개념이 되었다. 일련의 사물들은 전시장으로 설정된 특수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예술작품의 지위를 갖는다. 무려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으로 혹은 예술의 세계와 생활세계로, 무언가를 분류해내는 이 견고한 미술관의 벽은, 지난 세기동안 여러 사람들이 많은 시도로 그것을 부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벽들 즉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는 대부분의 수많은 작품들은, 이제는 현대미술이라는 제도적 범주로 손쉽게 분류되는,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의 형식을 취한 것들이다.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주, 퍼포먼스…한때는 미술관의 벽을 넘으려 했던 것들이, 이제는 미술관 안에서 안전하게 관조된다. 예컨대 미술관에 진입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범속하지 아니한 경험적 자세’는 미술관이 그 바깥과 분리되는 기제들 중 한가지가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것들이 가졌던 반동적인 전위성이, 실패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성공했더라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미술사의 적립으로 그 전위성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그들의 작업을 예술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서, 또는 예술계에서의 복무를 통한 생계 유지를 위해 전시장으로 반입한다. 이 때 남는 것은 오직 그들의 조형 형식뿐이다. 개념미술이 가졌던 네오-아방가르드의 전위성은 네오-네오-아방가르드로의 기제가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이미 미술계에 완벽하게 융화되었고,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아방가르드(뒤샹, 다다, 초현실주의)가 전통적 전시공간 밖으로 벗어나려 했던 것과 대비되게, 오히려 전시공간에 철저히 속박되려 한다.
누군가는 단절된 과거의 것들을 부분적으로 복기한다. 이들은 아방가르드 혹은 네오 아방가르드에서 그것의 전위성을 절단한 후 조형 형식만을 자신의 작업에 도입한다. 그리고 제작된 이 작품들은 그것들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놓여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가졌을 공격성과 파괴 능력을 상실한다. 크라우스가 말하듯 예술은 차용과 반복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독창성을 해체했다. 비단 아상블라주뿐만이 아닌 회화와 조각, 더 나아가 음악과 문학 등 전반적인 문화 영역에 이러한 현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형식들을 통해 형식주의적 독창성 혹은 작가의 영웅주의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무력화된다. 이제 아방가르드의 형식이 가졌던 전위성은 탈각되고 절충적 의미가 자의적으로 투입될 따름이다. 아방가르드의 형식의 역사성과 급진성은 오늘날의 맥락에서 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예술이 새로울 수 있는 지점은 주제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주제가 될 수 있어도 항상 실천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제 작품이 가지는 정치성은 미술관 안에 나열되는 미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맥락은 미술관의 벽에 가로막혀 그 파괴적인 힘을 잃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들은 분명히 주류라는 제도적 범주가 걸러낸 찌꺼기들을 혼합하고 주조하여, 이제 그들을 주류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찌꺼기들은 정제되지 않고 얼기설기 엮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잔해들일 뿐이다. 한때는 반동이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제는 그 효력를 잃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겨둔 지침인 '지향없는 차용'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떠한 지향 없이 잔해들을 긁모으는 행위는 쉽사리 길을 잃는다. 미술관 안에서 응시를 받아내기를 대기하는 미적인 상품으로써의 예술은, 그 안에 갇힌 채 자신에게 새로운 주제와 정치성이 부여되길 기다린다. 앞서 말했듯이 그 주제는 기만적이다.
21.
아방가르드로서의 개념미술이 가졌던 ‘텍스트성’을 차용하는 경우, 개념미술 작품의 조형성과 긴밀하게 결합되었던 텍스트가, 어떤 경향들에서는 작품의 매체적 조형성이 아닌 작품 외부의 어느 동떨어진 맥락에서 조직된다. 전시 서문들, 빼곡한 문자들로 가해지는 비평문들 없이 존속되기 불가능한 작업들은 다름 아닌 외부의 텍스트를 대상에 포섭하려는 시도이다. 텍스트가 발화되는 지점은 조형성에서 그것의 외부로 옮겨갔으며, 이제 텍스트는 본격적으로 작품의 총체에 투입된다. 그리고 이미 텍스트의 발화와 해석이 보다 강조되어 조형성이 축소된 경향들에 외부의 텍스트가 침투하며, 텍스트와 조형성은 서로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텍스트는 전시 서문과 비평문이라는, 문자로 가시화된 형식을 통해 현장에 잠입한다. 작품들은 전시공간 안에서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을 준다. 어쩌면 어떤 작품을 구체적 정동으로 경험하지 않고 그것을 해제하는 글을 읽는 것이 그것이 발화를 발견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형성의 틈에서 발화되는 텍스트는 ‘잠재적인 것’이지만, 외부에서 투입되는 텍스트는 ‘가능한 것’이다. 잠재적인 것과 가능한 것이 실재화되는 데에는 질적인 차이가 수반된다.
22.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언어적 가변성은 동시대에 반복되는 작업들에서 가변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내적인 필연성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안전한 미술관 안에서 새로운 아우라와 함께 존속한다. 학문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전시 서문들은, 조형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수여된 텍스트’들을 포함하는 작업들이 전시공간에 단단히 박히기 위한 장치이다.

[1] 김애령, 「이야기로 구성된 인간의 시간: 리쾨르의 서사 이론」, 『 철학과 현상학 연구』 0.18, 2002, p. 270.
[2] 김애령, 위의 논문, p. 284.
[3] 프레드릭 제머슨, 위의 책, p. 14
[4] 프레드릭 제머슨, 위의 책, p. 32
[5] 로버트 영, 위의 논문, p. 193.
[6] 로버트 영, 위의 논문, p. 178-179.
[7] Louis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trans. Ben Brewster (London: new Left Review, 1970), p. 63.
[8] 로버트 영, 위의 논문, p. 170.
[9] 로버트 영, 위의 논문, p. 182.
[10] 게오르크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조만영 (역), 거름, 1986, p. 162.
[11] 이정우. 「아이온의 시간에서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들로」. 『철학연구』 120, 2018, p. 146.
[12] 이정우, 위의 논문, p. 148.
[13] 성기현, 『들뢰즈의 미학: 감각, 예술, 정치, 그린비, 2019, p.192-193.
[1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윤정임, (현대미학사, 1999), p.203-204
[15] 성기현, 위의 책, p.201.
[16] 성기현, 위의 책, p. 197.
[17]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민음사, 2004), p. 105
[18] 이정우, 「들뢰즈와 사건의 존재론」, 『시대와 철학 9 , 1998, p.139-167.
[19]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 38.
[20] 프레드릭 제머슨, 위의 책, p. 65.
[21] 홍찬숙, 「바라드의 행위실재론: 수행성에서 내부작용으로」, 『SEMINAR』 ISSUE 07, 2021
[22] Christoper N. Gamble, Joshua S. Hanan, Thomas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Vol. 24 (2019), Issue 6, 111-134.
[23] Diana Coole and Samanda Frost, “Introducing the New Materialism”, New Materialism, Duke University Press, 2010, pp. 1-43.
[24] Diana Coole and Samanda Frost, 위의 책에서 재인용.
[25] Diana Coole and Samanda Frost, 위의 책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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